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핸드폰을 조작하며 턱 끝으로 가게 문을 가리키는 얼굴이 여전히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허둥지둥 가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역시나 차가운 공기가 남자와 나를 맞이했다.
“오, 오늘 많이 춥네요.”
“그런가?”
숨을 내쉴 때마다 뿌옇게 흩어지는 입김에 말을 걸었지만 남자는 별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머쓱해져 힐끔힐끔 본 남자는 그의 말대로 별로 춥지 않은지 검은색 정장만 입은 차림이었다.
“아, 물건을 두고 가셨다고… 어제 어디에 앉으셨죠?”
“저기에 앉았는데 보이지 않네.”
남자의 손짓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한눈에 봐도 아무것도 없었다. 혹시 할머니가 따로 보관하셨나.
“잠깐만요, 혹시 따로 보관하고 있는지 확인해 볼게요. 어떻게 생긴 건가요?”
“그래, 부탁할게. 검은색 상자였어. 크기는 이만하고.”
“네.”
남자가 말한 내용을 상기하며 주방과 연결된 안쪽 방으로 걸어갔을 때였다. 눈앞에 펼쳐진 모습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주방 안은 홍수가 난 것처럼 온통 물난리였다.
“어, 어떡해.”
남자가 기다리고 있다는 건 새까맣게 잊어버린 채 급히 물난리가 난 바닥을 수습하기 바빴다. 안쪽으로 움푹 파인 구조로 되어있는 주방 바닥에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어제저녁에 혹시 몰라 물을 틀어 놓고 나왔지만 새벽의 추위에 그것마저도 역부족인 모양이었다. 수도관이 터져 엉망인 가게를 보며 마음이 조급해졌다. 겉옷을 벗고 소매를 걷어붙이며 바가지로 물을 퍼 날랐다.
얼마나 정신없이 물을 퍼 날랐을까. 허리가 너무 아프고 온몸은 물에 젖어 추위에 입술이 덜덜 떨렸다. 아무리 내가 움직여도 어디선가 물이 자꾸 흘러나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수준이었다. 찬물에 흠뻑 젖은 손과 발은 이제 감각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이를 어쩌면 좋아.
“하아….”
막막한 현실에 한숨을 쉬었을 때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아, 맞다. 손님!
“뭐야.”
“흡-”
아니나 다를까 나를 찾아 안쪽까지 들어온 남자가 나와 주방을 번갈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급격히 어두워지는 얼굴에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어떡해… 많이 화나셨나 봐.’
“여태 이러고 있었어?”
“죄송합니다. 제가 너, 너무 놀라고 급해서 까먹었어요….”
허리를 푹 숙여 사과했다. 손님도 바쁘고 추울 텐데 너무 기다리게 한 게 아닌가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금세 눈가에 눈물이 맺혀 차갑게 얼은 볼을 따라 눈물이 흘렀다.
“아니 화낸 게 아니고- 야, 씹. 왜 울고 난리야.”
남자는 곤란한 얼굴로 머리를 쓸어올리더니 그대로 발을 뻗어 안으로 들어왔다. 남자가 신은 구두는 한눈에 봐도 엄청 고급스러웠다. 그런 게 물에 닿으면….
“아, 안 돼요!”
내가 들어오지 않아도 된다며 손을 마구 저어도 남자는 발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남자의 구두가 홀라당 젖어버려 멍하니 바라보았다.
“야, 꼬맹이. 너 몸이 얼음장인데.”
손등으로 내 뺨을 만지던 남자가 쯧-하고 혀를 차고는 제 옷을 벗어 내게 덮어주었다. 어리둥절한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온 그는 누군가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입이 떡 벌어졌다. 남자가 전화를 시작한 지 정확히 10분이 지났을 때, 각종 장비를 들고 가게로 들어온 사람들이 엉망이 된 주방을 수리하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갑자기 왜 부르지도 않은 사람들이 우리 가게를 수리하는 건지. 할머니의 가게는 동네 맛집이었지만 워낙 저렴해서 수익이 많지 않았다. 갑자기 수리비를 왕창 청구하면 곤란해지는데… 얼마쯤 나올까.
심각한 얼굴로 안달복달하자 남자가 내게 옷 하나를 건네며 말했다.
“이걸로 갈아입어. 그러다 감기 걸린다.”
불쑥 들이밀어진 옷만 바라보고 있었더니 남자는 뭐하냐는 듯 턱 끝으로 안쪽 방을 가리켰다. 우물쭈물 고개를 꾸벅 숙이고 사람들이 수리를 하는 주방을 지나쳐 안쪽 방으로 향했다.
방에 들어온 김에 남자가 두고 갔을 만한 물건을 찾아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뭐라도 도와주고 싶었는데….
축 쳐진 얼굴로 밖으로 나가자 이미 사람들은 전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말끔히 정돈된 주방과 식당 의자에 앉아 고개를 드는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괜찮네.”
권태범은 픽 웃으며 남색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은 나를 보며 말했다. 왜 그 말에 얼굴이 붉어지는 건지, 괜히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가, 감사합니다…. 제가 돈 드릴게요. 얼마-, 아….”
