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그래서. 토끼 눈이 되도록 운 이유는?”
남자는 내 눈 아래를 톡톡 건드리며 물었다. 슬쩍 고개를 돌려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자 금붕어가 따로 없었다. 남자는 귀엽게 토끼라고 표현했지만 내 눈엔… 전혀 아니었다.
“그냥… 조금 일이 있어서요.”
또다시 그들을 떠올리니 눈물이 차올랐다. 서둘러 남자가 사준 포도 주스를 빨대로 빨아들였다. 식당 안이 쪼로록-하고 음료수를 마시는 소리만 들렸다.
“꼬맹이. 약육강식이라고 알지.”
남자의 말에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러자 남자가 엉망이 된 내 교복을 보더니 가늘게 뜬 눈으로 말을 이어갔다.
“약하면 잡아먹히는 거야. 힘을 길러.”
그 말에 마음이 울컥했다. 누가… 누가 지금 그걸 몰라서 이러냐고. 울컥 차오른 감정에 눈물이 삐죽 튀어나와 무릎으로 물방울이 톡, 떨어졌다. 급히 눈을 뻑뻑 문질렀다.
“어떻게….”
담배를 피우던 남자가 고개를 들며 나를 내려 보았다. 한눈에 봐도 엄청 강해 보이는 남자의 모습에 동아줄을 붙잡듯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면 강해질 수 있는데요…?”
내 말에 갑자기 남자의 손이 훅, 다가왔다. 가늘고 물렁물렁한 내 팔뚝을 만지던 남자가 담배를 비벼 끄더니 한숨을 쉬었다.
“오메가야? 향은 안 나는데.”
남자의 말에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그들에게 표적이 된 이유도 그거였다. ‘오메가 새끼 같아서 징그럽다.’는 이유. 지독하게 나를 따라붙는 그 말에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어느새 그들의 장난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남들에게는 절대로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 남자의 입에서 나왔다. 비수가 꽂힌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꾸역꾸역 고통을 참으며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이 지독한 괴롭힘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아니에요. 오메가 그런 거….”
“그럼 타고난 건가.”
내게 상처 주려고 뱉은 말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남자의 말은 내게 상처가 되었다. 남자와 눈을 맞추고 싶지 않아 고개를 푹 숙이고 음료수만 만지작거렸다.
“꼬맹이. 공부는 잘해?”
잘하는 것도, 못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해야 하니 열심히 하는 것일 뿐이었다.
“그럼 집에 돈은 많아?”
그럴 리가 없다. 침묵에 남자는 테이블을 손끝으로 탁탁 내리치더니 말했다.
“힘도 없고, 머리도 좋은 게 아니라면.”
“…….”
“그냥 미친놈처럼 굴어.”
“…네?”
생각하지 못한 대답에 먹던 음료수를 내려놓았다. 포도 알갱이가 목에 걸린 것도 아닌데 헛기침이 멈추질 않았다. 그런 내 모습이 웃긴지 남자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한쪽 턱을 괴었다.
“그동안 할멈한테 얻어먹은 밥값으로 내가 책임져 줄 테니까. 한 번쯤은 미친놈처럼 굴어보라고.”
“…….”
“벽돌로 대가리를 찍든, 샤프로 손등을 내리찍든 참고 살지 마. 그러다 병 된다.”
남자는 그 말과 함께 휴지 한 장을 뽑아 무언가를 휘날려 쓰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필요하면 연락해, 꼬맹이.”
순식간에 식당을 빠져나간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남자가 건넨 휴지 위엔 11개의 숫자와 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권태범. 그게 저 사람 이름이구나. 아무렇게나 휘날려 쓴 글자도 그 답게 강인해 보였다. 괜히 남자를 닮고 싶은 마음에 그 위를 문지르며 또다시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동안 할멈한테 얻어먹은 밥값으로 책임져 줄 테니까. 한 번쯤은 미친놈처럼 굴어보라고.’
미친놈처럼 굴라는 말의 의미는 뭘까. 고개를 숙여 손에 남은 핏자국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차유원.”
그냥 어쩌다가 본 사람이 한 말에 이렇게 휘둘리는 게 우스웠다. 이러니 매번 속고, 배신당하며, 우는 거였다. 또 사람을 믿었다가 후회하기 싫었다. 그렇게 당하고 당했음에도 여전히 희망을 놓지 못하는 스스로가 우스워 작게 조소를 지었다.
그럼에도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는 목소리가 나를 사로잡았다. 그 말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아 눈을 질끈 감았다.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
노래방에서의 일이 있은 뒤로 김상철과 그 무리가 나를 더 괴롭혔다. 보복이라도 하려는 건지 억지로 나를 끌고 가려고 하기도 했고 할머니의 가게를 찾아낼 거라고 협박도 했다.
하지만 나는 전처럼 그냥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권태범이 나를 변화시킨 것이었다. 약육강식. 약하면 잡아먹힌다는 말.
그 말을 듣고 새로 운동을 시작했다.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발견한 복싱장을 보자 나도 모르게 그곳으로 걸음이 향했다.
그동안 학교에 들고 갔다가 뺏길까 봐 집에 꽁꽁 숨겨놓은 돈을 가지고 나오니 심장이 터져 죽을 것 같았다. 어쨌든 무사히 권태범이 준 돈으로 복싱장 등록도 마쳤다.
