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99)화 (99/136)

#99

“크흠.”

소매로 눈가를 벅벅 문지르고 있을 때 아주, 정말 아주 가까이서 들리는 소리에 몸이 굳었다. 아… 옆에 다른 아저씨들도 있는데. 내 눈에 너무 권태범만 들어와서 그만….

아저씨들은 흥미로운 시선으로 나와 권태범을 번갈아 보았다. 아는 형이 다쳤다고 울기까지 해서 민망해져서 일단 인사부터 했다. 무슨 단체로 싸움을 했는지 아저씨들의 몸에도 크고 작은 상처가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이, 일단 이걸로 치료하시고 얼른 병원부터 가세요.”

아무래도 권태범이 곤란할 것 같아 자리를 비키려는데 그가 내 손을 잡았다.

“어디 가, 꼬맹아.”

권태범은 내 목덜미에 팔을 두르더니 장난스럽게 내 볼을 만지작거렸다. 형은 아무런 생각 없이 한 행동이겠지만 그의 심장과 맞닿은 등이 아주 뜨겁게 달아올랐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고 숨을 쉬고 내뱉는 생리적인 행동조차 버겁게 느껴졌다.

“형님, 근데 할마시네 손자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입니까?”

“친한 동생.”

역시. 권태범에게서 나를 정의할 수 있는 말은 친한 동생이 전부였다. 그게 당연한 거고,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막상 그의 입에서 동생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가슴이 욱신거렸다.

“동생이라고 하기엔 나이 차가 좀 있는 거 아닙니까? 조카라고- 윽, 죄송합니다.”

얼굴의 절반이 콧수염으로 가려진 남자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키득거리자 권태범이 그의 뒤통수를 세게 내리쳤다. 생각보다 큰 소리에 헙,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권태범이 아차 하는 얼굴로 남자들을 향해 구급상자를 건네주며 손을 휘저었다.

“가서 치료나 해.”

“넵, 형님.”

남자들은 저들끼리 사라졌고 넓은 테이블엔 권태범과 나만 남아있었다. 막상 둘이 있자 분위기가 어색해서 나는 연신 마른침만 삼켰다. 적막을 일깨운 건 권태범이었다.

“공부는.”

“요즘 할머니 식당이 바빠서 조금만 더 있다가 가려고요.”

“착하네.”

그는 내 머리를 쓱쓱 문질러주며 말했다. 그러다 문뜩 다시 생각난 상처에 정신을 차리고 권태범에게 말했다.

“진짜 병원 안 가도 돼요?”

“살짝 긁힌 거야.”

샤프로 살짝 긁힌 것처럼 말하는 모습에 미간을 찌푸렸다. 누가 봐도 칼에 찔린 게 분명한데. 내가 아무 말 없이 상처를 노려보고 있자 그가 일그러진 내 미간을 톡톡 쳤다.

“꼬맹이. 그러다 주름 생긴다.”

“형은 이미 생겼어요!”

물론 거짓말이지만 나도 모르게 입을 삐죽 내밀고 소리쳤다. 씨이…. 하여간 말 진짜 안 들어. 저쪽 아저씨들은 서로 치료해주고 약 발라주고 난리가 났는데 권태범만 태연했다. 자작하려는 그의 손을 잡고 술병을 뺏었다.

“먹지 마세요.”

“그럼 이건 어쩌고.”

“오, 오천 원 정도는 저도 있거든요?”

못 팔게 된 만큼 내 돈으로 채우겠다며 당당하게 소리쳤다. 권태범이 소주병을 다시 빼앗아가더니 내 코를 아프지 않게 쥐었다.

“미성년자가 무슨.”

그 말에 나는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내가 어린 게 내 잘못도 아니고. 하루빨리 성인이 되고 싶었다. 1월 1일이 되자마자 형이 줬던 소원권으로 당당하게 고백할 거다.

베, 베타와 우성 알파 사이에 큰… 거리가 존재했지만 그건 사랑의 힘으로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었다. 분명 조금 전까진 거대한 성벽이 앞을 가로막은 것처럼 막막했는데 형을 보자 끝없는 용기가 생겼다. 어쨌든 형이랑 사귀려면 우선 형을 꼬셔야 하는데….

“형, 제가 치료해줄게요.”

꼬시는 건 둘째 치고 일단 그의 상처가 너무 눈에 들어와서 더 이상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거침없이 그의 셔츠 단추를 풀자 권태범이 당황해선 나를 막았다.

“뭐해.”

“네? 치료해야죠…?”

내 말에 그는 작게 미소 지은 얼굴로 셔츠 끝을 들어 올렸다.

아. 밑에만 살짝 들추면 됐구나. 너무 생각 없이 셔츠를 다 벗겨버리려고 했다. 그제야 형이 당황했던 이유를 깨달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누, 눈 감으세요”

형의 눈을 손으로 가렸다. 자꾸만 형이 쳐다보는 바람에 신경 쓰여서 생각을 제대로 못 하는 게 분명했다. 권태범은 순순히 눈을 감고 의자에 기댔다.

시선이 사라지자 긴장감이 조금 가라앉았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셔츠를 살짝 들추니 손가락 한 개 정도 길이의 상처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곳을 제외하곤 다른 상처들은 다행히 깊지는 않고, 스친 정도인지 피가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그래도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으… 아프지 않아요?”

