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집과 가까운 곳으로 병원을 다녀서인지 신호 몇 번 만에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유원아. 공부 다시 하고 싶지 않아?”
병원에 갔다 오자 또다시 기운이 없어져 누워있는 나를 향해 권태범이 물었다. 내가 너무 누워만 있었나? 하긴…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하고 밥만 축내는 내가 얼마나 한심해 보였을까. 그의 물음에 몸을 천천히 일으켜 사과했다.
“…미안해요, 뭐라도 할 게요.”
쓰레기통이라도 비울까 싶어 눈을 돌리자 권태범이 내 손목을 잡아당겼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이런 거 안 해도 돼. 아니 하지 마. 몸도 힘들면서.”
“그래도… 아, 아무것도 하는 게 없으니까….”
“네가 하는 게 왜 없어. 이렇게 옆에 있어 주기만 하면 되는데.”
권태범이 나를 끌어안으며 다정하게 속삭였지만, 마음속에 자리 잡은 불안감은 이미 싹을 틔웠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권태범은 나를 왜 도와줬을까. 돈을 원하는 것도 아니었고, 내 몸을 원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은 없었을 텐데, 왜….
정말 차유원과 그가 아는 사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그들 사이에 있는 건 아닐지. 그렇다면 권태범은 나를… 사랑하는 건지, 차유원을 사랑하는 건지. 심장이 불안정하게 날뛰었다.
버릇처럼 아랫입술을 깨물어 혀끝에 피 맛이 느껴졌다. 상처를 확인한 권태범이 혀를 찼다.
“피 나잖아. 자꾸 뜯지 말라니까.”
“아….”
그는 자기가 더 다 아프다는 듯 인상을 쓰며 찢어진 입술을 조심히 살폈다. 나를 다시 침대에 앉힌 권태범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대학 가고 싶어 했잖아. 할머님이랑도 약속했고.”
“그, 그래도 밖에 나가기 싫어요….”
밖에 나갔다가 또 그런 일이 있으면 어떡해. 내가 고개를 젓자 권태범이 의외의 말을 꺼냈다.
“그러면 저번에 봤던 윤설아 씨한테 배우는 건 어때.”
“윤설아 씨요…?”
아, 그러고 보니 그동안 윤설아에 대해서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원작 여주인공인데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그녀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응. 원래도 너 공부 봐주는 거 생각하고 겸사겸사 데려온 거였잖아.”
아, 맞아. 그때 그랬었지…. 공부를 다시 시작하긴 해야 하고 윤설아라면 별로 무섭지 않을 거 같은데…. 한번 해 볼까?
“그럼 고민해 볼게요….”
“그래, 잘 생각 했어.”
권태범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날의 일은 권태범 잘못도 아니고 내 잘못도 아닌, 그냥 운이 조금 나빠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런데도 권태범이 죄책감을 느낄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그는 내 머리를 계속 쓰다듬었다. 매일 꾸는 악몽에 잠을 깊게 자지 못한 머리가 몽롱했다. 이번에는 부디 악몽을 꾸지 않길 바라며 권태범의 손을 꽉 잡고 수마에 빠져들었다.
***
“형님. 접니다, 준석이.”
“들어와.”
문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태범은 유원에게 이불을 꼼꼼히 덮어주었다. 곧 준석이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화룡 그룹 합병인수에 대한 진행 사항 보고서입니다.”
준석이 넘긴 서류를 짙은 눈빛으로 확인한 태범이 고개를 끄떡였다.
“이대로 진행해, 최대한 빨리.”
“네, 그리고 이르면 오늘 저녁, 늦어도 내일 아침이면 조연주 소재 파악 가능할 거 같습니다.”
“잘 했어. 바로 한국으로 데려오나?”
“네, 일단은 그렇게 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그게… 화룡에서 위치를 제공해준 것 같습니다.”
“화룡이?”
“정확히 말하면 조 상무 쪽에서 제공해준 거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조 상무라면 조연주의 이복형제였다. 어찌 됐건 조연주만 찾을 수 있다면 어떤 루트든 상관없었다. 태범은 그날의 유원의 모습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그려졌다.
처음 발견했을 때 유원은 정말 엉망이었다. 온몸은 비와 땀으로 젖어 축축하게 늘어졌고 그의 얼굴엔 갖은 생채기가 있었다. 특히 손목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으며, 나중에 알았지만 왼손엔 큰 상처를 입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피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그냥 늘상 피를 마주하는 건 익숙한 것이었다. 하지만 유원이 피를 흘렸을 땐 눈앞이 하얘지며 머리가 어떻게 될 것만 같았다.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배를 끌어안고 끝까지 정신을 놓지 않으려는 유원의 모습에 눈에서 핏발이 섰다. 당장이라도 그놈들을 죽여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병원에 도착해서 아이가 무사하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정신을 잃은 유원을 보며 태범은 그 어느 때보다 침착한 머리로 그들의 처분을 내렸다.
“강화로 보내.”
“알겠습니다.”
