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모두가 권태범에게는 비밀로 하고 저택을 빠져나왔다. 어차피 원래 할머니와 살던 집까진 차를 타고 5분 정도라 눈 깜빡할 사이에 도착했다. 내가 문을 열려고 하니 조수석에 앉아있는 명훈 아저씨가 급히 차에서 내려 뒷문을 열어주었다.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민망해서 재빨리 건물로 들어갔다. 나도 모르게 손이 가는 대로 키패드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갔는데, 마치 누가 살고 있는 것처럼 집안이 잘 정돈되어있었다.
할머니는 제천에 계시는데 누가 왔다 갔나?
그러고 보니 그동안 이곳에 온 적이 없어서 신경을 쓰지 못했다. 먼지 한 톨 없는 식탁에 의아해하는데 아저씨가 답을 주었다.
“언제 오든 쉴 수 있게 항상 깨끗하게 관리하라고 지시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
역시 이렇게 세심한 구석까지 신경 쓸 사람은 권태범 밖에 없었다. 그가 하기 전에 내가 먼저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비상금은….”
“아, 그러게요? 분명 식탁 밑에 붙여뒀던 거 같은데, 어디로 옮겨놨지?”
일부러 식탁 밑을 더듬으며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기억이 안 나십니까?”
이상하게 순간 눈빛이 아련하게 바뀐 명훈 아저씨가 입술에 힘을 주며 물었다.
“네…. 방안에 옮겨놨었나 봐요. 금방 찾을게요, 죄송해요.”
“아닙니다, 천천히… 찾아보십시오.”
고개를 꾸벅 숙이며 사과하자 명훈 아저씨가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시간을 확인하는 눈빛이 초조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럼 혹시 같이 찾아주실래요? 노란색 봉투 안에 넣어놨었는데.”
“아, 네. 도와드리겠습니다.”
명훈 아저씨는 적극적으로 소매를 걷어붙이고 비상금을 찾기 시작했다. 나는 슬쩍 몸을 돌려 손수건에 미리 준비한 마취제를 뿌렸다.
‘아저씨, 정말 죄송해요. 정말 이 빚은 나중에 꼭 갚을게요.’
“아저씨.”
일부러 조용히 다가가 열심히 봉투를 찾는 아저씨의 등 뒤로 다가가 그를 불렀다. 그리고 명훈 아저씨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의 코에 손수건을 갖다 댔다.
“이게 무-”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아저씨가 손을 들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10초가 채 지나지 않아 아저씨가 털썩 쓰러졌다.
“아저씨, 죄송해요….”
명훈 아저씨의 목 뒤에 베개를 받쳤다. 잠이라도 편히 자야되니까…. 에어컨을 틀고 너무 춥지 않게 맞춰놓은 뒤 아저씨를 향해 사과했다.
“제가 금방 다녀와서 깨워드릴게요, 푹… 주무시고 계세요.”
다크 서클을 보면 아저씨도 수면이 필요할 것이다. 합리화를 마친 뒤 서둘러 집을 빠져나왔다. 집에 있던 큰 후드티를 걸치고 모자를 푹 눌러 쓴 뒤 택시에 올랐다. 긴장 때문에 숨이 조금 거칠어졌다.
“어디로 가드릴까요?”
“운언 사거리에 있는 최경일 복싱장으로 가주세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권태범의 집에서 가져온 사진을 바라보았다. 권태범과 차유원이 함께 사진을 찍은 이곳에 가면 무언가 생각나는 게 있을 것 같았다.
예전 차유원의 일기장에서 그가 복싱을 배웠다는 내용을 읽었던 적이 있다. 그렇다면 그때 나왔던 형이란 사람이 권태범인지 알아야만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무작정 사진 속의 복싱장을 찾아갔다.
“도착했습니다.”
학교와 집 중간에 있는 곳이라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택시에서 내리자 후덥지근한 날씨가 나를 반겼다.
조금이나마 서늘한 건물로 들어가 3층에 있는 복싱장으로 향했다. 오래되어 보이는 안내판을 보아도, 차유원이 몇 번을 오르내렸을 계단을 지나쳐도 기억나는 게 없었다.
3층 복싱장 문 앞에 도착해 손잡이를 몇 번 흔들어 보았다. 아직 열지 않은 건지, 혹은 영업을 하지 않는 건지, 문이 단단히 잠겨 있었다.
그래, 무슨 기억을 이렇게 쉽게 찾겠어. 차라리 학교에나 가볼 걸, 하고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고작 3층을 올라왔는데 이미 지쳤다. 난간에 기대 조금 기다리다가 이내 포기하고 몸을 돌렸다.
“하….”
하루라도 사고를 안 치면 내가 아니었다. 혹시라도 넘어지지 않게 난간을 꼭 잡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1층까지 거의 다 내려왔을 때, 건물 입구 문이 열리고 누군가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어.’ 하는 소리와 함께 계단을 오르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나보다 조금 나이가 많은 남자였다. 대수롭지 않게 그를 지나치려 했을 때, 갑자기 그가 나를 불렀다.
“혹시 유원이? 차유원?”
“…저를 아세요?”
차유원을 아는 사람이 나타났다.
***
“그동안 잘 지냈고? 오메가로 발현됐다는 소리는 나중에 전해 듣긴 했는데.”
“아, 네….”
“여전히 말수는 적네. 우리가 마지막으로 본 게 한… 4년 전이었나?”
