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전화기는 왜 꺼놔!”
“목소리 좀 낮추세요. 남들이 들으면 무식하다고 욕합니다.”
건설 회사로 시작해 이제는 대기업 반열에 든 태호 그룹의 수장이었지만 권 회장은 본연의 모습을 감추지 못하고 성정대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쩌라고! 내 회사에서 내 마음대로도 못해?”
“하아… 이만 나가봐요. 회장님은 앉아서 얘기하세요.”
태범은 결국 어쩔 줄 몰라 하는 비서진에게 말해 그들을 내보냈다. 권 회장이 성질을 부리며 소파 상석에 앉았고 그 옆쪽에 자리한 태범은 길게 말하지 않고 본론부터 꺼내놓았다.
“선 안 봅니다.”
“해.”
“안 봐요. 결혼할 생각 없습니다.”
단호하게 거절한 태범이 말을 이었다.
“누군가를 책임지는 것도, 한 공간에 있어야 한다는 것도 부담스럽습니다. 좋아하지도 않은 사람이면 더욱이요.”
“만나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그러다가 사랑하게 되고 그러는 거지. 원래 다들 그렇게 시작하는 거야.”
“사랑하게 된다면 더 곤란하지 않습니까?”
태범의 말에 집무실이 정적으로 가득 찼다. 모두가 알듯이 두 부자에게는 아픔이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은 아픔.
어느 날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아내를 떠올린 권 회장은 짙은 한숨과 함께 태범을 불렀다.
“태범아.”
평소와 달리 진지한 모습이었다. 태범 또한 표정에서 미약한 짜증을 지워내고 권 회장을 바라보았다. 두 부자는 서로의 눈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먼저 말문을 떼어낸 건 권 회장이었다.
“언젠가 너한테도 좋은 인연이 찾아올 거다. 하지만 그런 좋은 인연도 네가 그렇게 꽉 닫혀있다면 그냥 스쳐 지나가겠지.”
“…….”
“사랑을 해. 네 어미를 그렇게 떠나보냈지만 단 한 순간도 네 엄마를 사랑한 거에 후회한 적이 없어. 그런 사랑을 너에게도 가르쳐주고 싶구나. 이번 한 번만 이 애비가 하라는 대로 해. 부탁이다.”
태범은 평소와 다르게 진지한 얼굴로 진심을 전하는 아버지를 보며 긴 숨을 내쉬었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원하는 건 단 한 가지였다. 행복한 가정을 만들 것. 아버지가 가장 원하는 것이었지만 자신이 가장 들어줄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태범은 여전히 결혼 생각도, 제 곁에 누군가를 둘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이어진 아버지의 부탁이기에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생각했어.”
한결 밝아진 얼굴로 권 회장이 태범의 손을 감쌌다.
“손 놓으세요. 징그럽습니다.”
태범은 이만 가보라는 축객령과 함께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물까진 아니더라도 가슴이 먹먹할 정도의 감정을 쏟아냈던 권 회장은 표정 하나 없는 제 아들을 보며 소리쳤다.
“…이 자식이, 끝까지!!”
조용하던 집무실이 다시 노기에 찬 권 회장의 목소리로 시끄러워졌다. 평소와 같은 일상이었다.
권 회장의 화를 산 대가로 태범은 바쁜 시간을 보냈다. 있는 시간 없는 시간을 전부 더해서 며칠에 한 번 복싱장을 들르는 게 전부였다. 그러나 그것도 오늘 부로는 전부 끝이 났다.
“내일쯤이면 러트가 시작될 것 같아요. 저번 달에 무리하셨나요? 시기가 좀 빨라졌어요.”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예상보다 빠른 러트에 태범은 긴 숨을 내쉬었다. 아직 처리해야 할 일도 많고 당장 이번 주 주말에는 홍콩 출장도 잡혀있었다. 그리고 저만 기다리고 있을 유원이….
“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무 것도 아닙니다.”
태범은 갑자기 떠오른 유원의 얼굴에 헛웃음이 흘렀다. 기가 찼다. 유원이라니. 여기서 왜 유원의 얼굴이 왜 떠오른 거지. 그동안 유원과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았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며 머릿속에서 소년을 지워냈다.
앞으로는 적당한 거리 유지가 필요할 것 같았다. 어이없는 웃음을 흘린 태범은 처방받은 억제제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하아… 후.”
생각보다 이르게 시작된 러트에 태범은 감은 눈을 떴다.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잠이 들었던 듯 시간이 많이 흘러있었다.
온몸을 불태울 듯 뜨거운 열기에 태범이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원초적인 본능에 따라 아래가 단단해지고 당장이라도 이 열기를 종식시키고 싶었다.
더운 숨결에 섞인 태범의 고유한 페로몬 향이 공기를 축축하게 적시기 시작했다. 태범은 힘겹게 침대에서 일어나 처방받은 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지잉-
[형 오늘은 안 오세요?]
손안에서 울리는 진동에 태범이 고개를 숙였다. 유원이었다. 시계를 보니 항상 제가 복싱장에 갔던 시간이었다.
