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조금씩 그와 나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마침내 내게로 뻗은 그의 손이 내 손끝에 닿았다. 풀썩 권태범의 품에 얼굴을 묻자 그가 나를 꽉 끌어안았다.
“흐으… 흑, 태, 태범 씨….”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하늘에 밝은 빛이 비치는 심정이었다. 그의 페로몬 향에 안도가 밀려왔다. 긴장이 확 풀어졌다.
“유원아….”
“흐윽, 으… 흐….”
그가 휘청거리는 나를 지탱하고 꼭 감싸 안았다. 눈물이 번진 내 뺨을 닦은 권태범은 안도감에 찬 얼굴로 짙은 숨을 내뱉었다.
“다친 곳은 없어? 많이 무서웠지, 내가… 하…. 내가 미안해, 유원아.”
“아니에요, 흐윽, 와줘서, 끄윽, 고마워요…. 고마워요, 태범 씨….”
“아니야, 내가… 내가 진짜.”
내 머리를 감싸 안은 그의 손이 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하염없이 나를 쓰다듬던 권태범은 내가 다친 곳이 없는지 살펴보았다. 그가 더 놀랄까 봐 다친 손을 소매에 슬쩍 숨기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활짝 웃었다.
그제야 하얗게 질렸던 권태범의 얼굴에 조금 생기가 돌았다. 권태범이 고개를 돌려 강 비서 쪽을 바라보았다. 달빛에 비친 그의 눈빛은 나를 볼 때와 달리 섬광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잠깐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나를 저들의 시선에서 가린 권태범이 분노에 찬 서늘한 얼굴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예상치 못한 순간 마주한 권태범의 모습에 강 비서가 당황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거렸다.
“강 비서.”
“….”
“아니, 조연주라고 불러야 하나?”
비릿하게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린 권태범이 검은색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제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권태범이 한 걸음씩 다가갈수록 그들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특히 강 비서의 옆에 선 두 남자는 무릎을 휘청거리며 바닥에 엎어져 몸을 잘게 떨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숨을 헐떡거리며 제 목을 부여잡았다.
왜 저러지? 이상해서 남자들과 권태범을 번갈아 보자 강 비서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하, 그 와중에 자기 오메가한테는 페로몬 하나 안 닿게 하는 거 보면 참 권태범 당신답다고 해야 할지.”
페로몬? 정말 무슨 말인가 싶어 강 비서를 보니 그녀의 얼굴이 더 일그러졌다.
“조용히 해.”
“권태범…. 읏, 나는 당신이 참, 증오스러, 워.”
강 비서는 살기에 찬 눈으로 권태범을 노려보았다. 무슨 이유가 있어 저러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대체 왜… 저렇게까지.
“당신 때문에 모든 게 망했어. 내가 바닥에서 여기까지 어떻게 올라왔는데. 얼마나 개처럼 일하면서 꾸역꾸역 버텼는데! 다 당신 때문에 망가져 버렸다고!”
강 비서는 권태범 앞에서 절대 넘어지기 싫은지 휘청거리는 다리에도 꼿꼿하게 서려고 애썼다.
“그게 왜.”
그런 강 비서를 무참히 내려다보는 권태범은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만큼 냉소적이었다.
“나 때문이지.”
“네, 네가! 먼저 화룡-”
“시작은 최명진이 먼저였어.”
악에 받쳐 소리치는 강 비서에게 권태범이 말했다. 최명진…? 어딘가 익숙하다가도 낯선 이름에 곰곰이 기억을 떠올렸다. 하지만 기억이 날 듯 말 듯 가물거렸다.
“내가 분명 경고했을 텐데. 더 이상 최명진의 뒷배를 봐준다면 각오해야 할 거라고. 그걸 무시한 건 내가 아니라 너희야. 게다가 뒤로 구린 일도 참 많이 했던데. 왜 책임을 나에게 돌리는 거지?”
권태범이 그들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갈 때마다 강 비서와 남자들의 표정이 하얗게 질려갔다. 차가운 바닥에 엎드린 몸으로 손톱을 세워 제 목을 긁어대는 모습이 기괴할 정도로 무서웠다.
“이만한 일을 저질렀을 땐 마땅한 각오는 했겠지.”
그 말을 끝으로 그들에게 다가간 권태범이 주먹을 들어 올렸다. 가까스로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들과 강 비서가 그를 향해 칼을 휘둘렀지만, 권태범은 손쉽게 그들을 제압했다.
한 남자의 손목을 무자비하게 꺾은 권태범은 떨어진 칼을 멀리 발로 찬 뒤 남자의 목을 세게 쥐었다. 남자가 터질 것 같은 얼굴로 켁켁거리며 숨을 쉬지 못했지만 권태범의 손은 여전히 숨통을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이, 시팔!”
멀리서 자신의 동료를 지켜보던 다른 남자가 칼을 고쳐 들고 권태범에게 달려들었다. 권태범은 기절한 남자를 무감정한 얼굴로 집어 던졌다.
[장소는 잘 골랐군.]
[무, 무슨 말이야!]
[너희 말대로 누군가를 죽이기엔 적당한 곳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거야.]
