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96)화 (96/136)

#96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직 올 때가 아니지 않나?

시계를 보니 평소보다 1시간 빨리 온 게 맞았다. 곧장 걷어 올린 바지를 내리며 형에게 인사를 했다.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둘이 뭐해.”

“네…? 아 그게 근육- 으앗!”

굳어진 형의 얼굴에 당황했던 것도 잠시, 그가 나를 번쩍 일으켰다. 나를 잡아끄는 단단한 손에 몸이 움찔 떨렸다. 가볍게 나를 일으킨 형이 여전히 바닥에 쭈그려 앉은 관장님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오늘 운동 못 해.”

“형, 잠시만요! 어?”

그 말만 남기고 나를 품에 안은 형이 복싱장을 빠져나갔다. 여전히 형의 품에 안긴 채 내가 내려달라고 다리를 버둥거리자 형이 내 엉덩이를 아프지 않게 토닥였다.

“꼬맹아, 얌전히 가자.”

“아니, 걸을 수 있어요…!”

“쉿.”

거울을 보지 않아도 내 상태가 훤히 보였다. 불타오르는 고구마 같겠지. 결코 내려 줄 기색이 없어 조용히 형의 품에 얼굴을 묻고 눈을 질끈 감았다. 너무너무 창피했지만, 또 너무너무 좋기도 했다. 가끔은 이렇게 아픈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그 길로 형은 나를 조수석에 앉혀주었다. 손수 안전벨트를 해주는 형의 품에서 옅은 체향이 느껴졌다. 언제나 맡아도 기분 좋은 향이었다. 향수를 쓰는 건가. 나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근데 저희 어디 가요…?”

“밥 먹으러.”

평소엔 복싱장 주변에 있는 식당으로 걸어갔는데 이렇게 형의 차를 타고 가는 건 처음이었다. 신기하게 생긴 차 내부를 이리저리 구경하자 형이 픽 웃었다.

오늘따라 한산한 도로를 달려 도착한 곳은 고급 일식집이었다. 분위기만 봐도 엄청 비쌀 거 같은데…. 우물쭈물한 얼굴로 형을 올려다보자 그가 나를 안으로 잡아끌었다.

“오셨습니까, 이사-”

“네. 방으로 안내해주세요.”

종업원이 뭐라고 하려는 것 같았는데 형이 말을 끊었다. 어쨌든 종업원의 안내에 복도를 지나 방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이 형과 둘만 남자 더 긴장됐다. 나는 형의 시선을 피해 방을 둘러보다 괜히 물었다.

“여기 근데 엄청 비싼데 아니에요…?”

“그런가.”

아까 형이 타고 있던 차도 그렇고 이런 고급 일식집에 오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을 보니 형이 조금은 달라 보였다. 집이 잘사나….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음식이 나왔다. 회부터 초밥, 튀김 요리에 우동까지, 테이블을 가득 채운 음식에 형과 나 말고 또 누가 오는 건가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맛있게 먹어.”

“잘 먹겠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이걸 형과 나 둘이서 다 먹어야 한다는 거였다. 형은 체격도 좋고 키도 크지만 생각보다 엄청나게 많이 먹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더 많이 먹은 적도 많았다.

이걸 언제 다 먹지…. 금가루까지 있는 음식을 보면 비쌀 텐데 남길 수도 없었다. 나는 아예 벨트까지 풀 작정으로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젓가락을 바쁘게 움직였다.

벨트를 푸를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그래도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이 먹은 탓에 배가 빵빵해졌다. 그래도 후식으로 나온 매실차까지 전부 다 해치우고 밖으로 나왔다. 저녁을 먹고 바로 집으로 갈 줄 알았는데 형이 내게 말했다.

“영화 보러 갈까.”

“영화요…?”

“싫으면 그냥 가고.”

“아니에요! 가고 싶어요!”

형이랑 더 오래 있을 수 있어서 좋았다. 아직 시간을 보니 여유도 있었다. 죄송하지만 할머니한테 조금 늦을 거 같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영화관에 갈 줄 알았는데 이번에도 내 예상이 빗나갔다. 형은 자동차 극장으로 향했다.

처음 와보는 자동차 극장이 신기했다. 조수석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니 큰 화면에서 영화가 재생되었다. 차량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가 신기해 쳐다보고 있자 형이 내 품에 팝콘을 안겨주었다.

광고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영화가 시작되었다. 조용해진 주변이 침을 꿀꺽 삼켰다. 단 둘만 좁은 공간에서 영화를 보니 형의 표정과 형의 숨소리가 더 잘 들렸다.

자꾸만 내 고개가 스크린에서 형이 있는 운전석으로 돌아갔다. 나도 모르게 자꾸만 시선이 형에게 향했다. 정말 오래간만에 보는 영화였는데, 모두가 재밌다고 극찬하던 영화였는데 하나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형 자체가 내겐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고 형과 함께 있는 이 순간이 그 무엇보다 재밌었다. 영화에 집중하는 형을 힐끔힐끔 보며 팝콘을 집어 먹었다. 아까 밥을 그렇게 많이 먹었는데 또 입에 들어가는 게 신기했다.

