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하면 안 되는 상상이 그려져 가슴이 울컥해졌다. 다른 여자와 호텔로 들어가는 권태범이 자꾸만 떠올라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나 진짜 왜 이래… 내가 뭐라고.”
태범이 형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의 의미는 내가 가장 잘 알았다. 내가 그를 바라볼 때와는 아주 다른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냥 아는 동생. 그것이 전부였다. 아니, 그마저도 아닐 수도 있었다. 단지 불쌍한 애. 아는 식당 주인의 손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관계였다.
하지만 내가 형을 생각하는 의미는 달랐다. 이젠 걷잡을 수 없이 그가 좋았다. 형과 있는 순간, 순간이 소중했고, 그에게 조금 더 가까운 존재가 되고 싶었다. 돌이킬 수 없는 감정에 눈물로 엉망이 얼굴을 두 손에 묻으며 울음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입술을 꽉 깨물었다.
***
형은 러트 이후로 복싱장에 나오지 않았다. 관장님의 말로는 회사 일이 너무 바쁘다는 이유였지만, 마음 한편이 불안했다.
“보고 싶다….”
“유원이, 좋아하는 사람 생겼니?”
나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생각하던 말이 입 밖으로 나왔나보다. 당황스러움에 얼굴이 빨개졌다. 그렇다고 어떻게 바로 아신 거지? 선생님한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들켰다고 생각하니 부끄러움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오, 정말인가 보네?”
윤설아 선생님과는 아주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
어릴 적 부모님이 모두 사고로 돌아가시고 학교에도 적응을 하지 못한 나는 점차 내성적이고 우울해졌다.
그러다 학교에 의료봉사자로 윤설아 선생님이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부터 선생님과 나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친구도 없고 가족도 할머니뿐이라 고민거리나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면 선생님이 많이 도와주셨다. 그런데 이제는 하다못해 연애상담까지 할 줄이야….
내가 아무리 손을 흔들고 고개를 저어 봐도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선생님은 여전히 궁금하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결국 선생님에게 실토하고 말았다.
“그게요… 사실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화끈한 두 뺨을 문지르자 선생님은 박수를 치며 환하게 웃었다.
“어머. 너무 잘됐다, 유원아. 그 사람도 유원이 좋아하는 거야?”
“아니요….”
내 입으로 현실을 말하자 또다시 우울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몇 번 입을 벙긋거리다가 선생님을 응시했다.
의사가 될 정도로 똑똑하고, 다른 사람과 관계도 원만하고, 자신감 넘치는데다가 은근히 듣기로는 집안도 굉장히 좋다고 했다. 거기다 무척 아름답고 생기가 넘쳤다. 나같이 볼품없고 가진 것도 없는 사람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윤설아 선생님같은 사람이어야 형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거겠지….’
우성 알파는 그렇다고 했으니까. 괜히 울적해져서 고개를 숙이자 선생님이 내게 초콜릿을 내밀었다.
“우리 유원이처럼 착하고 예쁜 애를 왜 안 좋아할까, 그 사람은?”
“제가요…?”
“어머, 선생님이 말 안 했어? 선생님이 본 사람 중에 우리 유원이가 제일 착하고 멋있는데?”
그러면서 선생님은 진지한 얼굴로 두 눈을 깜빡이며 말을 이어갔다.
“선생님이 중국에서 유학한 건 알지?”
“네….”
“중국에 있을 때 진짜 많은 사람을 만났거든? 근데 유원이처럼 멋있는 사람은 보질 못했어.”
그 이후로도 선생님은 내게 자신감을 북돋아 줄 수 있는 말을 해주었다. 선생님의 말을 듣고 달콤한 것도 먹어서인지 차차 기분이 풀어졌다. 내 기분 좋으라고 하는 말이겠지만….
“요즘 힘들거나 하는 건 없니? 친구들이랑은 어때?”
“다 좋아요.”
“다행이다. 잠은 잘 자는 거지?”
“네.”
“그럼 수면제 양도 천천히 줄여보는 걸로 하자.”
상담을 마무리하고 선생님께 인사드린 후 진료실을 빠져나왔다. 오랜만에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
“다녀왔습니다.”
“왔으면 후딱 이것부터 테이블에 갖다 주고 와라.”
“네!”
식당에 들어가자 벌써부터 몰린 사람들에 나도 마음이 급해졌다. 주방으로 들어가니 아직 나르지 못한 음식이 잔뜩 쌓여있었다. 아무래도 몰려드는 손님을 할머니 혼자 감당하기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께 허락을 맡고 운동을 다니는 거였지만, 힘든 내색이 역력한 할머니의 얼굴을 보니 그동안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쪽 구석엔 할머니의 저녁 식사로 보이는 퉁퉁 불어있는 칼국수가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오늘 운동 못가서 우째.”
“하루 정도야, 안 가도 돼요. 그리고 이제 많이 배워서 안 가도 될 거 같아요.”
