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82)화 (82/136)

#82

강 비서와 함께 유원이 호텔 밖으로 나선 것까지 확인한 태범은 곧장 그녀에게 닿을 수 있는 모든 연락을 취했다. 하지만 강 비서의 전화기는 꺼져 있었고, 유원의 전화기 또한 연락이 닿지 않았다.

유원이 사라짐과 동시에 강 비서의 신상 정 보를 대대적으로 재조사하기 시작했고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강 비서의 진짜 정체가 밝혀졌다.

“화룡 쪽에서 접근한 스파이 같습니다.”

“…이유는.”

태범은 이미 대강의 정황을 파악했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준석에게 물었다.

“이번 그룹 흡수 합병 건으로 앙심을 품고 조직적으로 움직인 것 같습니다. 황 비서가 사고 난 것도 다 그들의 계획이었고요. 미리 파악하지 못한 제 실책입니다. 죄송합니다.”

“하아….”

아니다. 이건 자신의 실책이었다. 강 비서를 마주할 때면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면서도 그냥 지나친 저의 문제였다. 태범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갈듯 손에 힘을 주며 차게 식은 머리를 굴렸다.

지금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머리가 잘 굴러가지 않았다. 유원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 곧바로 왕 회장 측에 협조를 요청했지만 그것만 믿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왕 회장 측에서 추가로 연락 온 건 없었나.”

“경찰에 협조 요청 허가가 났다고 합니다. 홍콩섬을 빠져나간 것까지 확인했다는데, 이후부턴 아무래도 추적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습니다.”

홍콩에서 발생한 일이라 태범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마카오 쪽 조직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뒤통수를 맞을 줄이야. 잘못된 방향을 목표로 움직인 탓에 유원을 찾는 일이 더뎌졌다.

혼자의 몸도 아닌 유원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태범은 상상만으로도 눈앞이 하얘지며 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유원이 미치도록 걱정되었다. 겁도 많고 눈물도 많은 유원인데 혼자 울고 있진 않을까. 자신 때문에 혼자서 그런 무서운 일을 당하게 했다는 사실에 죽고만 싶어졌다.

더 이상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던 태범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가서 유원의 작은 흔적이라도 찾고 싶었다. 어떠한 수단으로도 유원과 연락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부터 태범은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몸을 움직인 태범이 급히 밖으로 향했다.

“놔.”

“형님! 지금 어쩌시려고요.”

무조건 밖으로 나가려는 태범을 막아서며 준석이 울음을 삼켰다.

“제가,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형수님 찾아내겠습니다. 그러니까 형님, 제발!!”

그 순간 태범의 핸드폰 진동음이 길게 이어졌다. 갑작스러운 연락에 태범이 핸드폰을 꺼냈다. 혹시 유원에게서 온 연락은 아닐까 희망을 갖고 고개를 숙인 태범의 얼굴이 작게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그런 태범을 따라 고개를 숙인 준석은 화면에 가득 찬 사진에 눈을 질끈 감았다. 모두가 그것만은 아니길 바란 최악의 상황이 현실이 되어버렸다. 핸드폰 화면 속 쓰러진 유원의 모습을 눈에 담은 태범은 이를 꽉 깨물고 그 아래 적힌 메시지를 빠르게 읽었다.

[1시간 내로 여기 적힌 주소로 찾아올 것. 단 혼자서. 이 모든 걸 어길 시 네 남편과 아이의 목숨은 보장받을 수 없다.]

어색한 한국말로 적힌 문자와 함께 유원이 있는 장소가 적혀 있었다. 태범이 생각할 것도 없이 몸을 움직였다.

“형님! 안 됩니다!”

준석은 매달리듯 태범을 잡고 소리쳤다. 이대로 갔다간 태범의 안전도 보장받을 수 없었다. 이건 정말 스스로 죽으러 가는 꼴이었다.

“놔.”

“지금 대책도 없이 거길 가서 어쩌시려고요!”

“이거 놔, 박준석.”

태범은 살기 어린 페로몬까지 준석에게 내뿜으며 경고했다.

“형님, 이러다 정말 죽습니다! 죽는다고요!”

목에서 피 맛이 날 정도로 절규 어린 목소리로 준석이 소리쳤다. 태범이 혼자 그곳으로 간다면 그 끝은 틀림없이 그의 죽음뿐이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자신을 가로막으며 눈물을 흘리는 준석을 향해 태범이 말했다.

“차유원 없어도 죽어. 유원이가 없으면 살 이유가 없어, 이제.”

“형님….”

까만 가죽 장갑을 손에 낀 태범은 아무런 미련이 없는 얼굴로 준석을 밀어내고 발걸음을 내디뎠다.

***

“유원 님, 이제 그만 일어나 보실래요?”

나를 깨우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으… 머리 아파….

마지막으로 남자에게 머리를 맞은 기억이 떠올랐다. 허겁지겁 배를 확인하자 다행히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았다.

호빵이는 무사해. 다행이다…. 근데 여긴 또 어디야…?

눈을 찡그리며 주변을 살피자 아까 그 공장인 듯 기름 냄새가 옅게 느껴졌다. 강 비서가 내 앞에 앉아 비와 땀에 젖어 질척해진 내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어차피 이렇게 돌아올 거 뭐 하러 나갔어요, 고생만 했잖아요.”

“…….”

“홑몸도 아닌 사람이.”

