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101)화 (101/136)

#101

그들이 아무리 오메가 같다고, 쟤는 분명 억제제 같은 걸 먹고 있을 거라고 손가락질 했을 때, 속으로 당당했기에 체력적으로 힘이 든 적은 있어도 심리적으로 힘든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제 어떻게 그 손가락질을, 그 시선을 견뎌야 할지 자신이 없었다.

“할머니, 죄송해요….”

“뭐가 미안해, 할미가 다 못나서 그렇지.”

한참 울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오후가 훌쩍 지나고 있었다. 가게 영업 준비를 하려면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는데…!

내가 침대에서 내려와 링거 바늘을 뽑자 할머니가 놀란 얼굴로 나를 막았다.

“뭐 하는 겨!”

“할머니 가게… 가야죠. 벌써 2시가 넘었는데.”

“아이고 됐어, 가게는 무슨.”

“네…?”

저번 달에 꽤 오래 쉬셔서 하루, 하루의 매출이 중요했다. 괜히 나 때문에 불편한 곳에서 이러고 있는 할머니를 보며 말했다.

“저 이제 괜찮아요, 퇴원해도 되니까-”

그러고 보니 병원비는 얼마나…. 보험이 적용된다 하더라도 오늘만 해도 몇 번의 검사를 받았는데 그게 전부 다 공짜는 아닐 것이다. 갑자기 현실적인 어려움이 닥치자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심장이 쿵쿵 뛰었다.

“할머니, 제발 저 퇴원 할래요. 이제 아픈 데도 없잖아요, 네?”

내가 애원하자 할머니가 마른 내 손목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그려… 가자.”

씁쓸한 얼굴로 내 뺨을 문지르는 할머니의 손길이 거칠었다. 그래도 그것이 유일한 위안이라, 나는 눈을 감았다.

***

그동안 의도적으로 유원을 피했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유원을 떠올리는 시간이 많아졌다. 단순히 아는 동생을 생각하는 거라고 치부하기엔 너무 잦았다. 자꾸만 유원의 웃는 얼굴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런데 가게에서 유원을 마주했을 때 자신도 모르게 몸에서 전율이 흘렀다. 큰 눈에 맺힌 눈물을 뚝뚝 흘리며 목놓아 울음을 터뜨린 모습을 보니 그동안 유원을 피했던 시간이 후회가 됐다.

하지만 피하지 않는 것이 맞는 걸까. 아직 어린 유원과 제가 담고 있는 세계를 떠올린 태범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러는 와중에 약속된 시간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장유성이에요.”

“권태범입니다.”

“역시 듣던 대로 과묵하시네요.”

태범은 맞은편에 앉은 우성 오메가를 바라보았다. 의도적으로 옅은 향을 풀어내며 유혹하는 모습에 미간이 저절로 일그러졌다.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제발 한 번 만 이 오메가를 만나보라는 아버지의 부탁에 태범은 억지로 자리를 지키고 앉았다.

“태범 씨는 취미가 뭐예요?”

“없습니다.”

“그래요? 저는 그림 보는 거 좋아해요. 잘 알려져 있는 화가보단 주로…….”

태범은 제 앞에 앉은 남자에게 조금의 관심도 없었다. 그저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자리를 지키며 그가 하는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다. 적당한 호응과 함께 남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태범은 문뜩 유원이 떠올랐다.

‘지금 뭐 하려나.’

또다. 이젠 예고도 없이 불쑥 떠오른 유원의 생각에 태범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래서 그동안 적당한 거리를 두려고 한 것인데 왜 자꾸 이상한 마음이 드는지 몰랐다. 그냥 동생처럼. 아는 동생처럼…….

“태범 씨?”

태범은 저를 부르는 소리에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입을 뾰루퉁하게 내민 남자가 얼굴에 서운한 티를 내고 있었다.

“제 말 듣고 있어요? 아까부터 집중도 안 하시고….”

“죄송합니다.”

“뭐, 그래도 전 태범 씨가 마음에 들어요. 태범 씨만 괜찮다면 결혼 전제로 만났으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결혼. 태범은 남자의 입에서 나온 결혼이라는 단어에 정신이 들었다.

“장유성 씨. 죄송하지만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저는 아직 결혼 생각이 없습니다.”

“알아요.”

“그럼 얘기가 빨라지겠네요.”

생각보다 대화가 통할 것 같았다. 제가 말하는 의도를 알아차린 남자를 향해 태범은 짧게 고개를 숙이며 등을 돌렸다. 그런데 갑자기 남자가 태범의 팔을 붙잡았다.

“근데 전 태범 씨한테 관심이 아주 많거든요.”

확 쳐내려 했지만 그의 말과 함께 풍겨져 나오는 지독한 페로몬 향에 태범은 숨을 멈추었다. 살짝 맡은 것뿐임에도 지독한 우성 오메가의 페로몬 향이 피부에 스며들었다.

남자는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샐록 눈을 접어 웃으며 태범의 팔등을 문질렀다. 야릇하고 분명한 의미가 담긴 손길이었다. 태범은 저를 만지는 남자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응시하다 그의 손을 떼어놓았다.

“하. 페로몬 갈무리 좀 하시죠.”

“네?”

