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뭐야…? 그 다음에 떠오른 기억은 차유원이… 누군가에게 고백하는 장면이었다. 형이라니. 차유원이 누군가를 좋아했었나?
간절하고도 애달프게 내뱉는 고백에 내가 다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어두웠던 과거를 뒤로한 차유원이 느끼는 감정은 분명 사랑스러운 핑크빛이었다. ‘형’이라는 남자를 향한 차유원의 심장은 몹시도 행복하게 두근대고 있었다.
‘저 형 많이 좋아해요, 그러니까… 우리 사귀면 안 돼요?’
그런데 대체 누구한테 하는 고백이야.
차유원이 고백하는 남자의 얼굴이 그의 머리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차유원이 원래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나? 그렇다면 나는 어떡하지…. 차유원의 기억과 감정이 또렷하게 다가올수록 걱정이 됐다. 만약 차유원이 만나는 사람이 있었다면 지금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렇다고 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가만히 지켜보는데 ‘형’이라는 남자가 차유원을 혼자 두고 등을 돌렸다.
차유원이 울먹이며 떠나가는 남자를 붙잡고 매달렸지만 남자는 매몰차게 자리를 떴다. 차유원의 마음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남의 슬픔이어야 하는데 동화되어 있어서인지 차유원의 감정이 오롯이 느껴졌다. 심장까지 찌릿하게 아팠다.
머리를 다쳐서 그런가, 차유원의 조각난 기억이 드문드문 떠올라 마치 내가 진짜 차유원이 된 기분이었다. 떠나간 남자의 뒷모습을 그저 넋을 놓고 바라보는 차유원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만… 그만 생각해.
심장을 콕콕 찌르는 감정에 이 기억이 빨리 끝나길 바랐다. 아파… 그만. 미간을 찌푸리며 온몸에 힘을 주자 기억이 점점 수면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아…!”
“깼다!”
먹먹하게 머릿속을 파고들던 기억이 멈추고 뿌옇던 시야에 초점이 돌아왔다. 겨우 눈을 뜨고 강 비서를 올려보자 그녀가 안심한 얼굴로 한숨을 내뱉더니 내 옆으로 침을 뱉었다.
“시발, 놀랬잖아!”
안개가 걷히는 것처럼 정신이 또렷해지며 주변의 모습이 눈에 차근차근 담기기 시작했다. 남자 둘은 어디로 가고 강 비서 혼자 있었다.
지금이 기회였다.
많은 걸 따지고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권태범이 여길 온다고 했으니 기다릴 법도 했지만 본능이 그것을 말리고 있었다. 돈을 목적으로 나를 납치한 거라면 말끝마다 마치 권태범이 곧 죽을 사람인 것처럼 말할 순 없었다.
이건 마치… 날 미끼로 권태범을 죽이려 드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권태범이 이곳에 오기 전에 도망쳐야 했다. 그 생각이 들자 앞뒤 따질 것 없이 일어나 강 비서를 밀쳤다.
“윽. 시발! 이게 무슨-”
갑작스러운 내 공격에 턱을 맞은 그녀가 피에 섞인 침을 뱉으며 나를 노려보았다.
“너. 진짜 죽고 싶지.”
차가운 분노를 뿜어내는 그녀의 눈빛이 스산했다. 그냥 얌전히 있을 걸 그랬나. 아니야. 그래도 할 수 있을 때까지는 해봐야지. 허둥지둥 주변에 쌓여 있는 각목을 들어 몸을 일으키는 강 비서에게 소리쳤다.
“오, 오지 마세요!”
각목 끝을 강 비서를 향해 겨눈 채로 입구를 향해 한 걸음씩 물러섰다.
‘조금만 더 가면 돼, 조금만.’
“오면 진짜 다치게 할 거예요.”
입구와 나를 번갈아 보던 강 비서가 비웃음을 흘리더니 머리를 다시 묶는 여유까지 부리며 다가왔다.
“하아… 자꾸 사람 뒤통수를 치면 어떡해. 내가 한 번이나 봐줬는데.”
정말 화가 많이 난 거 같다. 짜증스러운 얼굴로 주머니에 손을 넣어 칼을 빼든 그녀의 눈이 날이 서 있었다.
“이리 와. 내가 얌전히 있으면 안 다친다고 했잖아.”
“그냥 이제 보내 주세요.”
“두 번 말 안 해.”
“강 비서님, 제발….”
“아아아아악!!”
갑자기 강 비서가 소리를 지르며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곱게 묶었던 머리가 다시 헝클어졌고 그녀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시발, 진짜 짜증 나게 하네!!!”
버럭 소리를 지른 강 비서는 안 되겠다는 듯 칼을 나를 향해 겨누었다. 설마 저걸로 날 찌르겠어? 싶다가도 두려움에 나도 모르게 물러섰다. 각목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난 분명히 얌전히 있으라고 했어, 말 안 들은 건 유원 님이에요.”
탁-하고 각목 끝을 잡은 강 비서가 내게서 손쉽게 각목을 빼앗아 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빼앗겨버린 각목을 힘없이 바라보았다.
혹시 강 비서도 알파인가.
그냥 얌전히 있을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강 비서는 나를 노려보며 칼끝을 들이밀었다. 엄청 힘이 센 그녀를 당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두 손을 모아 사과했다.
“자, 잘못했어요!”
“늦었어요.”