4년이면 차유원이 아직 고등학생일 때였다. 내가 차유원의 몸에 빙의하기 훨씬 전인데…. 그때의 차유원과 친분이 있다면, 기억을 찾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사실은 제가 기억이 없어서요…. 이 사진이 있길래 찾아온 건데. 혹시 자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을 억누르며 복싱장 관장이라는 아저씨에게 권태범의 방에 있던 사진 한 장을 건넸다.
“아…. 그래 그땐 그랬지. 네가 참 권태범, 이 자식을 많이 좋아했었는데 말이야.”
“제가…요?”
“아, 지금 아이 아빠한테는 실례이려나?”
관장님은 배가 부른 내 배를 힐끔 보더니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 아이의 아빠가 권태범이라는 사실은 꿈도 꾸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매일 학교 다녀오면 권태범 그놈한테 ‘형-형-’거리면서 졸졸 쫓아다니고 눈을 반짝이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어. 다 알았지.”
역시, 그렇다면 권태범도 차유원의 마음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럼 대체 왜… 나를 모르는 척했던 거지? 왜 지금까지 나를 속이는… 거야.
“권태범 그 자식도 원래 남한테 살갑게 구는 성격은 아니었는데, 너는 동생 같다고 참 잘해줬었어. 둘이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의 방향은 달랐겠지만.”
관장님은 다 추억이라는 듯 회상하다가, 내게 조심스레 물었다.
“그때 일은 다 괜찮아진 거지?”
“네?”
“납치 당했었다며.”
“제가…요?”
처음 들어보는 소리였다. 납치라고? 차유원이?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은 얘기였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간헐적으로 머릿속을 파고드는 이상한 기억 속에서 차유원은 좁고 축축한 어딘가에 갇혀있었던 것도 같았다. 내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관장님을 올려보자 그는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다 알고 온 거 아니었어? 아, 참. 기억이 없다고 했지? 내가 실수한 거 아닌가 모르겠네.”
“아, 아니에요. 알려주세요, 전부 알고 싶어요.”
“그냥 나도 건너서 들었던 거라…. 무슨 학교 친구가 그랬다던데. 가족 중에서 누가 말해준 적 없어?”
“네….”
차유원의 가족이라곤 연세가 지긋한 할머니밖에 없었다. 차유원이 납치까지 당한 거라면 당시 할머니의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 쉽게 짐작이 가지 않았다. 차마 그때의 일을 할머니께 여쭤볼 볼 자신이 없었다. 할머니를 떠올린 내가 뭐라고 되묻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자 곰곰이 생각하던 관장님이 말했다.
“아니면 학교에 가보는 건 어때? 예전에 한번 학교 옥상에 자주 간다고 했었는데. 거기 가면 생각나는 게 조금 있을지도 모르잖아.”
학교? 그래, 생각해보면 거기를 제일 먼저 갔어야 했는데 자꾸 그 근처만 뱅뱅 돌고 있었다.
“네, 지금 가봐야겠어요. 감사합니다, 관장님.”
“오랜만에 얼굴 보니까 반갑고 좋았어. 애기 잘 낳고, 기억 꼭 찾길 바란다. 유원아.”
“네.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거듭 감사를 표하고 복싱장을 나왔다. 아직 다행히 아무한테서 연락이 없는 것을 보면 내가 도망쳤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까지는 버스로 한, 두 정거장이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야에 큰 건물이 보였다.
“아신 고등학교….”
차유원이 매일 눈물을 흘리며 다닌 학교가 이곳이었다. 해가 지날수록 점점 심해지는 괴롭힘을 버텼지만 오메가로 발현하면서 결국 자퇴를 했었지.
보통 이 세계에서 알파, 오메가는 고등학교에 올라오기 전 발현했다. 가끔 고등학교 1학년 즈음 발현하는 경우도 있지만 차유원처럼 고 3, 그것도 성인이 다 되었을 때쯤 발현하는 일은 드물었다.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학업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다가, 오메가로 발현하는 바람에 모든 걸 포기해야 했던 차유원. 나는 그에 대해 생각하며 학교로 들어갔다.
“일단 옥상부터 가야겠다.”
외부인을 통제할 줄 알았는데 학교에 아무도 없어서 옥상으로 가기 수월했다. 복도에 붙어있는 학사 일정표에는 오늘 날짜로 현장 체험 학습이 쓰여 있었다.
“그래서 조용했구나. 그나저나 오늘 운동 제대로 하네.”
매일같이 권태범의 품에 안겨서 팔랑팔랑 돌아다니기만 할 줄 알았지, 이렇게 돌아다닌 건 너무 오랜만이었다. 아까 복싱장에 가느라 오르락내리락 한데다 여기까지 걸어와서 그런지 벌써부터 허벅지가 달달 떨려왔다.
“이래서 나중에 호빵이랑 같이 뛰어다닐 수나 있나 모르겠네.”
원래부터도 몸이 약한 차유원이었다. 아무리 운동해도 근육이 붙기는커녕 말랑말랑한 몸은 이전 삶에선 경험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엘리베이터에 타 옥상으로 향하려는데 발끝에 무언가 걸렸다. 노란색 바탕에 까만색 글자로 적힌 명찰이었다. 누가 떨어뜨렸나 보았다.
‘…잠깐만… 원래 내 이름은 뭐…였지?’
원래의 기억을 떠올리려 하니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없었다. 예전에는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어떻게 생겼는지 생생하게 떠올랐었는데 지금은 누가 일부러 내 기억을 삭제한 것처럼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다 차유원의 몸에 빙의한 이후로 단 한 번도 내 이름을 불러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나는… 대체 누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