그렇게 복싱장을 다닌 지 한 달 동안 매일 줄넘기를 했다. 그래서 그런지 키가 한 달 사이 5cm나 커버렸다. 돈을 내고 줄넘기만 하는 게 너무 아까웠는데 그래도 달라진 게 있는지 몸이 생각보다 날렵해진 거 같았다.
팔다리에 근육도 조금 붙은 거 같고. 뿌듯해진 마음에 거울을 보는 시간이 늘어난 것도 그간 있었던 변화 중 하나였다. 이대로 방학 동안 열심히 몸도 키우고 체력도 키우면 예전처럼 무시당하지 않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붙었다.
“우리 막내. 오늘은 쨉 한번 볼까?”
관장님의 말에 줄넘기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활짝 웃었다. 그동안 주변에 형이나 아저씨들이 하는 것만 지켜봤었는데 드디어 내게도 차례가 온 모양이었다. 관장님이 건네준 글러브를 손에 끼우자 느낌이 남달랐다. 묵직하면서도 단단한 감촉에 손에 힘을 주고 앞으로 뻗었다.
“여기까지.”
“하아… 하아….”
“별거 아닌 거 같은데 힘들지?”
관장님이 손에서 미트를 빼고 물을 건네주었다. 관장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가쁜 숨을 내뱉었다. 그래도 이렇게 땀을 빼고 나면 기분이 상쾌해졌다. 뜨겁게 달아오른 목구멍을 따라 내려가는 차가운 물에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래도 처음보단 많이 좋아졌어. 오늘도 처음인데 이 악물고 따라오는 걸 보면 깡다구도 있는 거 같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열심히 해야만 했다. 눈을 크게 뜨며 글로브 안으로 쥔 주먹에 힘을 실었다. 관장님은 그런 내 등을 한번 툭 내리치며 말했다.
“오늘도 안 씻고 집에 바로 가?”
여느 운동장이 그렇듯 복싱장에도 샤워실이 마련되어 있었지만 밖에서 옷을 벗은 경험이 없어 아직은 좀 꺼려졌다. 민망한 얼굴로 내가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관장님이 그런 내가 귀여운 듯 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그래, 조심히 가고 월요일에 보자.”
“네, 감사합니다.”
어차피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아 땀이 식기 전에 뛰어가면 금방이었다. 가져온 물병과 짐을 챙기며 복싱장을 나설 때였다. 이제 복싱장이 끝날 시간이라 들어올 사람이 없었는데 현관문이 딸랑이며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꼬맹이?”
아저씨였다. 그날 이후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왜 여기서 나오는지 아저씨도, 나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아저씨?”
아저씨라 부르는 내 말에 남자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어… 그럼, 형?”
“형도 웃기긴 하네. 편한 대로 불러.”
남자는 나와 자신의 나이를 가늠하듯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데요?”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니 권태범은 ‘연세….’라고 내 말을 따라하더니 어이없다는 얼굴로 웃었다.
“스물 여섯.”
“아… 그럼 형 맞네요.”
권태범은 뭐가 웃긴지 계속해서 입매를 문지르며 가져온 가방을 내려놓았다.
“여기 다녀?”
“네!”
“언제부터.”
“이제 한 달 정도 됐어요.”
이번에도 시간을 계산하던 그가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기특하네.”하고 작게 말했다. 왜인지 뿌듯해진 마음에 배시시 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물었다.
“형은 그럼 매일 이 시간에 오시는 거예요?”
“매일은 아니고 가끔. 주로 이 시간에.”
그렇구나. 그럼 앞으로 나도 이 시간에 와야지. 고개를 돌려 한쪽 벽에 붙어있는 시계를 눈에 담았다.
“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속으로 ‘같이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따라와.”
“네?”
“밥 안 먹었다며. 이 시간까지 너 굶고 다닌 거 알면 네 할머니 뒤로 넘어간다.”
그러면서 앞장서 가버리는 그를 허둥지둥 쫓아갔다. 슬그머니 올라가는 입꼬리를 막을 수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그냥 씻을 걸.’
그래도 혹시 땀 냄새가 날까 킁킁 냄새를 맡으며 그와 한 발자국 떨어져서 걸었다.
권태범이 나를 데리고 간 식당은 복싱장 근처에 있는 중국집이었는데 오랜만에 누군가와 밥을 먹어서 그런지 아주 맛있었다. 짜장면 한 그릇과 탕수육까지 전부 비워내고 밖으로 나오자 권태범은 내 손에 아이스크림을 쥐여 주었다.
“녹기 전에 먹어, 꼬맹아.”
“에에-”
담배를 피우는 그의 옆을 따라 걸으며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집으로 향하는 골목길은 늦은 시간이라 스산했다. 권태범이 아니었다면 조금 무서웠을지도 몰랐다.
조금씩 집이 가까워진 만큼 내 걸음도 느려졌다. 점점 권태범과 거리가 벌어졌지만, 나란히 걷는 것보다 천천히 갔으면 했다. 그러나 우리 두 사람은 금세 집 앞에 도착하고 말았다.
“그럼 들어가 봐.”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고개를 한번 끄떡이고 몸을 돌려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권태범은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고 나는 그가 점이 될 때까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모습이 내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조금 전 그의 손과 닿았던 손끝을 꽉 쥐었다. 두근두근 기분 나쁘지 않은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손끝을 심장 위로 가져가며 비로소 내 감정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아무래도 권태범과 헤어지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