내 간절하고 눈물겨운 사과에도 강 비서는 한쪽으로 각목을 집어 던졌다. 힘이 얼마나 센지 바닥에 떨어진 각목이 두 동강이 났다.
“야, 얌전히 있을게요!”
“늦었다고.”
강 비서의 손에 들린 칼이 번쩍여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나 꼭 죽으란 법은 없는지 그 순간, 강 비서가 서 있는 자리 뒤로 움푹 파인 공간과 그 옆으로 쌓인 시멘트 봉지가 눈에 들어왔다. 저기로 강 비서를 넘어뜨리면 시간을 좀 벌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녀의 손에 들린 칼이 문제였다.
안 되겠다. 이대로 끝날 순 없어.
강 비서에게 팔을 휘두르자 그녀가 기민하게 눈치채고 몸을 살짝 비틀었다. 간발의 차이로 강 비서의 어깨를 쳤지만 칼날이 내 손바닥을 길게 긋고 말았다.
“흐윽!”
“너, 이 새끼가-”
“미, 미안해요, 흐, 으….”
균형을 잃은 강 비서가 비틀비틀, 뒤로 물러나다 고르지 않은 바닥 때문에 넘어졌다. 그 틈을 타,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옆에 쌓인 자재를 무너뜨렸다.
와르르! 강 비서에게 자재가 쏟아졌고 그녀의 목소리도 파묻혔다.
피에 젖은 손을 감싸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출입구를 향해 뛰었다. 미리 눈여겨본 차단기를 아래로 내리자 일순간 모든 빛이 사라져 앞이 보이지 않았다.
“시발, 죽여버릴 거야!!”
쓰러진 강 비서가 악에 받쳐 소리쳤다. 자재를 마구 집어 던지는 소리에 심장이 왈칵 뛰었다. 서둘러 공장을 빠져나와 깜깜한 길을 무작정 내달렸다.
배가 무거웠지만 이를 악물고 달렸다. 권태범에게 도움은커녕 짐이 될 순 없었다. 그게 권태범의 목숨을 위협하는 거라면 더더욱.
적막한 길을 달리는데 멀리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점점 가까워져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나 허허벌판에서 숨을 곳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또다시 잡힐 수는 없어 이를 악물었지만 다가오는 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다.
끼익-
“시발, 잡히면 뒤졌어!!”
광둥어와 한국어가 섞인 욕설이 고요함을 일깨웠다. 뒤를 돌아보면 그녀의 서늘한 안광이 닿을 것 같았다.
“아흑….”
그 순간 배가 너무 아프게 당겨왔다. 배가 부른 몸으로 너무 많이 달려서 그런지 다리 사이도 얼얼하고 칼에 찔린 손바닥도 감각이 더뎌졌다.
이제…. 다 끝인 건가.
다리가 무거워서 발이 느려졌다. 눈물을 머금고 배를 붙잡는데 따라오는 소리가 지척에서 들렸다.
하… 권태범 보고 싶다. 할머니도… 그리고 운언동 아저씨들도 보고 싶었다.
호빵아, 아빠가 너무 미안해….
꿈에서 만난 호빵이가 떠올랐다. 작고 보송보송하고 따뜻한 아이. 호랑이 모습을 한 내 아이가 눈에 밟혔다.
“흑… 미안, 그래도 언제나 너랑 함께할 거야.”
눈물이 왈칵 터져 나왔다. 그때 우악스러운 손이 내 뒷머리를 잡았다.
“아!”
비명이 터졌다.
이젠 너무 지쳐… 힘들고… 아파….
그래도 우리 아기한테 너무 미안하네….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을 우리 호빵이한테 다 보여주고 싶었다. 아닌척하지만 가끔 호빵이의 방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는 권태범을 잘 알고 있었다. 잠든 내 배를 천천히 문지르며 호빵이에게 속삭이는 그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사랑한다고 많이 이야기할걸. 아니, 차라리 그때 권태범을 만나지 말걸.
‘안 돼…. 흑, 이대로 못 죽어!’
혼자 남겨질 권태범을 떠올리자 무슨 힘이 생겼는지 이대로 죽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힘들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는데 이대로 나와 호빵이를 보내고 혼자서 힘들어할 권태범을 상상하자 가슴이 죽을 만큼 아파 왔다.
권태범도 이렇게 아프게 할 순 없었다. 고작 저런 사람들 때문이라면 더더욱.
죽을 힘을 다해 내 머리채를 잡은 강 비서의 손목을 잡았다. 양손을 잡고 허리를 숙이자 강 비서의 손에서 우둑, 하는 소리가 나며 그녀가 나를 놓쳤다.
“악!”
강 비서의 비명이 터짐과 동시에 명치를 팔꿈치로 내리쳤다. 그녀가 나가떨어지며 나는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아… 하으….”
가쁜 숨을 고르며 강 비서와 남자들을 경계 어린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때, 차 한 대가 거친 흙모래 바람을 일으키며 달려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 차에 탄 사람이 권태범이라는 걸 알았다. 그 사실을 저들도 깨달았는지 다급히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잡히면 안 돼.’
전신에 기운이 없었지만, 젖먹던 힘까지 끄집어내 그들 사이를 잽싸게 빠져나갔다. 이쪽으로 달려오는 차를 향해 거침없이 뛰었고 뒤늦게 나를 발견한 권태범이 급히 차를 세우고 구르듯 내려 내게 달려왔다.
“차유원!”
“태범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