“재미없어?”

“네? 아뇨. 재, 재밌어요….”

너무 대놓고 봤나. 갑자기 형이 고개를 돌려 깜짝 놀랐다. 심장이 쿵쾅쿵쾅 날뛰었다. 다 들킬 것 같았다. 고개를 숙이고 팝콘을 입에 집어넣었다.

“앗.”

“맛있게 먹길래 얼마나 맛있나 궁금해서.”

형과 손이 닿았다. 그냥 손만 닿은 건데 왜 자꾸…. 귀가 너무 뜨거웠다. 급히 형에게 팝콘을 건네주며 말했다.

“아…. 더 드세요.”

형은 부드럽게 웃더니 손을 뻗어 내 입가를 문질렀다. 흠칫. 또 몸이 굳어졌다.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손가락이 내 입술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직 애기 맞네. 다 묻히고 먹고. 언제 클래, 꼬맹아.”

결국 집중을 하지 못하고 영화가 끝났다. 출연진의 이름이 쭉 나오는 스크린을 바라보다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형이 차의 시동을 걸고 나를 보고 말했다.

“이제 가자. 할머님 걱정하시겠다.”

“네….”

벌써 집에 간다니 아쉬웠지만 이젠 그만 헤어질 때였다. 오늘 하루는 마치 형과 데이트를 한 것만 같았다. 형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나는 그랬다. 꿈을 꾼 것처럼 행복한 하루였다. 평생,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형의 손가락이 닿은 입술을 문지르며 작게 웃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형에게서 고개를 돌려 창밖만 내다보았다. 형을 봤다간 분명 얼굴이 빨개질 테니까. 뿌옇게 김이 서린 창문에 작게 하트를 그려 넣었다. 내가 최대한 표현할 수 있는 전부였다.

언젠간 이 마음을 형에게 오롯이 전할 수 있는 그 날이 오길. 아직 많이 남은 1월 1일을 기대하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꾹 눌렀다.

***

‘어서오세요! 자리 안내해 드릴게요!’

‘맛있게 드세요!’

‘안녕히 가세요! 감사합니다!’

몇 번 가지 않았던 식당임에도 태범의 기억 속에 어린 소년이 밝은 얼굴로 인사하던 모습이 짙게 남아있었다. 꽤 짜증스러운 일이 있어도 소년의 활기찬 모습을 보면 기분이 나아지곤 했다.

그래서일까. 무너진 얼굴로 길가에서 울고 있는 소년을 발견했을 때, 태범은 못내 어린 소년이 신경 쓰였다.

“형님, 오늘도 운동하러 가십니까?”

“어.”

“요즘 자주 가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긴 자신만 오길 빤히 기다리는 똥강아지 같은 유원의 얼굴을 보면 없는 시간이라도 내서 가게 되는 것 같았다. 태범은 작게 웃으며 손에 묻은 혈흔을 닦았다.

“뭘 봐.”

“어, 죄송합니다. 형님께서 웃는 건 또 처음 보는 것 같아서요.”

태범은 신기하다는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준석에 손을 들어 올렸다. 입매를 만져보니 어느새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제가 웃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태범은 어색하게 입가를 문질렀다.

“그 식당 할머니네 손주 맞죠? 형님이 요즘 자주 만난다는 그 동생분이.”

태범은 또다시 이어진 말에 웃음기를 지워낸 얼굴로 준석을 바라보았다. 평소에 눈치가 빠른 준석이긴 했지만 그렇게나 티가 났다고? 갑자기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다.

“별일이네요, 형님께서 남한테 신경을 다 쓰시고.”

“그냥.”

태범은 유원과의 관계에 대해 어울릴 만한 단어를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단어에 결국 돌고 돌아 제자리에 멈추었다.

“동생 같아서.”

그래, 그냥 자신을 잘 따르고 열심히 살려는 모습이 보기가 좋은 것일 뿐이었다. 태범은 유원과의 관계를 짧게 정의했다.

지잉-

핸드폰 화면에 가득 찬 ‘회장님’이라는 단어에 태범의 얼굴이 한순간에 일그러졌다. 그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넥타이를 길게 풀고 전원을 껐다. 그제야 잠잠해진 핸드폰에 태범의 움푹 파인 미간이 원래의 형태로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권태범!”

예고 없이 문이 열린 건 10분이 채 지나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얼마 전부터 태범은 현장에서의 일을 아예 손을 떼고 본격적인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손에 익지 않은 만년필에 태범은 손안에서 만년필을 빙그르르 굴렸다. 서류를 넘기며 새로 추진하는 프로젝트 진행 사항을 읽던 그는 갑작스러운 소란에 고개를 들었다.

“권태범, 너 이 자식!”

잔뜩 화가 난 얼굴의 권회장이 태범에게 성큼성큼 걸어왔다.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숨을 내뱉는 모습이 성난 황소 같았다. 아직 정정하시네. 태범은 속으로 생각하며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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