이번에는 결코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
“형님, 그리고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태범과 마찬가지로 준석의 얼굴 또한 며칠 사이 굉장히 수척해진 상태였다. 특히 유원이 납치당하고 그들이 보내온 사진을 눈에 담았을 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어찌 됐건 다행히 유원과 태범이 무사한 것을 보고 난 뒤 준석은 태범에게 사표를 건넸었다.
‘형님, 이번 일은 제가 부족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제가 이 일에 책임지고 그만 두겠습니다.’
그 말에 태범은 아무 말 없이 준석을 바라보았다. 방안엔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소리만 남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범이 입을 열었다.
‘이번 일에 굳이 책임을 묻는다면 전부 내 탓이겠지.’
‘형님.’
‘이미 그 일을 겪고 나서 조심하지 못한 내 탓.’
‘…….’
‘그러고 나서도 유원을 다시 찾아간 내 탓.’
입을 다문 준석은 수척해진 얼굴을 쓸어내리는 태범을 바라보았다. 이번 일을 겪고 많은 생각이 든 듯, 그의 눈은 몹시 어둡고 깊은 빛을 띠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때처럼 잘못된 선택을 하지 못하게 내 곁에 있어 줘라, 준석아.’
준석은 그 말을 듣고 차마 태범과 유원의 곁에서 떠날 수 없었다. 그저 또다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할 뿐이었다.
“으응….”
“그래, 이만 나가 봐.”
짧은 대답만을 남기고 유원을 토닥여주는 태범을 잠시 응시하던 준석은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한 후 침실을 빠져나갔다.
***
“안녕하세요, 유원 씨.”
“아…. 안녕하세요.”
오늘따라 화창한 봄처럼 반짝이는 윤설아를 보니 마음이 무거웠다. 우물쭈물, 어색하게 인사하자 윤설아는 작게 웃었다.
“저희 뭐 하는지 태범 씨한테 얘기 들었죠?”
“아, 네 저 공부… 가르쳐 주신다고.”
“맞아요. 전에 학원 다녔다던데 진도 어디까지 배웠나 한번 볼까요?”
윤설아는 원작 속에서 이미 봤던 사람이니 무섭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그녀를 만나니 강 비서가 떠올라 바짝 긴장되었다. 굳이 그녀가 아니라 모르는 사람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다.
그러다 문뜩 그녀가 끼고 있는 붉은 색 귀걸이가 눈에 들어왔다. 원작에서는 저 귀걸이를 권태범이 주워 주는 것을 계기로 두 사람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그 귀걸이를 보자 나도 모르게 손이 떨렸다. 숨도 가빠져 끅, 끄읍 하고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자 윤설아가 급히 비닐봉지를 가져와 입에 대어주었다.
“숨 크게 내쉬고, 들이마시면서 호흡 한번 정리할게요.”
“흐, 으… 하, 후… 으.”
윤설아가 말하는 대로 공기가 폐로 들어왔다 나가는 감각을 느끼며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후… 우….”
“이제 좀 괜찮아졌어요?”
“네… 가,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근데 이런 경우가 이전에도 있었나요?”
내 대답을 기다리며 눈을 지그시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익숙하게 호흡을 정리하는 행동이 하루 이틀처럼 보이지 않았겠지. 하지만 이 사실을 윤설아한테 곧이곧대로 말했다가 권태범의 귀에 들어가면 어쩌지 하는 마음이 가장 먼저 들었다. 내가 망설이는 걸 알았는지, 윤설아가 걱정 말라고 나를 달랬다.
“권태범 씨한테 말 안 해요. 제가 유원 씨 도와주고 싶어서 물어보는 거니까.”
“…….”
“이런 적. 자주 있었어요?”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차유원의 몸에 빙의 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이런 적이 자주 있었다. 특히 혼자 있거나 원작에서의 일이 문뜩 떠오르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처음엔 경미한 정도였지만 홍콩을 다녀오고 나서 증상이 점점 심해졌다. 이런 사실을 알면 권태범이 걱정할까 항상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거나 급히 화장실에 가서 증상이 가라앉길 기다렸었다.
근데 왜 하필이면 윤설아가 있을 때….
“태, 태범 씨한테는… 말하지 말아 주세요…. 그 사람 걱정할 거예요.”
불안에 찬 얼굴로 윤설아를 바라보자 그녀가 내 손을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약속할게요.”
“…사실 이런 지는 조금 됐어요…. 올 초 부터요….”
내가 차유원이 아니라는 사실은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그것 때문임을 알지만 누구에게 이 비밀을 말할 자신도, 용기도 없었다.
“올 초면 1월? 2월?”
“2월이요.”
차유원의 몸에 빙의하고 나서 가끔 잠에서 깨고 나면 이런 현상이 반복되곤 했다. 어떤 꿈을 꿨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데 자고 일어나면 몸이 떨리고 모든 게 다 불안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흐음… 그럼 호흡이 불안정하게 느낄 때, 차유원 씨는 주로 어떤 생각을 해요?”
“…그냥 여기 있으면 안 될 거 같다는 생각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