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85)화 (85/136)

#85

“형님! 형수님!”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가 번쩍 들렸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니라면 저 앞에 있는 사람들은 운언동 아저씨들이었다. 아저씨들과 함께 특수 부대 용 옷을 입고 있는 경찰들이 총을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태범 씨….”

“그래.”

꿈이 아니라는 듯 권태범이 내 손을 꽉 쥐었다. 다행이다…. 이제 정말 모든 게 다 끝났다는 사실에 억지로 버티고 있던 몸에서 긴장이 풀렸다. 안도의 숨을 내뱉으며 그에게 기댔다. 그가 다급히 나를 부축하고 내 안색을 살폈다.

아… 머리야….

소매 안으로 숨긴 손에서 피가 제법 많이 흘렀다. 권태범에게는 감췄는데 생각보다 상처가 꽤 깊은 것 같았다.

긴장이 풀리니까 더는 버티기 어려웠다. 계속 피를 흘려서인지 눈앞이 어지러워지며 시야가 점점 좁아졌다.

“태범 씨….”

당황한 그가 내 얼굴을 더듬더듬 매만졌다.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그는 다친 곳이 없어 보여 뒤늦은 안도감이 밀려왔다. 원작처럼 흘러가지 않아 작은 웃음마저 나왔다.

아…. 근데 아프긴 아프다…. 작게 웃은 것뿐인데도 머리가 크게 울렸다.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결국 모든 것을 놓아버리듯 그의 품에 안겨서 속삭였다.

“태범 씨, 나 어지러워요….”

“유원…아…?”

그의 시선이 피로 축축하게 젖은 소매에 닿았다. 감춰야 하는…데…. 입에서 더운 숨이 색색 새어 나왔다. 권태범은 나를 번쩍 안아 준석 아저씨를 향해 말했다.

“당장 병원으로 가. 유원이가 다쳤어.”

그의 품에 안긴 채로 차에 올랐다. 차의 진동마저도 큰 충격으로 다가와 이를 악물자 권태범이 나를 꼭 안아주었다.

“유원아, 자면 안 돼. 정신 차려.”

“자꾸… 졸려서….”

“조금만, 조금만 이따가 자자. 착하지….”

권태범이 피에 젖은 소매를 벗겨주었다. 벌어진 상처에서는 끊임없이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가 넥타이를 풀어 상처를 지혈한 뒤 그 위를 꾹 눌렀다. 너무 많은 피가 흘러서일까,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잠이 들면 안 된다는 그의 말에 혀를 깨물며 내 몸을 덮쳐오는 수마를 물리쳤다.

***

어두운 도로를 빠른 속도로 달린 차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병원에 도착했다. 검은색 차가 입구에 멈춰 서자 굳게 닫힌 문이 열리고 태범이 유원을 품에 안고 나왔다. 수많은 의료진에게 다간 태범은 약한 숨을 내뱉으며 헐떡이는 유원을 꽉 끌어안으며 말했다.

[손부터 치료하고 태아 초음파도 함께 보고 싶습니다. 바로 준비해주세요]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의사와 대화를 나눈 태범은 곧장 병원 안으로 들어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유원을 침대에 눕혔다.

[시작하겠습니다.]

치료를 위해 태범이 한걸음 물러서자 의사가 다가와 유원의 상태를 살폈다. 낯선 인기척을 느낀 유원은 흠칫 몸을 굳히며 그의 얼굴이 조금씩 무너져 내렸다.

“흣…!”

태범은 달라진 유원의 숨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눈을 질끈 감은 채 달달 떨고 있는 여린 어깨가 시야에 들어왔다.

“태범, 흐, 태범 씨….”

겁에 질린 얼굴로 저를 찾는 손길에 태범은 하는 수 없이 유원의 뒤에 앉아 그의 품을 감싸 안았다. 자신의 페로몬 향을 맡은 유원은 곧바로 제 품을 파고들며 작은 숨을 터트렸다. 낯선 사람이 다가오자 겁에 질려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에 태범은 유원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밀려왔다.

이렇게 겁도 많으면서 조금 전엔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태범은 마른 몸을 꽉 끌어안으며 슬픈 눈으로 유원을 내려다보았다.

“괜찮아…. 이제 다 끝났어. 괜찮아, 유원아.”

태범은 페로몬을 조금 더 흘려 주며 유원의 등을 토닥였다. 잔뜩 긴장해서 딱딱하게 굳어있던 몸이 태범의 손길에 조금씩 누그러졌다. 태범은 유원의 눈에 손을 올려 시야를 가려주고 의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손만 얼른 치료하자. 괜찮지?”

“네에….”

태범은 착하다, 하고 작게 속삭이며 피에 젖은 유원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오는 길에 급한 대로 지혈을 했지만 피가 쉽게 멈추지 않았다.

[그럼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의사의 목소리에 유원은 또다시 긴장한 듯 몸을 굳혔다.

“태범 씨… 태범 씨….”

“그래.”

“나만 두고 가면 안 돼요.”

“그래. 이렇게 옆에 있을게.”

“네에….”

