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95)화 (95/136)

#95

늦은 저녁 타임에 권태범을 마주한 이후로 나는 최대한 늦게 복싱장으로 향했다. 다행히 할머니의 가게 일을 도와드린다는 좋은 핑곗거리도 있기에 관장님은 별말 없이 시간을 늦춰주었다.

“유원이, 많이 늘었는데?”

“감사, 학, 합니다.”

하지만 아직 보통 사람의 체력을 따라가려면 멀었다.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관장님과 달리 나는 금방이라도 죽을 사람처럼 숨을 헐떡거렸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급히 글러브를 빼고 물을 찾았다. 힘 빠진 다리를 휘청거리며 겨우 물통을 들었는데 비어 있었다.

“하아, 하….”

빈 통을 들고 정수기로 향했을 때, 문이 열리고 권태범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운이 하나도 없었는데 무슨 힘이 생긴 건지, 방향을 틀어 권태범에게 달려갔다.

“형, 오, 학, 오셨어요?”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하려 했는데 오랜만에 보는 형에 나도 모르게 숨을 몰아쉬어 버렸다. 그의 앞에서 이상한 꼴을 보였다는 생각에 귀가 화끈거렸다.

가끔 시간 날 때 온다는 그의 말처럼 형은 회사 일로 바빠서 매일 오진 못 했다. 그래도 그를 기다리는 건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 오늘처럼 이렇게 얼굴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다림은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열심히 했나 보네?”

“네? 아, 네… 조금.”

그는 익숙하게 가방을 내려놓고 글러브를 손에 끼더니 나를 불렀다.

“이리와 봐.”

“네에….”

형은 복싱장에 올 때마다 나를 불러 실력을 체크하듯 스파링을 요구했다. 내가 그의 연습 상대로는 한참 부족할 텐데도 말이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힘이 하나도 없었지만 형의 제안을 거절하고 싶지 않아서 잠자코 그를 따라 링에 올랐다.

“오늘 한 점이라도 따면 맛있는 거 사줄게.”

“맛있는 건 맨날 사주시잖아요.”

“그런가.”

권태범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내 잘 모르겠다는 듯 나에게 말했다.

“그럼 소원 하나 어때.”

“진짜요…? 막 아무거나 얘기해도 돼요?”

“그래.”

내가 무슨 소원을 빌지 알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알겠다고 하는 모습에 의욕이 불타올랐다. 어떻게 해서라도 오늘만큼은 그에게서 1점이라도 따내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가 솟아났다.

“시작.”

내가 마우스피스를 끼우고 헤드기어를 쓰자 기다렸다는 듯 그가 다가왔다. 순식간에 들어오는 손을 피하고 그의 흉통을 향해 팔을 길게 뻗었다.

권태범은 꽤 만족한 얼굴로 몸을 돌리더니 내 옆구리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퍽- 그 주먹에 몸이 흔들렸다.

“아!”

“아파?”

“…전혀요.”

피할 수 있었는데. 씨이….

아프진 않았지만 피식 웃는 권태범의 얼굴에 그가 얄미워졌다. 기울어진 몸을 바르게 일으키고 글러브 안에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글러브 너머로 빈틈을 노리다 곧바로 그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권태범은 노련하게 몸을 피하고 오히려 내 빈틈을 쫓아 팔을 뻗었다. 또다시 그에게 한 점을 내어주고 말았지만, 점점 몸에 열이 올라 정신이 또렷해졌다. 한 점이라도 따내야 속이 시원해질 것 같았다.

나는 돌아간 헤드기어를 바로 끼우며 글러브를 맞부딪쳤다.

“오, 태범이랑 유원이 스파링하는 거야?”

관장님이 심판을 봐주겠다고 링으로 올라왔다. 관장님은 나를 향해 파이팅을 외쳤다.

“유원이, 힘내라.”

관장님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는데 숙-하고 검은색 글러브가 눈앞에 들어왔다. 깜짝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집중해야지.”

“야, 애한테 좀 살살해라.”

말하는데 갑자기…. 씨, 저 아저씨가.

한번을 봐주지 않는 것은 서운하지 않았지만 이번엔 좀 서운했다. 사람이 좀 말할 수도 있지, 진짜 경기도 아닌데.

형이라는 호칭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나는 속으로 그를 아저씨라고 불렀다. 스스로도 느껴질 만큼 눈을 가늘게 떠서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그가 피식, 웃었다. 얄미워서 기습을 해버렸다.

“오, 유원이~”

연달아 손을 뻗으며 거침없이 그에게 달려들자 관장님이 박수를 쳤다. 권태범도 살짝 당황한 듯 뒤로 물러나다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땡- 1타임 종료.”

타임 종료를 외친 관장님이 나와 권태범에게 물을 건넸다. 헤드기어를 벗자마자 물을 마시는 권태범을 보며 말했다.

“왜, 허억, 왜 웃어요.”

물을 들이켠 권태범이 목선을 따라 흘러내린 물을 닦고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내, 내가 왜 이러지.

화내려던 것도 잠시, 그 모습을 보자 얼굴이 화끈거리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아무래도 오늘 너무 운동을 많이 해서 심장이 고장 난 게 분명했다.

급히 물 한 통을 전부 비워내고 두 뺨을 아프지 않게 내리쳤다.

