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89)화 (89/136)

#89

“와… 근데 여기 아버님 혼자 사시는 거예요?”

“응.”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다고 대답하는 말에 입꼬리가 아래로 늘어졌다. 혼자 외로이 있을 아버님의 모습이 떠오른 탓이다. 외로우시겠다….

저번에 우연히 권태범의 어머님께서 15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들었는데 그럼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혼자 이 집에서 쓸쓸하게 사신 거였다. 갑자기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앞으로는 더 자주 찾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님이 활짝 미소 지은 얼굴로 나를 반겼다. 홍콩에서의 일은 아버님께 비밀로 하자고 했었다. 괜히 이미 끝난 일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아버님이 또 쓰러지실까 봐 걱정되기도 했고. 어쨌든 환히 웃는 아버님의 얼굴을 보니 옳은 결정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가! 우리 유원이!”

“아버님, 안녕하셨어요?”

밝은 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모습이 더 젊어 보여서 보기 좋았다. 나중에 태범 씨도 이렇게 입히고, 호빵이도 이렇게 입혀서 같이 나들이 가야지.

“오느라 많이 힘들었지? 이제 산달도 얼마 안 남았는데 몸은 좀 괜찮으냐?”

보통 5개월이 지나고서부터 성장 속도가 급격하게 빨라지는 탓에 내 배는 하루하루 커지고 있었다. 아버님을 뵌 게 한 달도 넘었으니 그때보다 배가 훨씬 많이 부풀었다.

“괜찮아요. 태범 씨가 잘 챙겨줘서 힘든 것도 없고요.”

권태범과 아버님이 양옆으로 나를 부축한다고 성화였다. 아직 출산 예정일이 8주나 남았는데, 누가 보면 내일 바로 출산을 앞둔 줄 알겠다.

안으로 들어가니 본가 바닥은 전부 푹신한 매트가 깔려 있었다. 집안 분위기와 영 어울리지 않는 매트였다.

“뭡니까? 벌써 무릎 아프세요?”

권태범이 퉁명스러운 얼굴로 아버님의 무릎을 힐끗 내려 보며 물었다.

“이놈의 자식은, 아주…! 크흠, 아니 그 임산부들 무릎에 딱딱한 바닥이 안 좋다고 해서 이번 기회에 싹 갈았다.”

“네? 저 때문에요?”

나도 내색은 안 했지만 권태범처럼 아버님의 무릎 상태가 많이 안 좋아지셨나? 하는 걱정을 했었다. 근데 나 때문에 이 넓은 집 전체를 바꾸셨다니… 놀라서 입을 떡 벌리고 아버님을 바라보았다.

“나중에 호빵이도 안 다치고 놀려면 미리미리 하는 게 좋지, 뭐.”

“아니 아버님! 그래도, 저희가 몇 번이나 온다고요….”

나와 우리 호빵이를 위해서 이런 것까지 신경 써 주셨다는 사실이 감동적이었다. 하지만 정말 가현동에 몇 번이나 온다고 이 큰 집을 이렇게 바꾸셨… 설마 2층도 바꾸신 건 아니겠지?

“아가, 2층도 올라가서 구경해 보렴. 일단 내 맘대로 꾸며 놓긴 했는데 마음에 안 들면 최 비서한테 말해서 네가 원하는 걸로 바꿔도 된다.”

“뭘 애 힘들게 올라가라고 하세요.”

권태범이 내 손목을 잡아 끌고 소파에 앉혔다. 그러자 아버님이 아차 싶었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당장 내일 엘리베이터 설치를-”

“할래요!”

“응?”

“2층 구, 구경하고 싶어요, 아버님!”

에, 엘리베이터 설치라니. 당황해서 아버님을 만류하고 권태범을 보자 그가 아무 말 없이 나를 안아 들었다.

나를 안고도 호흡 한 번 흐트러지지 않은 채 2층 계단을 모두 오른 권태범이 아버님을 바라보았다. 내려 달라고 팔을 흔든 찰나, 아버님이 먼저 앞장서서 한쪽 방문을 열었다.

“헉…. 아, 아버님?”

방을 본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권태범이 꾸며 놓은 호빵이의 방과 아주 비슷한 풍경이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크기는 이 방이 조금 더 컸다.

“어때, 마음에 드느냐?”

어쩐지 저번에 운언동에 방문했을 때 호빵이의 방을 유심히 보시더니 언제 이렇게….

“아직 애가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언제 쓴다고 이런 것까지 사셨어요?”

“크흠. 왜, 미리 사두면 좋지.”

방 한편에는 5살 정도의 아이가 탈법한 네발 달린 자전거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안장 끝에 상표가 달려있었지만 보고 싶지 않았다. 분명 내가 생각한 것보다 ‘0’이 하나, 아니… 두 개는 더 붙어있을지도 몰랐다.

방을 둘러보던 권태범의 표정이 점점 안 좋아졌다. 이, 이 사람은 왜 또 저래…. 설마 아버님한테 졌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무슨 다 큰 어른들이 이런 걸로 승부를-

“하하, 이번엔 내가 이겼구나.”

“하.”

권태범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겨우 이런 걸로 싸우는 거야? 내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권태범이 서늘한 웃음을 지은 채 말했다.

“호빵이가 클 때까지 저 자전거가 멀쩡할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설마.”

당장이라도 저 자전거를 버리기라도 할 기세에 아버님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한쪽 눈썹을 치켜든 권태범은 나를 잡아 이끌었다.