황급히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자 어제 김상철과 그 패거리에게 가지고 있던 돈을 전부 빼앗긴 게 생각났다. 지금 수중에 있는 돈이라곤 십 원짜리 하나도 없었다.
어쩌지….
수리비는 어떻게 된 거지? 이 옷값은 또 어떻고. 애꿎은 입술만 잘근거리며 남자의 시선을 피해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형님.”
그때, 누군가 남자를 부르며 가게 문을 살짝 열었다. 그 말에 남자는 고개를 돌리더니 금방 나간다고 대답했다.
아….
왜 이 순간이 아쉽게 느껴지는 건지 오랜만에 느껴보는 따스한 온정이어서 그런가. 얼굴이 확 달아오르며 남자의 향수 냄새가 진하게 느껴졌다.
살금 눈을 들어 남자를 훔쳐보는데 그와 두 눈이 마주쳤다. 깜짝 놀라 고개를 숙이는데 남자가 지갑에서 노란색 지폐를 잡히는 대로 꺼내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사례비. 이걸로 까까나 사 먹든가.”
“네? 아, 아니 괜찮아요. 오히려 제가….”
“어른이 주면 그냥 ‘감사합니다.’하고 받는 거야.”
사례할 게 뭐 있다고 그가 내게 돈을 주는지 모르겠다. 도와준 사람은 오히려 그인데…. 우물쭈물하다가 단호하게 눈빛이 변한 모습에 어쩔 수 없이 남자가 건네는 지폐를 받아들였다. 이렇게 큰돈은 처음이었다.
이걸 가지고 있다가 김상철에게 뺏기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들었다. 지폐 끝을 꾹 잡고 입술을 잘근거리자 남자가 다음에 또 보자는 말과 함께 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곧 몸을 돌려 멀어지는 남자의 모습에 아쉬움이 한층 더 짙어졌다. 남자를 향해 입술을 달싹이다가 용기를 내어 소리쳤다.
“다, 다음에 또 오세요!”
그러자 절대 돌아보지 않을 것 같던 남자가 나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남자는 다음에 또 오라는 내 말이 재밌던 건지 작게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런데 꼬맹아. 다음부턴 검지와 중지를 엄지로 누르면서 이렇게. 이런 식으로 쥐어.”
갑자기 남자의 뜨거운 온기가 손에 닿았다. 남자는 엄지를 말아 쥔 내 주먹을 펴서 다시 접어주며 말을 이어갔다.
“손목까지 힘을 싣는 것처럼. 이래야 타격감도 좋고 너도 안 다친다.”
주먹을 쥐는 것도 방법이 있구나. 그래서 아까 나를 보고 웃은 것일까. 민망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자 남자는 또다시 웃음을 흘리며 식당을 빠져나갔다.
꽉 닫힌 문과 흔들리는 종소리가 머릿속에 아득하게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
“흑, 흐읍, 흐으…….”
어떻게 노래방을 빠져나왔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냥 무조건 거기서 빠져나와야 한다는 생각에 죽을 듯이 반항했던 것 같았다. 손에 잡히는 대로 술병을 들어 김상철의 머리를 내려쳤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손은 피범벅이었다.
남을 해쳤다는 생각에 손이 달달 떨리고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이대로 감옥에 갈지도 몰랐다. 김상철이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많지만, 그가 정말 죽길 바라는 건 아니었다.
이런 모습으로 할머니 집으로 갈 수 없었다. 무작정 시내에서 도망쳐 나와 걷다 보니 발걸음이 할머니의 가게로 향했다.
요즘 몸이 좋지 않으신 할머니는 가게 문을 닫고 당분간 쉬신다고 했다. 그러니 지금 가게에 가면 아무도 없을 거였다. 휘청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골목길을 걸어가며 눈물로 흠뻑 젖은 얼굴을 문질렀다.
“흣, 흐으….”
입술을 질끈 깨물고 울음을 참아도 쉬이 멈춰지지 않았다. 허물어지는 모래성처럼 한계를 넘어선 감정의 둑이 한없이 무너져 내렸다. 길 한복판에서 엉엉 우는 내가 신기한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쿡쿡 찔렀다.
그 시선에 못 이겨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숨을 죽였다.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숨을 억지로 들이마시고 손톱을 세워 손바닥을 긁었다. 그러자 손톱 사이에 피가 스며들어 지워지지 않을 흔적이 몸에 남았다.
그냥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었는데 왜 내겐 이렇게도 힘든 일인지. 모든 게 서러웠다.
“끅, 끄읍…. 흐….”
“야, 꼬맹이.”
펑펑 울고 있는데 귓가에 의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쉬워 몇 번이나 되새겨봤던 남자의 향수 냄새가 느껴지며 나의 세상이 어두워졌다. 푹 숙인 고개를 들자 그때 봤던 남자가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왜 길 한복판에서 울고 지랄이야.”
“흑, 으…흐.”
“무슨 일 있었어?”
“흐으엉… 히윽, 흣, 으….”
이렇게 누가 반가웠던 적이 있었나? 이름도 모르고 겨우 한번 본 사람인데도 다정하게 달래주는 목소리에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야, 가서 마실 것 좀 사와. 딸기 우유나 포도 주스, 뭐 그런 거.”
“네, 형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