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102)화 (102/136)

#102

“아, 유원이 애미, 애비여… 지금은 이 세상에 없지만.”

할머니는 태범의 시선이 닿은 곳을 눈치채곤 씁쓸하게 말했다. 태범은 흔들리는 시야를 겨우 바로잡고 애써 호흡을 가라앉히곤 물었다.

“돌아가신지는… 얼마나 되었습니까.”

태범은 비슷한 사람이기를, 그 사람들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주름진 노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유원이가 8살 때 사고로 죽었으니까, 이제 11년 정도 됐네. 아이고! 이 사람이 왜 이래!”

할머니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태범이 휘청거렸다. 갑자기 덩치 큰 놈이 새하얗게 질려서는 비틀대자 할머니는 놀란 얼굴로 그를 잡았다.

“무슨 일이여, 그래! 괜찮은 거야?”

“죄송하지만, 급한 일이 생겨 먼저, 가보…겠습니다.”

태범은 회피하듯 급히 자리를 떴다. 할머니가 걱정스러운 음성으로 그를 불렀지만 귀에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급히 빌라를 빠져나와 무슨 정신으로 집까지 도착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땀에 젖은 얼굴로 돌아온 태범을 발견한 준석은 깜짝 놀라 물었다.

“형님! 무슨 일이십니까. 그 꼬맹이랑 무슨 일 있으셨어요?”

심각한 얼굴로 꼬맹이를 보러 간다고 했을 때부터 알았어야 했는데, 태범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서둘러 주방에서 찬물을 떠온 준석이 태범에게 건넸다.

“형님, 일단 물부터 드세요. 무슨 땀이 이렇게….”

태범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준석을 보다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땀에 젖은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안고 절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차유원… 부모님에 대해서 좀 알아 와. 지금 당장.”

***

서류를 읽던 태범은 유리잔에 독한 술을 따랐다. 독한 알코올 냄새가 방안을 메웠다. 태범의 손에 있던 서류가 무참하게 구겨졌다.

“차유원이. 그 애라고.”

태범은 유원의 집에서 봤던 젊은 부부를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제 어머니의 죽음에 원인을 제공한 부부가 차유원의 부모님이었다. 가장 행복한 순간, 저를 바닥으로 끌어내렸던 그 잔인한 사고의 원인이 유원의 부모와 연관되어 있었다.

그날의 사고는 하루아침에 일어난 비극이었다. 태범이 우성 알파로 발현하고, 분가를 위해 바쁘게 준비하며 본가와 태범의 새집을 오가던 어머니는 반대쪽에서 넘어오는 차를 피하지 못하고 사고를 당하셨다. 상대방의 졸음 운전이었다.

한순간에 가장 사랑하는 부인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저 때문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죄책감에 두 부자는 지옥 속에서 허덕였다.

그 후 11년. 세월이 지난 만큼 어머니에 대해 잊고 있었지만, 잊은 건 아니었다. 태범은 가슴속에 자리 잡은 상처가 아물기까지 무수한 노력을 했어야 했다.

하지만 묻어두었던 그 모든 기억이 다시 떠올랐고 태범은 그때와 같은 고통에 허덕였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오는 뜨거운 것에 태범은 잔뜩 구겨진 서류 뭉치를 바닥에 내던졌다.

유원을 탓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거의 성인에 가까운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자신도 그런 고통 속에서 살았는데, 그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잃은 유원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하기 어려웠으니까.

그런데, 유원을 보면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라 힘들었다. 태범은 지친 눈으로 얼굴을 감쌌다.

***

“유원이 니, 고마 인나야지.”

방문 앞에 선 할머니의 말에 눈을 감은 채 이불을 뒤집어쓰고 등을 돌렸다. 뒤에서 짙은 할머니의 한숨 소리가 가슴을 콕콕 쑤셨다.

오메가로 발현되고, 결국 학교를 그만두었다.

학교를 그만두면 엄청나게 후련할 줄만 알았는데 생각보다 마음이 허탈했다. 뒤늦게 발현된 탓에 페로몬을 조절하는 방법도 익히고 처음으로 히트 사이클도 보냈다.

그러는 동안 그래도 고등학교 졸업장은 있어야 한다는 할머니의 말에 혼자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그렇게 뭐라도 집중할 것이 있으니 시간은 빠르게 흘려 겨울이 지나 해가 훌쩍 바뀌어 버렸다.

“1월 1일인데 떡국은 먹고… 오메!”

1월 1일이라는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할머니가 놀란 얼굴로 두 눈을 깜빡였다.

“오늘 1월 1일이에요, 할머니?”

“그라믄 아직 31일까.”

할머니가 서 있는 등 뒤로 1월로 바뀐 달력이 눈에 들어왔다.

왜 이걸 까먹고 있었지? 급히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달려갔다.

“할머니, 저 씻고 나올게요!”

“아니, 유원아! 떡국부터-”

“다녀와서 먹을게요, 두 그릇 먹을 거예요!”

할머니껜 죄송했지만 드디어 1월 1일이 왔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매일매일 시간이 흘러가기만 기다렸는데 어떻게 까먹을 수가 있지?

