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익숙한 그 얼굴은 다름 아닌 차유원이었다. 차유원은 권태범의 옆에 서서 그를 올려다보며 활짝 웃고 있었다. 갑자기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며 다리에 힘이 풀렸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권태범이랑… 차유원이 알던 사이라고…? 그럼 대체 왜….’
대체 왜, 지금까지 모르는 척을 한 거야?
권태범은 한 번도 내게 과거의 얘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나와, 아니… 차유원과 아는 사이였다면 한 번쯤 얘기를 꺼내 볼 법도 한데 그는 단연코 한 번도….
“아… 머리, 흣.”
두통과 함께 내가 경험하지 못한 기억이 머리를 헤집으며 떠올랐다. 억지로 남의 기억을 쑤셔 넣는 것 같아 침대에 기대 급히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 발소리가 들려 손에 들린 사진을 급히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유원아!”
그 행동에 모든 기력을 다 쏟아 부은 듯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내가 덜덜 떨며 비정상적인 호흡을 내뱉고 있자 권태범이 다가왔다.
“아파… 흣, 머리, 흐아… 아파….”
그를 보자 차유원과 함께 찍은 사진이 떠올라 또다시 머릿속이 여러 갈래로 조각나듯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느껴졌다. 앞이 보이지 않고 나를 만지는 손길이 누군지 알 수도 없었다. 그저 숨이 쉬어지지 않아 꺽꺽대며 몸을 비틀었다.
“차유원…! 시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벌벌 떠는 나를 권태범이 급히 침대에 눕혔다. 그대로 입가에 숨을 불어넣고 손발을 주물러주어 당장이라도 숨이 멎을 것 같은 아득함은 조금이나마 물러갔다. 희미한 의식으로 그가 부산스럽게 나를 만지는 것이 느껴졌다.
‘태범 씨. 차유원과 아는 사이였어요…?’
“유원아.”
가늘게 뜬 눈꺼풀 사이로 기어이 물줄기가 흘러나왔다. 당황해서 나를 부르는 권태범을 힘없이 바라보며 물을 수 없는 말을 속으로 전했다.
‘차유원이 좋아하는 형이란 사람이… 태범 씨였어요? 그때의 차유원의 기억 속에 있던 남자가 태범 씨였어요?’
“난데, 최 박사 가현동 본가로 데려와. 지금 당장.”
점점 떨림이 심해지는 내 손을 주무르는 그의 얼굴이 걱정으로 물들었다. 권태범의 두 눈에 비친 차유원의 모습에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인지, 아니면 차유원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거죠?’
이곳에 남아 그의 곁에 있기로 결심하고, 그들의 가족이 되기로 결심한 나의 선택이 모두 산산조각 나는 기분이었다. ‘내’가 아닌 ‘차유원’을 사랑했던 거라면 내가 진짜 차유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의 반응이 겁이 났다.
모든 것을 회피하듯, 나를 부르는 그의 외침을 외면하며 아득해지는 의식에 몸을 맡겼다. 눈을 뜨고 일어났을 때, 모든 게 전부 꿈이길 바랄 뿐이었다.
***
유원에겐 아버지께 비밀로 하겠다고 했지만 화룡과 연관된 일이라 비밀로 할 순 없었다. 때문에 그와 관련된 일로 아버지의 부름을 받아 1층으로 내려간 사이 유원이 쓰러져 있었다.
태범은 호흡 곤란으로 헐떡이는 유원을 침대에 눕히고 윤설아가 일러주었던 대로 침착하게 그를 살폈다.
유원의 정신은 얼기설기 엮어 놓은 실처럼 위험한 상황이라고 했다. 그날 일로 사람에 대한 불신도 짙어졌고, 자아정체성도 없는 상태라고. 때문에 의사와의 라포가 없는 상태에서 치료를 받는 것보다 유원이 가장 신뢰하고 믿을 수 있는 자신이 도와주는 게 더 낫다는 결론이 나왔다.
“하아….”
태범은 정신을 잃고서야 간신히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온 유원의 손끝을 바라보았다. 쓰러지면서 바닥을 긁은 것인지, 손끝에는 피가 맺혔고 반창고를 붙여 놓았던 손바닥도 엉망이 되어있었다.
“이건 내가 하겠습니다.”
어느새 다가온 최 박사에게서 구급상자를 건네받았다. 최 박사는 유원에게 수액만 놔 주고 자리를 떴고, 태범은 익숙하게 유원의 손을 치료했다.
새근새근 잠이 든 유원은 근심이라곤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 어떡해요…?’
‘저는 이제 어떡하면 좋아요…?’
눈이 오던 날, 울먹이는 그 작은 얼굴을 뒤로하고 돌아오던 지난날의 유원이 떠올랐다. 충격에 휩싸인 얼굴로 옷자락을 쥐며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숨을 몰아쉬던 앳된 얼굴이 태범의 심장을 뿌리째 뽑아냈다.
그때는 단순히 유원을 자신에게서 떨어뜨려 놓아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었다. 자신의 곁에 있는 것이 그에게 얼마나 큰 위험이 되는지 알았기 때문에, 햇살처럼 밝게 빛나는 유원의 인생에 자신 같은 그림자를 두기 싫었다.
‘기억상실증입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트라우마와 방어기제로 인한 회피성 기억상실증입니다. 기억이 돌아올 수도 있지만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고, 돌아온다고 해도 언제일지 알 수 없습니다. 환자 본인의 의지가 중요합니다.’