“물배 차면 이따 맛있는 거 못 먹는다.”

“잔소리꾼….”

권태범이 들리지 않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다시 헤드기어를 썼다. 얼른 1점만 따내고 당당하게 맛있는 저녁을 먹으러 가고 싶었다.

“제가 이긴 거 맞죠?”

대답이 없는 그를 보며 내가 재차 물었다.

“형, 맞죠? 진짜 아무 소원이나 다 들어주시는 거죠?”

“…그래.”

권태범은 내 머리를 아프지 않게 톡톡 내리치더니 링에서 내려갔다.

조금 비겁하긴 했지만 그래도 1점을 따낸 건, 따낸 거였다. 종료 시각은 다가오고 결국 3라운드까지 1점도 따내지 못해 하는 수 없이 넘어지는 척 몸을 기울였다. 그러자 권태범이 놀란 얼굴로 내게 손을 뻗는 바람에 그에게 작은 빈틈이 생겼다.

겨우 만든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에게 주먹을 뻗었다. 권태범이 내 생각을 읽어냈을 땐 이미 늦었다. 마침내 내 글러브가 그가 닿았고, 관장님이 나를 향해 손을 번쩍 들었다.

그렇게 해서 결국 1점이라는 점수를 따낸 나였다. 스스로도 양심이 콕콕 찔리긴 했지만 그에게서 얻은 소원권은 아주 기뻤다.

“안 씻어?”

“저는 집에 가서 씻을래요.”

원래도 그렇게 땀이 많이 나는 체질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형이 나를 더럽게 생각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도 들었지만, 그와 한 공간에서 씻을 용기는 없었다.

“그럼 앉아서 기다리고 있어.”

“네.”

내 머리를 장난스럽게 헝클어뜨리는 그에게서 옅은 땀 냄새가 났다.

왜 이렇게 심장이 두근거리지…. 그가 주고 간 생수병을 꽉 쥐고, 샤워실로 향하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

“윽.”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매일 같이 운동을 해서 근육통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탈이 나고 말았다.

“어떡해….”

오늘도 형을 보러 복싱장에 가야 하는데… 이 상태로 어떻게 가지. 나도 모르게 긴 한숨이 나왔다.

“아니야. 아직 아침이어서 그래. 일단 조금씩 움직여보자.”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 팔에 힘을 주고 침대를 빠져나왔다. 걸음을 움직일 때마다 허벅지가 떨려서 빨리는 움직이지 못했지만 그래도 아예 서 있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제 버피 테스트까지는 오바였나봐….”

완벽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형의 복근을 보고 자극을 받아 간밤에 추가 운동을 한 게 문제였다. 역시 사람은 정도를 알아야 했다.

꾸물꾸물 거실로 기어 나오자 할머니가 놀란 얼굴로 내게 물었다.

“유원이 니 걸음이 와 그라노?”

“근육통인가 봐요….”

내 대답에 할머니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괜히 머쓱한 마음에 뻗친 머리를 문지르고 할머니 옆에 앉았다.

일찍부터 영업 준비를 하는 할머니를 도와 마늘도 까고 감자도 갈았다. 손끝이 아릿해질 때쯤 준비가 모두 끝났다.

“할머니, 이거 제가 먼저 가게에 갖다 둘게요.”

“오늘도 운동 갈기가? 그 꼴로?”

그러지 말고 오늘은 집에서 쉬라는 할머니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할머니가 뭐라고 하기 전에 후다닥 씻고 나와 옷을 챙겨 입었다.

“그럼 다녀올게요! 이따 가게에서 봬요.”

“아이고…. 그랴. 조심해서 가고 힘들면 오늘은 집에서 쉬어.”

“괜찮아요. 다녀오겠습니다.”

그래도 계속 움직였더니 아침보단 상태가 괜찮았다. 양손 가득 비닐봉지를 들고 집을 나섰다. 먼저 가게에 들러 냉장고에 넣어두고 복싱장에 건너가면 시간이 얼추 맞을 것 같았다.

몸은 무거웠지만 마음만은 가벼웠다.

“안녕, 유원이.”

“안녕하세요.”

“오늘 걸음이 왜 그래.”

내 걸음이 이상하긴 한가. 복싱장에 들어가자마자 관장님이 내게 물었다.

“근육통인가 봐요.”

“그럼 오늘은 쉬지. 권태범 때문이야?”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는 관장님의 말에 얼굴에 열기가 올랐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관장님이 근육통 파스를 들고 와 나를 자리에 앉혔다.

“다리 좀 걷어봐. 이거라도 뿌리면 그나마 괜찮아져.”

“감사합니다.”

바지를 허벅지까지 걷어 올리자 관장님이 차가운 스프레이를 다리에 뿌려주었다. 그다음 근육을 풀어주겠다며 앞에 앉아 내 종아리를 잡았다. 곧이어 관장님이 종아리를 누르자 뭉친 근육이 엄청나게 아팠다.

“아…!”

“아프지? 그래도 좀만 참아.”

“너무, 흣, 아파요….”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였다. 뭉친 곳을 꾹꾹 눌러주는 힘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관장님의 손을 밀어내고 울먹이고 있을 때였다. 문이 열리고 형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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