권태범은 익숙하게 영어로 그들과 대화를 나누며 남자의 멱살을 쥐었다. 호기롭게 권태범에게 달려들었던 남자의 발끝이 허공에 떴다. 이미 기절해서 쓰러진 남자와 마찬가지로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조금 전처럼 페로몬으로 간단히 제압할 수 있음에도 권태범은 손수 그들에게 고통을 주었다. 숨이 넘어갈 지경의 남자를 내던지자 바닥을 구른 남자가 콜록대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했다. 권태범은 그러거나 말거나 강 비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순식간에 두 명을 제압하다니. 그때서야 긴장이 풀렸다. 혹시나 권태범이 다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이제 돌아가면…. 안도했을 때 멀찌감치 서 있던 강 비서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내가 고작 얘네만 데려왔을까.”
가늘게 찢어진 입술 사이로 붉은 혀가 나와 아랫입술을 핥았다. 그녀의 눈빛에 불안해져 고개를 돌렸다. 옅은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남자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단단히 준비했는지 그들은 하나같이 무시무시한 장비를 든 채였다.
“태범 씨….”
한시라도 빨리 도망가는 게 낫지 않을까. 떨리는 목소리로 권태범을 부르자 그가 내 손에 차키를 쥐여 주었다.
“유원아. 우리 예전에 자동차 게임 했던 거 생각나?”
병원에 갔다 오다가 우연히 발견한 게임장에서 그와 자동차 레이싱 게임을 한 적이 있었다. 그걸 갑자기 왜…? 불안해서 그의 팔을 잡았다. 설마. 아니겠지.
“시, 싫어요. 같이 가요….”
“시동은 가운데 버튼 누르고. 무조건 앞으로만 가. 할 수 있지?”
“안 돼요, 나 못해요, 태범 씨….”
“해야 해.”
권태범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개를 마구 저었다. 나 혼자 가라니. 그럴 순 없었다. 어떻게 권태범을 혼자 두고 가겠나. 그가 다치는 건 싫었다. 그것도 나 때문에 다치는 건 생각하기도 싫었다.
소설의 내용이 떠올랐다. 부하의 배신으로 크게 다친 그의 모습이 물기로 흐릿해진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팔에 매달려 울음을 터뜨리자 권태범이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사랑해, 유원아.”
“흐윽… 태범 씨….”
“호빵이랑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어. 금방 갈 테니까.”
그 말과 함께 권태범이 나를 밀어냈다. 호빵이. 불안하게 뛰는 심장박동 사이로 배에서 아릿하게 통증이 올라왔다. 호빵이를…. 나는 혀를 왈칵 깨물었다. 우리 아기. 그와 나의 아기였다.
“빨리.”
내 어깨를 단단히 잡는 손길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의 말을 따라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차창 너머에서는 권태범이 수많은 남자를 막아서고 있었다.
“흐윽… 태범 씨….”
권태범이 멀어질수록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파 왔다. 내가 그렇게 쉽게 강 비서를 따라가지만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다. 다 내가 멍청해서 그를 위험하게 만든 것이다.
안 돼… 이번엔 내가 지켜줘야 해.
어차피 권태범이 아니면 살 이유도 없었다. 이를 악문 나는 핸들을 꽉 쥐고 브레이크를 밟았다.
“호빵아, 미안해. 아빠가 태범 아빠랑 너랑 다 지켜줄게.”
기어를 후진으로 변경하고 속력을 올리자 곧 외롭게 싸우고 있는 권태범이 보였다. 대부분은 그가 남자들을 몰아세우고 있었으나 너무 적이 많았다. 마구 휘두른 각목이 그의 등을 내려쳤다.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감히 누구한테…!
빠앙-
클랙슨 소리에 권태범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부아앙 하고 속력을 높이자 사람들이 뭐라고 소리치며 뿔뿔이 흩어졌다.
미친 사람처럼 앞뒤 구분도 없이 사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전에 배운 기억을 되살려 핸들을 움직여 막무가내로 남자들을 위협했다. 끼익. 하얀 연기를 일으키며 차를 멈춰 세우자 권태범이 놀란 얼굴로 나를 불렀다.
“차유원!”
차에서 뛰어내린 나는 급한 대로 땅에 떨어진 칼을 쥐었다. 예전에 권태범이 칼을 쥐는 법을 알려주었다. 그땐 무섭다고 학을 뗐는데 진지하게 배울 걸 그랬다. 집으로 돌아가면 꼭 다시 제대로 배울 거다.
그 전에 먼저 여기를 빠져나가야 하겠지만.
“미안해요. 하지만 제가 태범 씨 지켜준다고 했잖아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본 권태범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게 손을 뻗었다.
“하아…. 이리 와. 위험해.”
내 손목을 끌어당긴 그가 나를 등 뒤로 세우며 보호했다.
“태범 씨.”
“응.”
눈치를 보듯 서로 대립한 남자들을 바라본 그가 내 부름에 대답했다. 넓은 그의 등이 오늘따라 든든해 보였다. 비록 우리가 지금 처한 상황이 최악이라는 걸 알지만 그와 함께 있다는 사실에 무섭지 않았다. 내가 말을 잇지 않자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권태범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입을 열었다.
“아까 저는 말 안 한 거 같아서요. 나도 태범 씨 많이 사랑해요.”
권태범의 눈동자가 일렁거리며 턱에 단단히 힘이 들어갔다. 그때 강 비서의 외침에 수십 명의 남자가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한 사람 몫은 해야 할 텐데. 가능할까. 피를 너무 많이 쏟아서 그런지 눈앞이 어지러웠다. 하지만 여기서 권태범에게 짐이 될 수 없다는 생각에 칼을 꽉 잡았다.
칼을 쥔 손이 어색했다. 그래도 그의 등 뒤는 내가 지켜야 했다. 마른 침을 삼키며 점점 다가오는 남자들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