그 일을 겪고 유원은 결국 태범을 지워버렸다.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고, 우리의 추억을 기억하지 못하는 유원의 모습을 마주했을 때의 상실감은 아무도 공감하지 못하는 영역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유원을 자신에게서 떠나보낼 수 있겠다는 희망이 피어났다.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유원에게서 모습을 감추고 그의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게 유원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유원의 앞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그의 세상에서 사라져 유원의 그림자 속에 숨어 그를 지켜보았다. 비겁했지만 그것이 사랑하는 유원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아이고, 아가! 유원아!’
축 늘어진 몸으로 구급차에 실려 가는 유원을 보기 직전까진 그랬다.
‘기억이 돌아왔다고 합니다.’
무조건적으로 유원을 외면한 자신의 잘못이었다. 유원이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을 모두 제거하고 해외로 출장을 다녀온 사이 유원의 기억이 돌아올 줄은 정말 몰랐다.
뒤늦게 확인한 핸드폰 화면에 유원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를 확인했을 때 심장이 저 아래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곧바로 유원의 집으로 향했지만…. 그땐 이미 늦은 뒤였다.
[급성약물중독]
그것이 유원에게 내려진 진단명이었다. 종이 쪼가리에 불과한 것이 자신에게 형벌을 내리는 것만 같았다. 결국 자신이 유원을 그렇게 만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때, 축 늘어졌던 유원의 손끝이 자꾸만 지금의 유원의 손끝과 교차되며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태범 씨.”
“…….”
“태범 씨?”
유원의 연갈색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태범은 침대에 앉아 자신을 부르는 유원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모든 게 꿈인 것처럼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유원의 모습이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 같았다.
“태범 씨!”
“아….”
“왜 그렇게 멍하니 서 있어요. 저 많이 부었어요?”
제 얼굴을 문지르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유원을 보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아니, 예뻐.”
그래. 차유원은 자신의 옆에 있다. 과거가 어떻든, 우리의 지난날을 유원이 기억을 하지 못하든 말든, 유원이 자신의 옆에 있으면 됐다. 그거 하나로 충분했다.
“원래부터 안 예쁜 곳이 없었어.”
자신의 말에 두 뺨을 붉히며 사랑스럽게 웃는 유원의 입술에 태범은 간절하게 입을 맞추었다.
***
“아저씨, 태범 씨 오늘 몇 시 정도에 오신대요?”
오늘은 권태범이 오랜만에 회사에 갔다. 무슨 임원진 회의가 있다고 들었는데 눈을 떠보니 권태범은 이미 집에서 출발한 후였다.
“저녁 드시기 전에 최대한 맞춰서 오겠다고 하셨습니다.”
“네. 알겠어요. 아, 큰일 났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평소에 내 곁에서 한 발자국도 떨어져 있으려 하지 않는 권태범이 회사에 가 있을 때가 적기였다. 기억을 찾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차유원의 과거를 뒤쫓아야 했다.
그래서 잠시라도 혼자 있을 틈을 내려고 연기를 시작했는데…. 어색한 내 연기에도 명훈 아저씨는 속은 모양이었다. 최대한 곤란한 얼굴을 하며 뜸을 들이자 아저씨가 발뒤꿈치를 들썩거리며 내 대답을 기다렸다.
“그게요…. 집에 비상금을 두고 와서요.”
물론 그 비상금의 실제 존재 여부는 나조차 모르는 것이다. 진짜 차유원이 비상금 같은 걸 만든 거였으면 있는 거고, 아니면 없는 것이었다.
“태범 씨 생일 선물을 아직도 못 해줘서요.”
“아….”
“명색이 생일 선물인데 태범 씨 카드나, 아버님 카드를 쓸 수도 없고.”
이번엔 명훈 아저씨가 곤란한 얼굴로 입술을 잘근거리며 땀에 젖은 손바닥을 바지에 쓱쓱 문질렀다. 조금만 더 하면 넘어올 거 같기도 한데….
“그… 넥타이핀을 선물하는 게 청혼하는… 그런 의미라고 들었어요.”
수줍은 얼굴로 손끝을 조몰락거리자 아저씨의 눈이 멍하니 내 손을 향해있었다.
“바로 코앞인데 잠깐만 다녀오면 안 돼요?”
그때 그렇게 쓰러지고 난 뒤에 권태범은 내 곁에서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잠깐 처리할 서류가 있으면 나를 데리고 서재로 향했고, 불가피한 일이 있으면 그 대신 다른 아저씨들을 꼭 내 곁에 뒀다. 아니나 다를까, 명훈 아저씨도 난감해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 형님께서 절대 밖에 나가지 말라고…. 죄송합니다.”
“그럼 저 청혼 못 해요…?”
“…….”
“태범 씨한테 고백 못 해요…?”
내 말에 잠시 고민하던 명훈 아저씨가 한숨을 쉬더니 결국 백기를 들었다.
“딱 5분만입니다.”
“네, 어차피 돈만 가져오면 되는데요, 뭐.”
태연하게 눈을 깜빡이며 주머니에 넣어둔 통을 꽉 쥐었다.
‘아저씨, 미안해요.’
매번 아저씨들을 속이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속으로 아저씨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속죄의 마음으로 사과를 했다. 아저씨들에겐 너무 죄송하지만 권태범과의 관계를 더 발전시키려면 이 엉망진창인 기억을 되찾아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