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그때, 쿠쿵- 하고 엘리베이터가 크게 흔들리며 한쪽 벽에 머리를 크게 부딪쳤다.
“흣, 아, 이게 무슨 일… 윽.”
세게 부딪힌 머리를 부여잡고 어딘가에서 본대로 급히 몸을 낮추었다. 엘리베이터의 손잡이에 반쯤 매달려서 비상벨을 누르기 위해 허리를 펴는데 엘리베이터가 또다시 쿵, 하고 큰 소리를 냈다.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곧장 아래로 추락할 것만 같았다. 설상가상, 큰 위험을 무릅쓰고 누른 비상벨은 고장 난 듯 아무런 반응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오늘 같은 날, 지나가다 나를 발견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학교에 수위 아저씨나 당직인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날 발견할 확률은 그리 높지 않았다.
왜 항상 나는 이렇게 사고만 치지.
불안한 감정에 날뛰는 가슴을 달래며 부푼 배를 감싸 안았다.
“무서워….”
호빵이를 위해 침착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왈칵 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몸을 작게 웅크린 채 119에 전화했는데 핸드폰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덜덜 떨면서 권태범에게도 전화했지만 마찬가지였다. 메시지는 보내질까? 그에게 다급한 문자를 보냈지만 전해지지 않은 메시지만 파란색 창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거기 누구 없어요? 여기 사람 있어요!”
최대한 조심하려 했지만 불가피하게 몸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엘리베이터가 끼익-하는 소리를 내며 내 가슴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흡, 어, 어떡해….”
차갑고 아무도 없는 학교에 갇히게 되었다.
***
최대한 배터리를 아끼기 위해 핸드폰 밝기를 최소화했다. 시간이 점점 흐를수록 좁은 엘리베에터가 몸을 옥죄는 것 같았다.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흘렀다. 엘리베이터 안에서의 시간은 밖에서보다 훨씬 더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분명 한 시간 남짓 지났을 뿐인데 마치 하루 동안 갇혀 있는 기분이었다.
한 칸이 채 채워지지 않는 신호는 아무리 손을 뻗어도 여전히 그대로였다. 팔도 너무 저리고 핸드폰에서는 배터리 사용량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알림이 떴다.
초조한 마음에 엘리베이터 손잡이를 잡고 까치발까지 했다. 작은 움직임에도 엘리베이터가 끼익 하는 소리를 냈다. 긴장으로 눈물이 쏟아지려는 찰나 마침내 신호가 잡혔다. 곧바로 권태범에게 전화하자 1초가 지나기도 전에 그가 받았다.
“태범 씨, 흐윽.”
-차유원, 너 어디야!
수화기 너머로 단단히 화가 난 권태범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가 서운하면서도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신호가 끊기기 전에 서둘러 입을 열었다.
-전화기는 왜 또 꺼놨-
“흣, 태범 씨, 저 하, 학교-”
끼익- 쿵.
“으아!”
엘리베이터 끈이 끊긴 것처럼 쿵, 하고 내부가 크게 흔들렸다. 심장이 바스러지듯 움찔거리며 눈앞이 아득해졌다. 너무 놀라 손잡이에 매달리느라 떨어뜨린 핸드폰이 저 멀리 나뒹굴었다.
-유원아? 차유원! 무슨 일이야!
다급한 권태범의 목소리가 엘리베이터를 울렸다. 누군가에게 무어라 소리치는 소리도 들렸다.
“태범 씨….”
-유원아, 지금 어디야.
“흐윽…. 저 학교에요, 근데 지금 엘리베이터가… 으흑, 무, 무서워….”
-학교? 학교엔 왜… 아니야, 지금 바로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아무 일 없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네에…. 흡, 근데 엘리베이터가 이상해요. 막 우, 움직이는데… 떨어질 거, 흐윽, 같아요….”
뚝.
상황을 전부 설명하지도 못했는데 전화가 끊겼다. 아예 먹통이 된 듯 핸드폰 화면은 빛을 모두 잃어버렸다. 작은 불빛마저 모두 사라져버린 엘리베이터 내부는 온통 암흑이 되었다.
앞이 보이지 않고 언제 추락할지 모르는 상황이 겁이 나기만 했다. 내가 숨을 쉬는 건지 아닌지도 모를 만큼 상황판단이 되질 않았다.
“호빵아, 흑, 호빵아….”
이 세상에 호빵이와 단둘이 남겨진 기분이었다. 하나 권태범이 나를 구하러 와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언제나 나를 구해주고, 지켜주던 사람이니까 이번에도 분명….
“아… 흑.”
그 순간 눈앞이 흔들려 손잡이를 꽉 쥔 손에 힘이 풀렸다. 새까만 허공에 조각나 흩어져 있던 기억이 하나둘씩 제자리를 찾아 내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으아…! 흡, 하지, 하지 마…! 그만… 흐아윽-”
뿌옇게 가려졌던 기억들이 선명하게 그림을 그리며 모든 기억이 겹겹이 쌓여갔다. 홍콩에서 엿봤던 기억들과 함께 기억도 나지 않는 아주 어렸을 적의 차유원, 아니 ‘내’ 기억들이 모두 떠오르기 시작했다.
“허으, 헉… 으윽….”
감당할 수 없는 기억들까지 전부 또렷하게 눈앞에 펼쳐지는 기분이었다. 손톱을 세워 바닥을 긁어내리며 그만하라 소리쳐도 돌아오는 기억을 막을 순 없었다. 숨을 헐떡이며 허공에 펼쳐진 환상을 피해 몸을 웅크렸을 때, 꽉 닫혀 있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권태범이 모습을 드러냈다.
“차유원!!”
“안 됩니다, 이러다가 다 위험해져요. 물러나세요!”