지잉-
연속해서 메시지 하나가 더 도착했다.
[형, 제가 이길까 봐 무서워서 안 오시는 거죠?]
[죄송해요, 농담이었어요.]
생각하지도 못한 도발을 했다가 금세 꼬리를 내린 유원의 문자에 태범이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 그는 또다시 제가 웃었다는 걸 깨닫고 표정을 굳혔다. 어째서…?
입가를 쓸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귀여운 꼬맹이지 않은가. 그뿐이었다.
사람이 웃을 수도 있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되뇌며 유원에게 답을 보내려 했을 때, 그는 조금 전보다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제 아래를 발견하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러트니까.
누군가 때문이 아닌 러트라서 그런 것일 뿐이었다. 태범은 핸드폰 전원을 끄고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았다. 그리곤 몸에 걸친 것을 모두 벗어냈다.
곧장 욕실에서 찬물로 몸을 식힌 태범의 머릿속에 익숙한 얼굴이 떠올랐다. 거울에 비친 태범에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빠득. 이를 간 그는 잇새로 욕설이 섞인 말을 뱉어냈다.
“씹, 이 미친 새끼.”
***
일이 많이 바쁜 건지 여전히 대답이 없는 메시지 창만 들락날락거렸다. 혹시나 늦게라도 올까 하는 기대감에 집으로 갈 수 없었다. 권태범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할 일 없이 복싱장을 돌아다니자 관장님이 물었다.
“유원이 오늘도 권태범, 그 자식 기다리는 거야?”
“네? 따, 딱히 그런 건 아닌데… 뭐….”
내가 뭐라고 내뱉는지도 모르겠다. 횡설수설 변명하다 뜨거워진 뺨을 문지르자 관장님이 알만 하다는 듯 내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그놈 당분간 못 올 텐데. 우리 막내 서운해서 어쩌나.”
“네? 왜, 왜요?”
아예 안 오는 게 아니고 당분간이라고 했지만, 왜 못 온다는 건지. 당황해서 관장님에게 재차 물었지만 관장님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러트라서 못 와.”
“러트요…?”
러트라면 형질 발현 수업에서 들었던 단어였다. 알파로 발현한 사람들이 겪는다는 일종의 발정기.
“태범이 형, 알파였어요?”
“몰랐어? 대한민국에 몇 없는 우성 알파잖아.”
그냥 알파도 아니고 우성이라니. 눈앞이 하얗게 번지는 기분이었다. 그냥 일반 베타여도 그와 내 사이에 있는 간극이 분명한데 형은 우성 알파였다.
“아이고 많이 놀랐냐? 하긴. 평소에 알파를 쉽게 볼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내 머리를 쓰다듬은 관장님은 더 늦기 전에 얼른 돌아가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지셨다. 그렇지만 나는 오도 가도 못하고 우두커니 체육관 한가운데 서 있었다.
권태범이 알파라니. 예상하지도 못한 충격적인 소식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남몰래 혼자 쌓아왔던 마음이 모두 무너져 내린 기분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을 길을 30분이나 걸려 도착했다. 오늘 운동을 무리한 것도 아닌데 몸에 힘이 쫙 빠져 아무런 의욕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창문 너머로 손님이 꽉 찬 가게를 보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다녀왔습니다.”
“유원이 왔으면 2번 테이블에 이것 좀 갖다 주고 와.”
“네.”
다행히 할머니는 기력을 되찾으셨고 며칠 전부터 다시 식당을 여셨다. 문을 닫았던 사이 어느 블로그에 할머니의 식당이 소개되었는데, 그 덕에 손님도 많아졌다.
특히 두툼하고 탱글탱글한 계란말이가 일품이라는 소리에 계란말이 주문량이 많이 늘어났다. 그 때문에 운동을 다녀와 계란물을 만드는 건 내 일이었다.
“맛있게 드세요.”
2번 테이블에 계란말이를 전달한 뒤에 주방으로 넘어와 큰 대야에 계란을 풀었다. 양손에 계란 4알씩 집고 빠른 손놀림으로 계란을 깬 다음 계란물을 만들었다.
그 다음엔 양파를 까고 마늘도 까고 기계처럼 바쁘게 몸을 움직였다. 이렇게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여야만 아무 생각도 들지 않을 것 같았다.
우성 알파….
그 단어가 주는 상실감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매스컴이나 역사서에 실린 인물을 보면 우성 알파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만큼 우성 알파는 태생적으로 유전자가 뛰어났다. 형질자가 얼마 없는 만큼 형질자는 형질자끼리 인연을 맺었고, 특히 극히 드문 우성 알파는 우성 오메가와만 결혼을 한다고 했다.
우성 알파를 감당할 수 있는 건 오메가뿐이었다. 알파들이 겪는 러트는 굉장히 고통스럽고 그 기간도 길어 오메가와 함께해야만 그 기간을 버틸 수 있다고 들었다. 베타는 우성 알파의 러트를 버텨낼 수 없었다. 형의 러트를 나는 함께 해줄 수 없었다.
‘그렇다면 태범 형도 지금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