애초에 기대조차 하지 않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더 최악이었다.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태범은 남자를 향해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더는 뵐 일 없을 것 같네요. 계산은 제가 하겠습니다.”

“태범 씨?”

뒤에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를 똑똑히 들렸지만 더 이상 호응해 줄 생각이 없었다. 저를 붙잡는 소리를 무시한 태범은 그대로 호텔을 빠져나왔다.

집에 도착한 태범은 입은 옷을 모두 쓰레기통에 집어넣고 욕실로 향했다. 아직도 제 몸에 묻은 남자의 페로몬 향이 신경을 갉아먹었다.

“하아….”

남들이 황홀하다고 극찬하는 우성 오메가의 페로몬 향이 거북했다. 그보단 조금 더 달콤하고 상큼한 향이 좋았다. 태범은 역시 제게 결혼은 맞지 않다는 생각과 함께 차가운 물에 몸을 적셨다.

“준석아, 유원이 요즘 뭐 하고 지내는지 좀 알아 와 봐.”

태범은 한동안 보이지 않는 꼬맹이가 자꾸 신경이 쓰였다. 늘 옆에서 쫑알거리며 쫓아다니는 유원의 자리는 며칠째 텅 비어있었다.

처음에는 개학도 했고 이제 수능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바쁜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연락도 받지 않는 것을 보니 슬슬 유원이 걱정되었다.

“갑자기 말입니까?”

피에 젖은 손을 닦던 준석은 뜬금없는 태범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요즘 형님이 옆에 못 보던 꼬맹이가 하나 있던데, 알고 보니 애들과 자주 가던 식당 주인 할머니의 손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바로 얼마 전이었다.

“애들이야 요즘 바쁘겠죠. 그리고 이제 고3이라면서요. 수능 때문에 바쁜 거 아니겠습니까.”

태범도 처음엔 그런가 싶었지만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잠깐이라도 복싱장엘 들렸던 유원이었다. 생각해보면 이렇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적이 없었다.

공부할 게 많은가.

태범은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아무래도 유원을 제 눈으로 봐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조금 전부터 불안하게 뛰는 심장이 자꾸만 유원을 만나라고 충동질하고 있었다.

“그럼 이따 애들 데리고 회식 한 번 하자.”

“사거리 식당 가시려고요? 거기 문 닫았던데요?”

“뭐?”

태범이 한쪽 눈썹을 치켜뜨며 준석을 바라보았다. 그걸 어떻게 아냐는 표정의 태범에게 준석이 머쓱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 어제 애들이랑 한잔하려고 갔는데 무슨 일인지 문이 닫혀있더라고요. 애들 말로는 저번 주부터 그랬다던데.”

“그걸 왜 이제 말해.”

태범은 준석을 못마땅한 얼굴로 노려보았다. 차유원이 모습을 보이지 않고, 그의 할머니도 가게 문을 닫았다면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멍청하기 짝이 없는 제 부하에게 혀를 찬 태범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장 재킷을 챙겨서 급히 밖으로 나서자 준석이 의아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형님? 어디 가십니까?”

대꾸할 시간이 없었다. 주차장으로 향하는 태범의 발걸음이 다급했다. 딱딱한 구둣발 소리가 빠르게 울렸다. 차에 오른 태범은 심각한 얼굴로 운전대를 잡았다.

“시발.”

어쩐지 처음 유원을 발견했을 때의 모습이 떠오르며 가슴이 불안정하게 뛰었다. 얼핏 유원의 상황을 가늠해봤을 때 학교에서 문제가 있던 것 같았다. 그래도 최근에 잘 웃고 다친 곳이 없어 보여 잘 지내겠거니 했는데….

태범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던 저를 탓하며 유원의 집을 향해 속도를 올렸다. 좁은 골목길을 지나 낡은 빌라 앞에 차를 세운 태범은 계단을 단숨에 뛰어 올라갔다. 마침내 유원의 집 앞에 멈춰선 그는 잠시 멈칫하다가 벨을 눌렀다.

띵동-

좁은 빌라 안에 벨소리가 울려 퍼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원의 할머니가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시방, 여기까진 무슨 일이여?”

갑작스러운 태범의 방문에 할머니의 눈이 커졌다. 태범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 고조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유원이한테 혹시 무슨 일 있습니까? 며칠 동안 연락이 안 돼서요.”

그동안 할머니는 형제도, 부모도 없이 외롭게 지내던 유원이 태범을 의지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남들이 봤을 땐 태범이 하는 일이 조금 위험해 보여 유원이 걱정되지 않은 건 아니지만, 할머니는 제가 채워주지 못한 부분을 대신해주는 관계임을 알기에 문을 열어 태범을 안으로 이끌었다.

“유원이는 지금 약 먹고 잠들었으니께, 일단 들어와.”

약?

태범은 약이라는 말에 꽉 닫힌 유원의 방문을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아까부터 어디서 단 냄새가 나는데… 자두 향 같기도 하고 꽃 향 같기도 한 향기가 느껴졌다.

“차라도 줄까?”

“괜찮습니….”

태범의 눈에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젊은 부부의 사진이 들어왔다. 순간,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눈앞이 흐려지며 심장이 쿵 하고 가라앉았다. 그동안 잊고 있던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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