몸을 씻고 나와 가장 좋은 옷으로 골라 입었다. 1월이라 그런지 집을 나오자 매서운 칼바람이 코트 안으로 스며들었다.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최대한 꾸미고 나온 건데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 추웠다.

발을 동동 구르며 손에 든 종이를 꽉 쥔 채 걸음을 옮겼다. 버스를 타고 한참이나 형이 있는 회사로 가는데도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와… 엄청 크네….”

무작정 달려왔는데, 막상 삐까뻔쩍한 건물 앞에 도착하니 나도 모르게 위축되었다. 이게 맞는 걸까. 아니야. 그래도 형을 좋아하는데….

오메가로 발현하고 며칠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사이 형은 소리소문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처음엔 일이 많이 바쁜가, 아니면 러트라는 걸 또 겪고 있나. 온갖 추측을 하며 매일 같이 복싱장 건물 앞에서 형을 기다렸다. 하지만 형은 며칠이 지나고, 몇 주가 지나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먼저 전화를 할까, 수십 번을 고민하기도 했다. 그의 전화번호를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며 하루를 꼬박 보낸 적도 있었다. 할머니의 말로는 식당에도 오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렇게 권태범이 먼저 연락해주기를 기다리다 결국, 충동적으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 삐 소리 후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이런 안내음성이 들릴 줄은 몰랐지만.

몇 번이나 반복되는 안내음성은 명백하게도 그가 나를 피한다는 증거였다. 이럴 거면 잘해주지나 말지…. 이렇게 나를 버릴 거였으면, 책임진다는 말을 쉽게 하지 말지.

권태범의 목소리 대신 기계적인 안내음 소리를 들으며 눈물을 토해냈다. 역시 남의 말을 믿지 말 걸.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이미 마음속에 자리 잡은 그를 지워내긴 어려웠다.

그렇게 혼자 며칠 밤을 끙끙 앓다 겨우 생각난 건 그가 나에게 줬던 명함이었다. 언젠가 그에게 졸라 명함 하나를 받은 적이 있었다. 계절이 바뀌어 집어넣은 옷가지를 전부 뒤져 겨우겨우 찾아낸 명함엔 그의 회사 이름이 적혀있었다.

명함을 꼭 쥐고 1월 1일이 되기만을 기다렸고, 그게 바로 오늘이었다. 선생님도 용기를 가지라고 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회사 근처에 있는 카페로 들어가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

역시나 오늘도 형은 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왜 갑자기 형이 이러는지 몰랐지만 오늘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다.

[형, 저 유원이에요. 지금 형 회사 앞에 있는 커피숍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꼭 할 말이 있어요. 형이 올 때까지 기다릴게요.]

메시지를 보내고 한참이 지나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 왼쪽 가슴이 묵직하게 내려앉았지만 그래도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입구를 응시했다.

“손님.”

“아.”

지루한 기다림 끝에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렸다. 나를 깨우는 손길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곤란한 얼굴로 한쪽 눈을 찡그린 직원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떼었다.

“죄송하지만 영업시간이 끝나서요.”

“아… 네.”

벌써 10시가 넘어가는 시각이었다. 내가 앉은 테이블엔 먹지 않은 커피만 여러 개 놓여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직원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서둘러 커피숍을 나와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형에게선 연락이 오지 않았다. 혹시 못 본 건가 하는 마음에 여러 개의 메시지를 보냈지만 상황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게다가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아 매우 초조했다. 입술을 꽉 깨물고 마지막으로 형에게 문자를 보냈다.

[형. 꼭 와주세요. 올 때까지 기다릴게요.]

메시지를 보내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 숨을 따라 뿌연 연기가 하늘 위로 닿으며 사라졌다. 발끝이 시리고 훤히 드러난 목이 너무 추웠다. 운동화 속에 있는 발끝을 꼼지락거리며 오지 않는 연락에 핸드폰을 꽉 쥐었다.

“얼른 와요, 형….”

***

[부재중 전화 7통]

[형, 저 유원이에요. 지금 형 회사 앞에 있는 커피숍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꼭 할 말이 있어요. 형이 올 때까지 기다릴게요.]

[형. 꼭 와주세요. 올 때까지 기다릴게요.]

태범은 짙은 한숨을 내쉬며 아랫입술을 짓이겼다. 유원으로부터 온 메시지를 확인한 뒤로 태범의 신경은 온통 작은 핸드폰에 쏠려있었다.

시간이 점점 흘러가고 결국 태범은 회사로 향했다. 정신없이 차를 몰고 회사 건물이 보일쯤, 문뜩 제정신이 들었다.

“하….”

고작 문자 몇 통 때문에 그동안 애써 참아왔던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되어버릴 뻔했다. 태범은 거칠게 운전대를 내리치며 차를 돌렸다. 조금만, 겨우 몇 미터 거리에 유원이 있었다. 하지만 태범은 유원에게 갈 수 없었다.

유원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의 얼굴을 보면 유원을 원망할 것 같았다. 그러긴 싫었다. 더이상 그 아이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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