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86)화 (86/136)

#86

그러던 중 어제저녁, 조 회장의 곁에서 오랜 시간 그를 보좌한 비서의 개인 카드의 사용 내역이 북경에서 발견되었다. 바로 북경에 사람을 보내 건물 CCTV를 확인하니 조연주의 모습이 찍혀있었다. 그것을 필두로 주변을 샅샅이 뒤지자 조연주의 인적이 조금씩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화룡은 여전히 발뺌인가?”

“네. 하지만 조연주가 독단적으로 벌인 일이라고 해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건 말도 안 됩니다.”

준석은 보기 드물게 흥분하며 말을 이어갔다.

“홍콩 마피아까지 끌어들였다면 분명 조 회장도 이미 알고 있었을 확률이 큽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아무리 화룡에 애정을 가져 복수심에 불타올랐다고 해도 그 큰일을 독단적으로 벌이기엔 스케일이 너무 컸다. 이번 일에 동원된 인원만 해도 30명이 넘었다. 태범은 감히 유원을 납치한 것도 모자라 해치기까지 한 그들을 가만 놔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계속해서 주시해. 허튼 수작 못 부리게.”

“네 알겠습니다.”

태범은 화면에서 유원이 뒤척이는 걸 확인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둘러 걸음을 옮기는 그의 입가에 짙은 한숨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

꿈에서 그날의 일이 반복되었다. 그날과 다른 점이 있다면 꿈에서는 권태범이 날 데리러 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에서 누군가에게 쫓기다 결국 긴 손톱이 내 뒷목을 파고드는 감각과 함께 장면이 전환되었다.

‘창고인가…?’

똑같은 장면이 반복되다가도 문뜩 이번처럼 새로운 장면이 떠오르기도 했다. 홍콩에서 납치당했을 때 갇혀 있던 창고인 줄 알았는데 그때와는 다른 공간이었다. 조금 더 음습하고, 좁고, 공기가 서늘했다. 비릿한 냄새도 나고 피부에 닿는 공기도 축축했다.

‘일어났어?’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에 몸이 멈칫, 굳었다. 분명 나를 다정하게 부르는 것 같은데 왜인지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일어났으면 나 봐야지, 차유원.’

천천히 뒤를 돌아보자 언제 다정한 목소리로 불렀냐는 듯 남자는 스산하게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초리에 숨을 제대로 내뱉지 못하고 목에서 끄윽, 끅-거리는 소리가 비정상으로 터져 나왔다.

‘왜 떨어. 시발, 내가 얼마나 잘해주는데.’

훌쩍 다가온 남자의 손길이 닿아 뺨에 소름이 돋았다. 딱딱하게 굳은 손은 움직여지지 않아 남자가 나를 만지는 대로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제멋대로 굴던 남자는 이내 옷을 챙겨 입더니 나를 두고 창고를 빠져나갔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철컥 잠기고 남자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하지만 몸은 이미 고장 난 것처럼 잘게 떨리며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끕, 끅 하고 괴로운 소리가 절로 터져 나왔다. 너무 답답해 손톱을 세워 목을 벅벅 긁었다.

‘이상해… 싫어, 싫어 진짜….’

그러다 갑자기 창고 문이 열렸다. 그놈이 다시 돌아왔을까 봐 몸을 움츠렸다. 그런데 들어온 사람은 놈이 아닌 지금보다 앳되어 보이는 권태범이었다. 그가 안으로 들어왔다.

‘태범 씨…?’

태범 씨가 왜 여길… 이게 대체 무슨 꿈이지? 왜 권태범이 어려 보이지?

가만 보니 권태범의 목에 상처가 없었다. 설마, 지금이 아니라 예전의 권태범인가? 권태범은 혼란스러워하는 내 손발에 묶인 밧줄을 끊더니 나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 그때, 다시 돌아온 남자와 맞닥뜨렸다.

‘아… 윽.’

봐야하는데… 이게 꿈인지, 아니면 정말 권태범과 차유원이 이전에 만난 적이 있는 건지 알아야 하는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오며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서 결국 눈을 감았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선연한 핏자국이었다. 비릿한 피 냄새까지 느껴졌다.

“…원아-”

“끄윽, 흐… 시, 흐으….”

“유원아!”

몸을 흔드는 손길에 눈이 떠졌다. 흐릿한 초점이 잡히자 놀란 얼굴의 권태범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아… 학-”

숨을 헐떡이자 권태범이 급히 내 등을 쓸어내려 주었다. 호흡이 조금 안정을 찾았고 그가 내 입가에 물컵을 대주었다. 물을 꼴깍꼴깍 마시는데도 여전히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무서운 꿈 꿨어?”

“하으… 으… 네에….”

매일 같이 자고,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그의 곁에서 보내고 있어 권태범이 모르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역시 꿈이었나 보았다.

그래. 그럴 리가 없지…. 왜 이전에 권태범이랑 차유원이…. 아니야, 아닐 거야…. 내 손을 아프지 않게 주물러주는 권태범을 보며 불안에 찬 마음을 다스렸다.

“태, 태범 씨, 저 병원 갈래요.”

“…….”

“호, 호빵이 잘 있는지 보고 싶어요. 그렇게 해주세요, 네?”

권태범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얼른 옷을 갈아입으라고 그를 재촉했다. 허둥지둥 드레스 룸으로 향해 가장 먼저 손에 잡히는 겉옷을 아무렇게나 꺼내 입었다.

“왜 안 갈아입어요?”

