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88)화 (88/136)

#88

행복하면 행복할수록 남의 인생을 훔쳐 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원래 차유원에게 이 모든 것을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과 조금만 더 여기서 차유원으로서 사랑받고 싶다는 생각이 내 안에서 충돌하는 느낌이었다.

“‘여기’라는 말은 이 집을 말하는 거예요, 아니면 다른 무언가?”

허를 찌르고 들어오는 질문에 입을 꾹 다물었다. 이건 얘기할 수 없었다. 윤설아의 시선을 피해 한참을 생각하다 겨우 대답했다.

“그, 그냥 이런 얘기는 이제 그만하고 싶어요…. 죄송해요.”

일부러 부산스럽게 문제집을 넘겼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아 눈에 힘을 주었다. 모든 사실이 전부 수면 위로 올라와 권태범에게 들킬 것 같았다. 모든 것을 돌려놔야 하는데, 그러면 앞으로 권태범과 호빵이를 보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용기가 나지 않았다. 동시에 이렇게 이기적인 나도 싫고 모두에게 미안해서 죽을 것 같았다.

나를 가만히 지켜보던 윤설아가 아쉽다는 얼굴을 하고 고개를 끄떡였다.

“그래요…. 유원 씨가 얘기해주고 싶을 때. 그때 다시 얘기해줘요, 그럼.”

수업이 시작되었지만, 집중이 되지 않았다. 아까부터 심장이 터질 듯이 쿵쾅거려 이 소리가 그녀에게 들릴까 초조해졌다. 불안하게 뛰는 심장이, 모든 감각이, 앞으로의 이 평화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전해주는 것 같았다.

나와 권태범의 끝은 어디인지. 이 세계가 앞으로 어떻게 흘러가는 건지. 진짜 차유원은 어디로 간 건지. 모든 게 다 혼란스럽기만 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에 혼자 떨어진 기분이었다.

***

“오늘 잘 했어?”

“네….”

수업이 끝나자마자 권태범이 안으로 들어왔다. 조심스럽게 내 얼굴을 살피는 그의 손길에 울컥하고 눈물이 터져 나왔다.

참 다정한 사람이다. 처음에 그를 무서워한 일이 후회될 만큼 권태범은 참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에 죄책감이 나를 덮쳐왔다.

권태범은 소리 내지 않으려 입술을 깨물고 흐느끼는 나를 조용히 안아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래, 유원아. 하지 않아도 돼. 그만해도 돼, 이제.”

그런 게 아니다. 권태범이 오해하는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사람을 만나는 게 힘들고 무서운 것보다 그를 속이고 모두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힘들었다.

‘저는 사실 차유원이 아니에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을 속으로 내뱉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그의 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다. 그 누구보다도 빛나고 행복한 인생을 살아야 할 권태범이 나 때문에 빛을 잃은 기분이었다.

“내가 항상 옆에 있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유원아.”

“흐… 흡, 끄윽, 흐….”

“미안해. 내가 다 미안해, 유원아.”

내 눈가를 닦아주는 권태범의 손길이 애틋했다. 죄책감에 물든 눈을 마주하자 가슴이 울컥했다.

‘그런 게 아니에요, 태범 씨…. 내가, 내가 문제예요.’

내 뺨을 어루만지는 그의 한쪽 손을 꽉 잡았다. 눈을 감고 호흡을 정리하자 머리가 차분히 가라앉았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선명하게 머릿속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를 위해서라도, 호빵이와 나를 위해서라도 알아야 했다. 차유원의 과거가 무엇인지. 차유원과 권태범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내가 왜 이 소설에 빙의 하게 되었는지 말이다.

***

“태범 씨, 일어나세요!”

가만히 잠이 든 권태범의 눈을 억지로 벌려 그를 깨웠다. 깜짝 놀라 평소보다 커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표정에 그에게 물었다.

“많이 놀랐어요?”

“유원아?”

“에고. 손톱자국 났다.”

너무 힘을 줘서 권태범의 눈 아래로 작은 반달 모양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미안한 마음에 자국을 문지르며 호-하고 입김을 불어주었다.

“걱정 마세요, 이제 사라졌어요!”

그런데 너무 문지르다 보니 한쪽 눈 밑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그에게 쪽, 입을 맞추었다.

“그럼 얼른 준비하고 나오세요!”

아직도 멍한 얼굴로 나를 올려보는 얼굴이 귀여웠다. 베개에 눌려 살짝 삐져나온 머리카락도 엄청 귀엽고.

나의 재촉에 욕실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을 몰래 사진으로 남기고 후다닥 침실을 빠져나왔다. 권태범이 씻는 동안 생일상을 차리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 권태범 몰래 준비한 깜짝 서프라이즈가 남아있었다.

“유원 님, 여기요.”

“아, 감사해요!”

주방장 아저씨가 건네는 마스크를 받아 들었다. 사실 이제 입덧은 끝나서 음식 냄새를 맡아도 구역질은 나지 않았지만 준비해준 성의를 봐서 마스크 썼다.

“이제 뭐 하면 돼요?”

“이 위에 하고 싶은 말을 적으시면 됩니다.”

“네, 한번 해 볼게요.”

아저씨가 건넨 초코펜을 잡고 심혈을 기울여 한 글자 한 글자를 적어 나갔다. 팔이 부들부들 떨리고 힘 조절에 실패해 글자가 아주 엉망이었지만 그래도 읽을 수는 있을 거 같았다. 아저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뒷정리는 제가 하겠습니다, 유원 님은 가서 쉬세요.”