담배를 입에 문 강 비서는 마치 나를 걱정했다는 듯 안타까운 얼굴로 미간을 찡그렸다. 강 비서가 입을 열 때마다 풍겨오는 담배 냄새에 속이 좋지 않았다. 담배 냄새를 피하는 척 눈을 굴려 보자 창고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강 비서님…. 저한테 진짜 왜 이러세요.”

대체 왜 권태범을 배신하고, 나를 이렇게 납치까지 하는 건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혹시 돈… 때문이에요? 그런 거라면 태범 씨한테 잘 말해 볼게요.”

“…….”

“아, 아니면 제가 뭘 잘 못했나요? 그런 거라면 이렇게 빌 테니까-, 아!”

“닥쳐요, 좀!”

갑자기 그녀가 버럭 소리쳐 흠칫 몸이 굳었다. 가면이 깨어지고 강 비서가 악귀같은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역시. 이것이 그녀의 본 모습이었다. 언제 나를 해칠지 몰라 두려움에 몸이 떨렸지만 이곳에서 헛되이 시간을 보낼 순 없었다. 나는 강 비서에게 보내 달라 소리치며 몸을 비틀었다.

“시발! 내가 유원 님, 유원 님, 하고 꼬박꼬박 존댓말 해주니까 이게 다 장난인 거 같고 우습지?”

바닥에 담배를 비벼 끈 강 비서가 벌떡 일어나 살기 어린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뭐? 돈이 필요하냐고? 아… 이거 웃긴 새끼네.”

“강 비서님….”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지금 니가 그렇게 보고 싶어 하는 권태범, 지금 여기로 오고 있으니까.”

“태범 씨가 여기를요? 그럼 태범 씨는 괜찮은 건가요? 네?”

역시 병원에 있다는 말은 모두 나를 속이기 위한 거짓이었나?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있었더라면 여기 오질 못할 텐데…. 역시 강 비서의 말은 거짓말이었어. 권태범이 무사해서 진짜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미약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것을 본 강 비서가 삐뚜름하게 웃으며 날 비웃었다.

“지금은 괜찮은 거 맞지. 곧 죽겠지만.”

강 비서는 칼을 꽉 쥐었다. 날카로운 칼끝이 공장 출입문을 향했다. 비릿하게 웃는 강 비서를 보자 다시금 초조함에 입술이 떨려왔다.

“…지금, 뭐라고.”

“권태범도 불쌍하지. 지 자식이 태어나는 것도 못 보고 죽을 텐데. 죽을 때 눈이 감기려나 몰라.”

“강… 비서님! 대체 왜 이러세요, 흑, 아…!”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나를 잡아 온 이유가. 나를 미끼로 그를 불러낸 이유가 권태범을 죽이기 위해서라니.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 왔다. 아까 맞은 곳이 잘못된 건지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며 날 바라보는 강 비서의 얼굴이 잘게 조각나기 시작했다.

“태범… 아… 아….”

“야, 너 왜 이래?”

갑자기 괴로워서 말을 제대로 내뱉지 못하자 강 비서가 불안에 차서 나를 툭툭 쳤다. 당황한 얼굴의 강 비서가 고개를 돌려 누군가를 급히 부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들이 내 쪽으로 다가왔고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그들 사이에서 오고 갔다.

그 모습을 끝으로 머리가 고장 난 사람처럼 아무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눈이 저절로 감겼다. 그리고 새까만 머릿속으로 이상한 기억이 하나, 둘 산발적으로 떠올랐다.

‘아빠… 엄마….’

지금보다 훨씬 어린 차유원의 기억이었다. 초등학생이나 되었을까 싶을 정도로 어린 나, ‘차유원’은 상복을 입고 울먹이고 있었다.

‘차유원의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의 기억인가?’

검은색 상복을 입고 바닥에 엎드려 우는데 나조차도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례식장 안으로 무거운 얼굴을 한 어른들이 들어와 차유원의 앞에 멈춰 섰다.

‘네가 유원이구나.’

어린 차유원은 처음 보는 어른들을 올려보며 할머니의 뒤에 숨었다. 그리곤 빼꼼 고개를 내밀어 어른들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이번 사고는 조용히 넘어가기로 했습니다. 어린아이가 안타까워 회장님께서 결정하신 일이니 부디 올바른 사람으로 잘 키워주세요.’

그들은 그 말과 함께 할머니한테 하얀 봉투를 건네고 사라졌다. 사람들이 떠나가자 할머니는 차유원을 끌어안고 펑펑 눈물을 흘리셨다.

대체 저 사람들은 누구일까.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린 차유원은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어릴 때도 잘 웃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점점 나이를 먹어가면서부터 차유원은 굉장히 내성적이고 어두운 사람이 되었다.

‘야, 너 부모님 없다며? 고아 새끼네-’

‘생긴 건 좀 예쁘장하게 생겼는데. 설마 오메가로 발현되는 거 아니냐?’

질 나쁘게 생긴 남자들이 차유원을 둘러싸고 가느다란 목선을 어루만졌다. 정제되지 않은 저급한 말을 내뱉으며 낄낄거리는 모습에 차유원은 죽고 싶을 만큼 수치스러웠다.

‘야. 앞으로 자주 보자?’

훅, 얼굴을 들이밀고 차유원의 옷깃을 잡아당기는 남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 차유원의 일기장에 적힌 놈들인가 싶어 붙잡아보려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차유원의 학창시절은 처절하리만큼 우울하고 문드러진 비탈길을 내려가는 것처럼 씁쓸해졌다.

차유원은 매일, 밤낮으로 혼자 울음을 삼키며 학교를 오고 갔다. 그러다 장면이 갑자기 바뀌었다.

‘형,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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