권태범은 집에서 입는 편한 차림을 한 채 묵묵부답이었다. 내가 거의 신경질적으로 채근하자 권태범이 나를 꼭 안았다. 이럴 때가 아닌데. 빨리 병원 가야 하는데. 나는 답답해서 웅얼거렸다.

“병원은요? 저 병원 가고 싶어요. 호빵이 만나고 싶어요….”

“밥부터 먹고. 어제저녁도 안 먹었잖아.”

“벼, 병원부터요… 네?”

“너 지금 너무 말랐어. 조금만 먹자….”

“…….”

“제발, 유원아.”

권태범이 내 손목을 가볍게 쥐었다. 남자치고 너무 마른 손목이 훤하게 드러나 있었다. 입덧이 멈춘 후에는 워낙 많이 먹어 대 겨우 유지했지만 원래도 살이 잘 안 붙는 체질에다 요즘 잘 먹지 못해서 살이 도로 빠져버렸다.

“유원아.”

병원부터 가자고 고집을 부리려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에 입을 다물었다. 결국 그의 품에 안겨 1층으로 내려왔다.

주방으로 들어가니 아무도 없이 식탁에 따뜻한 음식만 차려져 있었다. 누가 오진 않을까 바짝 긴장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는데 내 손에 숟가락을 쥐여 준 권태범이 말했다.

“아무도 안 와. 자, 얼른 먹어.”

“네.”

잡곡밥을 한술 뜨자 권태범이 그 위에 반찬을 올려놓아 주었다. 잘게 찢어진 장조림이 올라간 밥을 입에 넣고 어떻게든 씹었다. 할머니가 해주는 장조림 맛이었다. 의아해서 권태범을 보았더니 그가 작게 웃으며 내 입가를 닦아주었다.

“아까 아침에 할머님이 해 주신 반찬 가지고 올라온 거야. 입에 맞아?”

고개를 끄덕거리며 숟가락 한술을 다시 크게 떴다. 입맛이 없었는데, 할머니 음식을 먹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번에는 고추장에 버무린 진미채가 먹고 싶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말도 하지 않았는데 권태범은 작은 진미채 조각을 집어 내 숟가락에 올려주었다.

“동치미 무친 것도 먹고 싶어요.”

손을 다쳐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게 불편했다. 내 눈빛만 봐도 모든 걸 아는 권태범이었지만, 나 때문에 밥도 잘 먹지 못하는 게 미안했다.

“여기.”

하지만 아무런 불평도 없이 내 식사를 도와주는 모습에 가슴이 작게 일렁거렸다. 그러다 문뜩 차유원의 기억 속에서 엿보았던 장면이 떠올랐다.

분명 그때의 차유원은 어떤 사람에게 고백을 하고 있었다. 형이라고… 좋아한다고 간절하게 말하는 차유원의 손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저기, 태범 씨.”

“응.”

생선 살을 바르다 나를 바라보는 얼굴에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조금 무서웠다. 우리가 예전에 만난 적이 있느냐고, 날 아냐고 물어봤다가 내가 진짜 차유원이 아니라는 걸 그가 깨달을까 봐 무서웠다. 나 때문에 이 모든 평화가 깨질까 봐. 아슬아슬하게 조각나기 시작한 틈을 외면하며 숨을 참았다.

“진짜 아무것도 아니에요….”

오랜만에 먹는 할머니 반찬에 입맛이 돌던 것도 잠시, 가슴에 돌덩이를 올려놓은 것처럼 먹먹하고 답답했다.

결국 권태범이 모르게 먹은 걸 모두 토해 냈다.

***

“호빵이는 아주 잘 자라고 있네요, 움직임도 활발하고요.”

어제에 이어 오늘도 병원에 방문했다.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병원에 오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시, 심장 소리는요? 호빵이 심장은 잘 뛰고 있나요?”

“심장 소리는 어제 이미 들으셔서 다음 주에 듣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많이들 모르고 계시는데 아기 심장 소리 듣는 게 태아한테는 스트레스일 수 있거든요.”

“아… 그런가요.”

호빵이의 심장이 우렁차게 뛰는 소리를 들어야 안심할 수 있을 거 같았는데. 하지만 호빵이한테 스트레스를 줄 수도 있다면 안 하는 게 맞았다.

의사의 권고에 고개를 끄덕이며 아쉬운 얼굴로 초음파 화면을 바라보았다. 손톱만 하던 호빵이가 어느새 무럭무럭 자라 사람의 형태를 조금씩 갖춰가는 모습이 너무 신기했다.

“우리 호빵이 잘 크고 있대요.”

“그래.”

“태범 씨는 왜 호빵이 안 봐요?”

권태범은 초음파 화면 대신 자꾸 내 얼굴만 내려다보았다. 내가 묻고 나서야 마지못해 호빵이를 보았다.

꼬물꼬물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선생님께 질문을 한가득 퍼부었다. 마치 오랜만에 병원에 방문한 사람처럼 매일 똑같은 질문을 하는 내게 선생님은 친절한 미소로 대답해주었다.

겨우 진료를 마친 후 병원에 온 김에 상처를 소독하기 위해 외과로 넘어갔다. 그동안 매일 밤낮으로 권태범이 잘 관리해준 덕분인지 상처가 잘 아물고 있었다.

하긴 매일 씻겨주고 먹여주고 재워줘서 손쓸 일이 없으니까.

나온 김에 밥을 먹고 가자는 그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이미 호빵이가 잘 있다는 얘기를 들은 직후부터 집에 가고 싶었다. 밖에 있으면 신경 쓸 일이 너무 많아 정신적으로 피로했다. 집에 가고 싶다고 그의 팔을 잡아당겨 차로 향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