권태범을 말린 소방대원이 엘리베이터 문에 무언가를 끼워 넣어 고정했다.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 권태범은 몸을 말고 달달 떠는 나를 애타게 불렀다.
“유원아! 정신 차려, 조금만. 조금만 참아!”
“…….”
“유원아!”
도어 행거록에 지지대를 설치해 추락을 방지한 소방대원이 마침내 조심스레 엘리베이터에 탔다.
“차유원 씨, 괜찮으십니까? 정신은 드세요?”
소방관은 우선 내 의식을 살피고 나를 밖으로 빼냈다. 숨을 잘 쉬지 못하는 탓에 호흡기를 썼지만 다행히 다친 데는 없어 권태범이 직접 나를 안아 들고 움직였다.
땀에 젖은 손이 나를 조심히 어루만지는 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천천히 폐부 속으로 스며드는 그의 페로몬에 거칠게 뛰던 심장도 조금씩 안정되는 기분이었다.
“괜찮아, 유원아. 이제 다 괜찮아. 많이 무서웠지.”
“…….”
하지만 모든 기억을 되찾았다. 그와 나의 모든 과거를 떠올리게 되어버렸다. 그를 보자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아래로 흘렀다.
어떻게 이 사람을 잊을 수가 있었지. 어떻게 나 혼자 이 모든 걸 잊어버리고 편안히 살 수 있었지. 아직도 이 사람은 지옥 속에서 살고 있을 텐데 어떻게… 나 혼자….
시선을 내려 그의 목덜미에 선명하게 난 상처를 보자 심장이 저릿해졌다. 어떻게… 어떻게 내가 차유원이란 걸 잊어버린 거야. 왜 이렇게 끝까지 이기적인 거야, 차유원.
충격에 떨리는 내 눈빛을 다르게 받아들인 건지 권태범은 연신 내 손을 꽉 끌어안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유원아, 이제 집에 가자, 집에 가서 나랑-”
“…태범이… 형.”
“…….”
순간 권태범의 눈이 잘게 떨리며 내 손을 꽉 잡은 그의 손이 느슨해졌다. 믿고 싶지 않는다는 얼굴로 나를 보는 권태범의 눈동자가 길을 잃은 아이처럼 잘게 떨렸다. 그런 모습을 보자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나는 기운 없는 손으로 억지로 호흡기를 떼어내고 입을 열었다.
“왜 우리가… 같이 있어요?”
“…유원아.”
하지만 그의 눈빛은 언제 그랬냐는 듯 이내 단단해졌다. 나를 꽉 잡은 손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나를 놓을 수 없다는 듯이 매달리는 그의 시선은 아무것도 담지 않고 오직 나만을 향해 있었다.
그럴수록 나는 애가 끓는 심정으로 토로해야만 했다.
“우리, 흑. 우리 같이 있으면 안 되는 거잖아요. 흐윽… 왜, 왜 나를 다시 찾아왔어요?”
“…….”
“내가 형한테 어떻게 했는데… 흑, 나 때문에 형이…….”
툭-
말을 더 해야 하는데. 그의 품에 안겨 있을 게 아니라 당장이라도 떠나야 하는데 이미 지쳐버린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희미해지는 의식으로, 이다음 눈을 떴을 때 그가 내 곁에 없길 간절히 기도했다.
우리는 여전히 만나지 말아야 할 사이였다.
***
권태범을 처음 만난 건 아주 추운 겨울이었다. 그날은 유독 추운 날씨에 수도관이 얼까 아침 일찍부터 가게로 나갔었다. 날씨가 추워져서 그런지 요즘 들어 할머니의 건강이 많이 좋지 않았다.
새벽 늦게까지 기침을 콜록거리며 잠을 못 이루던 할머니는 내가 준비를 끝마칠 때까지 일어나지 못하셨다. 집을 나가기 전 할머니의 이부자리를 한 번 더 살핀 후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하아- 춥다.”
찬바람이 옷 안을 파고들며 뼛속까지 추위가 스며들었다. 찬기에 붉게 달아오른 피부가 따끔거렸다.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집에서 조금 떨어진 식당으로 바쁘게 걸음을 재촉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낡은 간판이 걸린 할머니의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꽁꽁 언 손으로 자물쇠를 열며 추위에 발을 동동 굴렀을 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큰 그림자가 내 머리 위로 불쑥 다가왔다. 설마 그 자식들인가 하는 생각에 두 손에 힘을 주었다.
탁-
“으아!”
어깨에 닿는 낯선 손길에 몸을 돌려 남자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그러나 남자는 놀란 기색 하나 없이 가볍게 내 주먹을 피했다. 담배를 물고 호기심에 찬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얼굴은 내가 생각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때서야 모르는 사람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너무 놀라 그 자리에서 우뚝 얼어붙어 입을 꾹 다물자 남자가 먼저 내게 말을 걸었다.
“괜찮아?”
고개를 살짝 숙이며 내 시선을 마주하는 남자에게서 옅은 향수 냄새가 느껴졌다.
“아, 네, 괜찮아요!”
“손주 한 명이 있다더니 그게 너인가.”
남자의 말에 고개를 작게 끄덕였더니 그는 ‘하나도 안 닮았네.’라고 혼잣말을 했다. 중얼거리는 입가에 작은 웃음이 스쳤다. 옅은 웃음기가 남아있는 입매를 멍하니 바라보다 그를 향해 물었다.
“손님이세요?”
“응.”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아직 영업 시작하려면 한참 멀었는데. 시간을 잘 못 알고 왔나?
“아직 영업 시작하려면 멀었는데… 이따 다시 오시겠어요?”
“밥 먹으러 온 건 아니고. 어제 여기에 두고 간 물건이 있어서.”
“물건이요?”
“문 좀 열어줄래, 꼬맹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