“정말 그래도 돼요?”

“그럼요. 자, 어서.”

아저씨의 등 떠미는 손길에 못 이기는 척 테이블에 앉았다. 이제 누가 봐도 임산부구나 알 수 있을 만큼 배가 불렀다. 쌍둥이도 아닌데 이렇게 배가 클 수 있나 신기했다. 의사 선생님의 말로는 원래 남성체 오메가의 아이들은 20주 차부터 급격한 성장 속도를 보인다고 하더니 정말인가 보았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호빵이가 기특하면서도 조금만 서 있어도 다리랑 허리가 아파서 힘들긴 했다. 허리를 통통 두드리는데 권태범이 내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

“네, 여기 있습니다!”

마무리로 슈가 파우더까지 뿌리고 식탁 한가운데에 케이크를 올려 두자 꽤 그럴싸했다.

그동안 경황이 없고 그날의 충격으로 권태범의 생일을 그냥 그렇게 지나간 게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늦게나마 이렇게라도 챙겨주고 싶어 주방장 아저씨에게 부탁을 한 거였다.

머리 위를 더듬어 고깔모자를 잘 썼는지 확인하고 식탁에 올려 둔 폭죽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권태범이 주방 안으로 들어왔을 때 폭죽 끝에 매달려 있는 실을 쭉 잡아당겼다.

팡-

권태범의 까만 머리 위로 형형색색의 종이 릴 테이프가 떨어졌다. 나는 조금은 이상한 생일 축하의 말을 건넸다.

“태범 씨, 생일 축하했어요- 으핫!”

갑자기 나를 번쩍 안는 힘에 바닥에서 발이 살짝 떼어졌다. 너무 놀란 마음에 심장이 콩닥콩닥 뛰어 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차유원.”

“깜짝 놀랐잖아요.”

웃음기 머금은 얼굴로 배를 문지르며 권태범에게 말했다. 권태범은 내 얼굴 이곳저곳에 입을 맞추더니 내 손을 끌어당겨 식탁으로 향했다.

“이게 다 뭐야?”

“생일상이요! 태범 씨, 저 때문에 그날, 음… 아무튼 늦었지만 챙겨주고 싶어서요.”

그날 일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것이 우리 사이의 암묵적인 약속이나 다름없어, 급히 얼버무리며 작게 웃었다. 자리에 앉아 권태범의 밥에 호박전 하나를 올려주었다.

“얼른 드세요, 태범 씨.”

“잘 먹을게.”

내가 장난스럽게 그를 부르자 권태범의 눈가가 휘어졌다. 이렇게 서로를 보며 웃는 게 얼마 만인지. 살이 많이 빠진 권태범이 다시금 안쓰럽게 느껴졌다.

“간 괜찮아요? 싱겁지 않아요?”

“딱 좋아.”

“이거 제가 한 거예요! 이건 아저씨 도움 하나도 안 받고 전부 제가 다 했어요.”

크기가 균열하지 않고 삐뚤빼뚤 했지만 맛만 좋으면 됐다. 더 맛있는 반찬도 많은데, 권태범은 몇 번이나 내가 한 호박전을 집어먹었다.

밥을 다 먹고 거실로 나와 과일을 먹었다. 요즘 체리가 제철이라더니 알도 크고 새콤달콤한 게 입에 잘 맞았다. 그의 다리 사이에 앉아 둥그런 그릇을 품에 안고 과일을 먹는데 권태범이 과일 물이 든 내 옷자락을 닦아주었다.

“병원은 2시쯤에 갈까?”

“병원이요?”

“호빵이 보러 가야지.”

“아…. 음…. 오늘은 안 가도 될 거 같아요.”

권태범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동안 매일 눈만 뜨면 병원 타령을 했던 내가 뒤늦게 떠올랐다. 민망한 마음에 고개를 숙이자 때마침 태동이 느껴졌다. 나는 권태범의 손을 잡아 끌어 배에 올렸다.

“과일 먹었다고 발로 빵빵 차요. 기분 좋은가 봐요, 우리 호빵이.”

배가 울룩불룩해질 정도로 활발하게 움직이는 호빵이가 보였다. 그동안 내가 매일, 어떤 날에는 세 번이나 병원을 간 적도 있었으니 권태범은 오늘도 내가 병원에 가자고 할 줄 알았나 보았다.

“저 진짜 괜찮아요.”

권태범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알았다. 그래도 더 이상 그 일 때문에 시간을 헛되이 보낼 순 없었다. 지금 나한텐 그런 일 때문에 힘들고 슬퍼할 시간이 없었다.

하루빨리 이 흐릿한 기억의 실마리를 찾아 일을 해결하고 안정된 삶을 사는 게 필요할 뿐이었다.

단단해진 그의 손끝을 꽉 쥐자 눈에 띄게 안도감에 찬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 그의 뺨에 입을 맞추며 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고 권태범과 함께 아버님의 본가로 향했다. 아버님을 뵙고 싶다고 하자 권태범은 탐탁지 않은 것 같았지만, 며칠 만에 나가고 싶다는 내 말에 반대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생각 외로 아버님의 집은 운언동과 꽤 거리가 있었다. 우리 집 못지않게 큰 대문을 지나자 궁궐 같은 저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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