“집에 가,”

“유원아, 옆방에 네 공부방을 하나 만들었는데 구경하지 않으련?”

“어, 네 좋아-”

“딸기 케이크 먹으러 가자.”

아버님의 제안이 못마땅한지, 권태범이 끼어들었다. 하…. 미치겠다. 권태범, 이 남자. 이제 날 딸기 케이크로 꼬신다.

‘날 얼마나 어린애로 보는 거야?’

이제 산달도 다가오고 당 수치도 꽤 안정되어 디저트 금지령에서 벗어나긴 했다만 그걸 바로 이용해서 날 꼬시려는 행동에 헛웃음이 나왔다. 괘씸해서 일부러 아버님께 말했다.

“아버님, 제 방 보여주세요!”

흥, 콧방귀를 뀌고 아버님을 따라가자 권태범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급히 내 뒤를 쫓았다.

아버님이 준비해주신 방은 무척 세련되고 아늑해서 공부가 잘될 것 같았다. 권태범은 여기저기 둘러보며 감탄하는 나를 불안에 찬 눈으로 지켜보았다.

쌤통이다. 일부러 더 큰 리액션을 하며 나를 위해 수고하신 아버님을 향해 두 엄지손가락을 높이 치켜세웠다.

***

“헤… 잘 먹겠습니다.”

아까는 권태범이 얄미워서 거절했지만, 정원에서 책을 읽다 보니 딸기 케이크가 생각났다. 결국 권태범이 직접 H호텔 라운지까지 가서 딸기 케이크를 포장해왔다.

큼직한 딸기 케이크 조각이 담긴 접시를 받아 들고, 노란색 꽃이 달린 포크로 딸기를 콕 찍었다. 딸기 케이크를 한가득 입에 넣자 새콤달콤한 딸기의 풍미가 확 느껴졌다.

딸기를 보니 예전의 권태범이 생각났다. 할머니 집에 처음 인사 왔을 때 딸기 씨를 발라버리겠다며 아작을 냈던 모습 말이다.

“푸핫- 큽… 크흐…!”

케이크를 먹다 말고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한쪽 손에 들린 서류를 내려놓은 권태범이 눈매를 부드럽게 휘어 웃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

“풋, 아, 그게 말이죠…. 푸흣-”

아, 더 이상 안 되겠다. 권태범의 얼굴을 보자 웃음이 멈춰지지 않았다. 그에게서 고개를 돌려 심호흡까지 해서 웃음을 진정시켰다.

“하아… 이제 됐다.”

얼마 만에 이렇게 배를 부여잡고 웃은 것인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는데 아직도 광대가 얼얼하게 아팠다.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그에게 입을 열었다.

“예전에 태범 씨가 우리 집 와서 딸기 씨를 다 빼버렸었잖아요. 주먹만 한 딸기가 엄지 크기가 되어서 제가 얼마나 놀랐게요.”

딸기뿐 아니라 수박도 구멍이 숭숭 난 게 무슨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치즈 같았다. 쪽집게로 뺀 것도 아니고 칼로 어떻게 그렇게 작은 씨를 골라낼 수 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웃겼다.

“그땐 입덧이 아니라 체한 줄 알고 그랬지. 원래 딸기 씨가 소화가 안 된다고 하잖아.”

“…정말 그래서 그랬던 거였어요? 그럼 태범 씨는 그때부터 저 좋아한 거였네요?”

“그래.”

장난기 넘치는 말투로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에 그의 대답은 진지했다. 오히려 내가 부끄러워져 두 뺨을 식혀야 했다.

‘무슨 농담을 못 해….’

지잉-

“급한 전화예요?”

계속 울리는 전화기에 권태범이 별거 아니라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힐끔 본 화면에는 [회장님]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찍혀져 있었다.

“헉. 아버님이 찾으시는 거 아니에요? 얼른 내려가 보세요.”

“하아….”

“어서요.”

그의 등을 떠밀자 그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권태범은 살짝 허리를 숙여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금방 다녀올게.”

“네, 다녀오세요.”

잠깐 다녀오는 건데도 왜 이렇게 그와 떨어지기 싫은 건지. 권태범의 뒷모습을 쫓아 꽉 닫힌 문을 응시했다.

“하아…. 그래, 이제 찾아야지.”

권태범과 있을 때 자연스럽게 지어졌던 미소가, 그가 자리를 비우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접시를 내려놓고 발걸음을 옮겨 그의 방으로 들어왔다.

권태범이 어렸을 때 썼던 방이어서 그런지 학창시절에 받았던 상장이나 교복이 방에 놓여있었다. 어머님이 살아계셨을 적, 그가 어릴 때 사용하던 물건을 버리지 못하게 했다더니 어린 시절 권태범의 손길이 묻은 장난감도 곳곳에 있었다.

이렇게 보면 마치 호빵이의 방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귀여웠다. 그러다 문뜩 한쪽에 걸려있는 검은색 글로브가 눈에 들어왔다. 끝이 헤질 정도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글로브였다. 그 옆으로는 액자가 하나 놓여있었다.

“응? 근데 왜 한쪽이 접혀 있지?”

일부러 그렇게 한 듯 반듯하게 접혀 있는 사진을 보며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접힌 끝을 천천히 펼치자 익숙한 얼굴의 누군가가 그에 옆에 서서 활짝 웃고 있었다.

“…차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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