“그닥. 이젠 익숙해서.”

알코올 솜으로 상처를 소독하는데 내가 다 아팠다. 울먹이자 권태범이 피식 웃었다.

“꼬맹이. 놀랐어?”

“아니요….”

상처를 보고 놀랐냐는 의미가 아니었다. 아마 그의 직업 때문에 물어보는 거겠지. 하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항상 그의 옆에 있는 아저씨들이나 그가 전화를 할 때마다 들려오는 소리에 대충은 짐작했던 일이었다.

“상관없어요.”

“…….”

“형은 좋은 사람이니까요.”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요.’

마지막 말은 차마 전하지 못했다. 그의 상처에 큼직한 거즈만 붙여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짜 오늘은 술 드시지 말고 밥만 드시고 가세요. 병원도 꼭 가시고요. 그래야 제가 형 이기죠.”

그가 알려주었던 방식대로 주먹을 쥐며 앞으로 뻗자 권태범의 입매가 부드럽게 말아 올라갔다.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주방으로 돌아가는 내내 심장이 빠른 속도로 뛰었다. 한여름의 짝사랑이 조금씩 뜨거워지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던 순간이었다.

***

방학 동안 운동도 하고 할머니의 가게 일도 도와드리며 바쁘게 지내온 만큼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어느새 긴 더위가 한풀 꺾이는 게 느껴질 만큼 한여름의 더위는 모습을 감추었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빠르게 흘러간 만큼 개학이 다가왔다. 벌써 몇 번이나 반복해온 일이지만 유독 새 학기가 시작하는 날은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가슴이 떨렸다.

‘아니야, 이번에는 달라.’

어느새 손마디에 자리 잡은 굳은살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예전처럼 아무것도 안 하고 당해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언젠가 그가 나에게 해줬던 말을 떠올리며 당당히 집을 나섰다.

걸어서 30분 정도 떨어져 있는 학교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오랜만의 등교로 들뜬 기색이 가득한 학생으로 소란스러웠다.

삼삼오오 친한 친구들끼리 모여 떠들고 장난치는 모습에 입안이 조금은 씁쓸해졌다. 애써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익숙하게 문을 열고 반으로 들어갔다.

“여~ 오메가 왔냐?”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한쪽 자리를 차지한 김상철 패거리가 시비를 걸었다. 그들은 여전했다. 바뀐 것이 없는 그들의 모습에 머릿속이 차게 식었다. 조금이라도 기대한 내가 바보 같았다.

“풉- 아 개웃겨. 오메가래. 이 미친놈.”

“아 왜~ 우리 오메가 못 본 사이에 어째, 더 예뻐진 거 같다?”

학교에서 내 이름은 차유원이 아니었다. 그저 그들에게 있어서 나는 ‘오메가’일 뿐이었다.

귀를 막고 고개를 돌리려는데 목덜미에서 낯선 손길이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몸을 숙이고 김상철의 팔을 밀어내며 주먹을 쥐었다.

“내 몸에 손대지 마.”

“오… 뭐지, 이건?”

평소와는 다른 내 반응에 김상철이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눼 몸에 손뒈지마아~”

“하, 미친놈아! 그만하라고~ 큭큭-”

김상철 패거리가 내 말을 따라 하며 비아냥거렸지만 나는 김상철만 차갑게 응시했다.

더 이상 물러서지 않을 거다.

“야 그 눈깔은 뭐냐.”

기분 나쁘다는 듯 왈칵 일그러진 김상철의 표정에도 그가 무섭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그 눈빛에 몸이 벌벌 떨리고 심장이 불안정하게 뛰어야 정상이었을 텐데, 이젠 아니었다.

“야. 그 눈깔은 뭐냐고. 내 말 안 들리냐?”

“오, 김상철~”

“너랑 할 말 없어.”

“오~ 오메가~ 세게 나오는데~”

의미 없는 대화의 연속에 몸을 돌려 그를 지나쳤다. 그러자 김상철이 내 손목을 낚아채더니 욕설을 내뱉었다.

“아, 씨발. 누가 오메가 새끼 아니랄까 봐 튕기기는.”

손목을 은근지게 문지르는 손길에 온몸에 벌레가 기어가는 것 같았다.

“내 몸에 손대지 말라고 했잖아!”

“윽, 시발.”

김상철의 어깨를 팍, 밀어내고 놈의 손목을 비틀어버렸다. 인상을 쓰고 물러나는 놈에게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내 몸에 한 번만 더 손대면 진짜 죽여 버릴 거야.”

“하, 존나 비싸게 구네, 시발.”

김상철은 놀란 얼굴로 손목을 감싸 쥐었다. 뒤에 있는 패거리는 모르겠지만 손목을 비튼 순간 우둑, 하는 소리가 났으니 꽤 아팠을 거였다.

한걸음 물러나는 김상철을 지나쳐 자리에 앉는데, 패거리는 김상철이 당한 걸 보고 오히려 웃기 바빴다.

애써 그들을 외면하며 권태범이 선물로 준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화창한 날씨와 더불어 그가 선물해준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기분 좋은 선율이 나를 위로했다.

눈을 감고 부드러운 선율에 몸을 맡기면 마치 형과 함께 있는 듯 착각이 들었다. 외로웠던 가슴에 무언가가 가득 찬 기분이었다. 그와 함께 있는 거라고 생각하니 더는 외롭지 않았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