태범은 유원을 품에 안고, 페로몬을 흘려주며, 계속해서 그의 귓가에 속삭여주었다. 그러한 태범의 노력에 겨우 치료가 끝이 났다. 의사는 태범에게 조용히 주의 사항만 알려주고 진료실을 빠져나갔다.

“다 끝났어.”

태범은 유원의 눈을 가린 손을 내리고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유원은 낯선 사람이 모두 사라지자 그제야 긴장감을 완전히 누그러뜨렸다. 뒤늦게 피로감이 몰려오는 듯 유원의 눈엔 졸음이 가득했다.

“졸리면 자도 돼.”

태범은 안심하고 자도 된다며 유원의 가슴을 작게 토닥였다. 유원은 태범의 손을 꽉 쥐고 졸음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태범 씨… 저 일어나면 집으로 가요… 우리 집으로….”

“그래… 그러자.”

옆을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그래도 유원은 태범의 손가락을 꼭 쥔 채 잠이 들었다. 유원이 잠이 든 것을 확인한 태범은 붕대로 감싼 손을 내려다보고 이를 악물었다.

유원을 지켜주겠다고 다짐했는데 또다시 그를 허망하게 잃어버릴 뻔했다. 유원이 피를 흘리는 것을 본 순간 그때의 일이 떠올라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태범은 지친 얼굴로 잠이 든 유원을 내려다보며 그의 손에 얼굴을 묻었다.

“다신 이럴 일 없을 거야….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널 지켜줄게…. 그러니까 지금처럼 나를 계속 사랑해줘 유원아….”

***

홍콩에서의 크고 작은 일이 일어난 지 일주일이란 시간이 흘렀다. 유원이 칼에 베인 상처가 크긴 했지만 다행히 깊지 않아 간단한 봉합과 수혈만으로 치료는 끝이 났다.

다만 임신을 한 상태로 오랜 시간 비에 젖고 추위에 방치되어 약간의 감기 기운과 더불어 탈수 증상이 있었다. 때문에 의사는 입원 치료를 권했지만 유원은 모든 것을 거절하고 하루빨리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우리 집으로 간다고 했잖아요….’

지친 얼굴로 울먹이는 얼굴을 바라보자 태범은 결국 그의 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형님, 형수님은 좀 어떠십니까.”

“아직 안 좋아. 밤에 악몽도 꾸고 밖에 나가려 하지 않아.”

홍콩에서의 일에 대해선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길고도 짧은 시간이 흘렀지만, 유원은 여전히 방에서 나오질 않았다. 자신이 있을 땐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 잊었다고 말하는 것과 달리 식사를 포함한 대부분의 일을 방에서 해결하고 태범의 곁에서 떨어지는 것을 극도로 무서워했다.

태범은 그렇게 좋아하던 학원도 나가지 않고 하루의 절반 이상을 침대에 누워만 있는 유원이 걱정되었다. 착잡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는 태범을 지켜보던 준석이 머뭇거리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윤설아 씨…에게 상담을 받아 보는 건 어떨까요.”

“그건 이미 끝난 얘기야.”

준석은 윤설아를 보호해주겠다는 명목으로 한국까지 데리고 왔으면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저렇게 내버려 두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형수님 기억이 돌아올까 봐 걱정하시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알면 더 이상 그 얘기는 꺼내지 마.”

“하지만 그 이유 때문에 형수님을 저렇게 내버려 두는 게 더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

어쩌면 준석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곪은 상처를 두려워하기보다 그걸 치료하는 게 유원에겐 더 나은 선택지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태범은 아직 모든 것을 기억하고 난 유원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일주일에 두 번. 유원이 공부를 봐주면서 하는 걸로 하지.”

하지만 계속해서 이렇게 유원을 둘 수도 없었다. 점점 심해지는 상태에 하루하루가 언제 녹을지 모르는 빙판길을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태범은 결국 윤설아가 예전부터 제안한 유원의 심리 상담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유원이는 윤설아가 자기 주치의였단 사실을 모르니까 유념하라고 전하고.”

혹시 모를 일에 태범이 말을 덧붙였다.

“네, 알겠습니다.”

“조연주 행방은 찾았나?”

조연주는 조 회장이 데려온 혼외 자식이었다. 때문에 집안의 멸시 속에서 인정받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어떤 위험한 일이든, 더러운 일이든 마다하지 않고 밑바닥부터 제 힘으로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온 그녀였다. 그렇게 제 목숨처럼 여기던 화룡이 한순간에 무너졌으니 태범을 죽이고 싶었을 거였다.

“홍콩에서 마카오를 경유한 뒤 중국 본토로 인적을 감췄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이유가 있었더라도 유원을 건드렸으면 안됐다. 지금부터 모든 것을 동원해 그녀가 벌인 일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그것이 설령 조연주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끝까지 찾아서 데려와. 한국까지 데려오기 힘들면 그 자리에서 죽여도 상관없어.”

“네, 알겠습니다.”

홍콩 경찰까지 동원해 그들을 뒤쫓았지만 조연주를 비롯한 주요 주모자들은 재빠르게 몸을 숨긴 채 달아나 버린 지 오래였다. 그나마 마카오에서 밀항하려는 남자들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조연주는 끝끝내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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