서둘러 밀린 서빙을 하고 주문을 받았다.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식당은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 같았다.
“할머니, 잠깐 쉬고 계세요. 제가 얼른 치울게요.”
“아이고 됐다, 니나 좀 앉아서 쉬어.”
손사래를 치는 할머니를 다시 의자에 앉히고 빈 접시를 한데 모았다. 행주로 깨끗이 테이블을 닦고 주방으로 돌아와 설거지를 시작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물을 틀고 기름기 있는 빈 접시를 닦자 뿌연 수증기가 얼굴을 가렸다.
“할마시, 저희 왔어요~”
“하이고, 문디 썩을 놈들이 어디서 쌈박질하고 여길 기어들어오누. 병원이나 퍼뜩 가라.”
“에이, 그러지 말고 오늘은 간단하게 먹고 갈 테니까 계란말이랑 오뎅탕 하나만 주이소.”
“어휴, 저 육시랄놈들. 쯧-”
손님들과 할머니의 대화 중 ‘병원’이라는 단어에 몸이 작게 움찔거렸다. 고개를 살짝 돌려 밖을 내다봤지만 수증기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저 무식한 놈들. 다쳤으면 병원부터 가야지 무슨 술을 처먹겠다고 들어오는지.”
할머니는 혀를 쯧쯧 차며 주방으로 들어와 내게 말했다.
“유원아. 그거 다 하고 창고에 있는 구급상자 좀 찾아 보그라.”
“많이 다치셨대요?”
마지막 남은 접시를 건조대에 걸쳐두고 할머니께 물었다. 할머니는 프라이팬에 계란물을 부으며 혀를 두어 번 찼다.
“디비 죽으면 지들 손해지, 뭐. 아무튼 창고에 보면 구급상자 하나 나오는 게 있을 겨. 함 찾아보고 못 찾겠으면 할미 부르고.”
“네.”
후다닥 고무장갑을 벗으며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평소에 잘 쓰지 않는 물건을 모아두는 곳인데 안쪽을 잘 살피니 새것으로 보이는 구급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유통기한이 지났을까 날짜를 확인하니 다행히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았다. 서둘러 구급상자를 품에 안고 밖으로 나갔다.
“……형?”
홀에는 오래간만에 보는 권태범이 있었다. 그를 만났다는 사실에 반갑던 것도 잠시, 당황한 얼굴에 시선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피…, 찢어진 상처…, 그리고… 형…?
머리가 고장 난 것처럼 한동안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멍하게 그를 올려보다 뒤늦게 머릿속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새하얀 셔츠를 물든 핏자국. 그걸 보고서야 할머니가 다쳤다고 말한 사람이 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말도 못하고 가만히 서있자 권태범이 미간을 작게 찡그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지금 이 시간에 내가 여기 있을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꼬맹이. 이 시간에 왜 여기 있어.”
“그러는 혀, 형은…. 당장 벼, 병원부터 가요.”
구급상자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그의 손을 잡았다. 주변에 형 말고 다른 아저씨들도 있었지만 그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손바닥 크기만큼 아랫배를 물든 핏자국이 너무 선명했다. 손이 벌벌 떨렸다.
“형, 병원부터, 흣….”
“…꼬맹이, 울어?”
“흐윽, 흐….”
당황한 얼굴로 나를 살피는 표정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흘러나왔다.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참아보려고 했지만 이미 터져버린 울음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차유원.”
“흐, 흑.”
“유원아.”
그 순간 형의 입에서 처음으로 내 이름이 나왔다. 맨날 꼬맹이, 꼬맹이거리더니 내 이름을 알고 있긴 했나 보았다.
“왜, 왜 다치고 그래, 흣, 요…, 흐엉-”
“하, 진짜. 큭-”
아예 목 놓아 울음을 터뜨린 나를 보며 형은 어깨를 들썩일 정도로 웃더니 제 입매를 문질렀다.
“야, 꼬맹이.”
“흑, 흐으… 으?”
“뭘 이런 걸로 울고 그래. 그래도 그동안 밥 사 먹인 보람은 있나 보네.”
형은 장난기 어린 얼굴로 내 눈 아래를 톡톡 건드렸다. 그의 얼굴이 너무 좋았는데, 너무 속상했다.
그동안 보고 싶어 죽을 것 같았는데도 그날 들었던 대화 때문에 가지 못했다. ‘사람이 정말 누군가를 보고 싶어서 죽을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만큼 권태범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이런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권태범이 다칠 거라곤 생각하지도 못했다. 이런 형의 모습을 보니 심장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린 고통이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울컥 흘러나오는 피에 또다시 눈물이 맺혔다.
“왜 다쳤어요…. 엄청 가, 강하다면서…! 흐윽….”
다친 사람은 자기면서 왜 내가 안달하는 건지 모르겠다. 걱정하는 사람 마음은 생각도 안 하고…!
“거짓말쟁이. 흑, 완전 거짓말쟁이예요, 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