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태범은 일정을 모두 끝마치고 호텔로 향했다. 조금 전 붉게 물든 얼굴로 저를 유혹하던 유원을 떠올리자 입매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내일 일정은 모두 제 선에서 해결하겠습니다. 일요일까진 유원 님이랑 좋은 시간 보내세요, 형님.”
“그래. 수고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동안 골머리를 썩이던 랜드마크 건설 건도 잘 해결되었고, 화룡 그룹과의 흡수 합병도 차근차근 절차를 밟고 있었다.
“그리고 생신 미리 축하드립니다.”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네. 올해도 모르셨습니까?”
준석은 지난 며칠간 유원이 주방을 맡은 수광에게서 미역국 끓이는 방법을 배웠다는 걸 미리 보고를 받아 알고 있었지만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올해는 형수님이 계시니까 좋으시겠어요.”
“차유원은 존재만으로도 그러니까.”
1년이 채 되지 않아 정말 많은 것이 바뀐 태범이었다. 준석은 어둡기 그지없었던 지난 몇 년을 떠올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보세요.”
태범이 전화를 받았고 준석은 백미러로 힐끔 그를 확인했다. 유원의 얘기를 하면서 입가에 남았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전화기를 잡은 태범이 손에 힘이 들어가며 굳은 얼굴의 그가 절망 섞인 눈으로 준석을 바라보았다.
“차 돌려.”
***
“흡… 흐, 어떡, 어떡해….”
아무도 없는 공장에 갇혀 눈물이 흘렀다. 손발이 묶인 다리는 아파왔고 좁고 공기가 탁한 창고는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았다. 강 비서가 배신을 하리라곤 정말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가끔 권태범의 회사에 갈 때마다 누구보다 따뜻하고 밝게 인사하던 그녀였다. 배신감과 더불어 권태범이 다쳤다는 말이 사실일지 아닐지 그것이 가장 걱정되었다. 차라리 그 얘기가 모두 거짓이라면 좋을 텐데, 강 비서는 마지막까지 내 질문에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흑, 거기… 누구 없어요? 흣, 여기 사람 있어요. 제발….”
한국도 아니고 언어가 통하지 않은 해외에 와서 이런 일이 생기고 말았다. 긴장감에 아까부터 배가 조금씩 뭉쳐왔다. 몸을 웅크리고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천천히 호흡을 정리하며 권태범에게 배웠던 내용을 하나, 둘 떠올렸다. 다행인 점은 손이 앞으로 묶여있다는 것이었다. 우선 벽에 기대 몸을 일으키고 손을 높게 올렸다.
그런 다음 팔을 앞으로 뻗어 아래로 내리며 팔꿈치를 넓게 벌렸다. 그러자 정말 꽉 묶여있던 테이프가 우두둑 소리를 내며 조금씩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더 방금 했던 동작을 반복했다.
“돼, 됐다….”
테이프가 완전히 두 갈래로 찢어지며 드디어 손이 자유로워졌다. 뒤늦은 안도감에 한숨을 내쉬며 묶여있는 발을 풀었다. 저린 팔다리에 입술을 질끈 깨물고 가장 먼저 배를 쓰다듬었다.
“호빵아, 이제 괜찮아, 아빠는 금방 여기에서 나갈 거니까 걱정하지 마.”
조용히 호빵이를 안심시키고 벽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이제 여길 빠져나가야 해.”
우수수 쏟아지던 빗소리가 점차 잦아들고 어두웠던 창문 사이로 달빛이 스며들었다. 어느 정도 어둠에 익숙해진 눈을 이리저리 굴려 벽을 더듬더듬 짚고 움직였다. 손끝에 뭉툭한 것이 닿았다. 그것을 누르자 작은 창고 불이 환하게 켜졌다.
강 비서가 불이 켜진 것을 눈치채기 전에 서둘러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아무리 소리치고 문밖의 상황에 귀를 기울여도 인기척 하나 없었고, 아까 강 비서가 탄 차가 이곳을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으니 이곳에 아무도 없는 건 확실했다. 심호흡을 한 뒤 창고 안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하… 이런 곳을 잘도 찾았네.
온 사방이 막다른 길로 가로막혀 있었다. 입구는 단단히 닫혀 있었으며 나머지는 커다란 시멘트 통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일단 소매를 걷어붙이고 시멘트 통을 조금씩 옮겼다.
“하, 씨… 여기서 나가기만 해 봐.”
그동안 싸준 김밥이며 야식이며 다 받아내고 말 거야. 임산부한테 이래도 돼?
끙끙 시멘트 통을 굴리며 속으로 강 비서를 잘근잘근 씹었다. 이런 장소에 자신을 데려다 놓은 걸 보면 충동적으로 한 일이 아니었다. 혹시 권태범을 좋아하나?
원작을 거스르고 권태범 옆을 차지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 줄 강 비서 네가 알기나 해?
갑자기 열이 뻗쳐 힘이 솟아났다. 배 속에 있는 호빵이도 나를 응원하는 건지 발을 두 번 정도 빵빵 치며 의견을 표현했다.
“그래 호빵아, 얼른 아빠한테 가자.”
마지막으로 남은 힘을 쏟아부어 시멘트 통을 밀어냈다.
탕.
시멘트 통을 벽 쪽으로 밀어낸 후 이마에 맺힌 땀을 소매로 닦았다.
“하… 됐다. 제발, 제발 열려있어라.”
바닥에 쌓인 부자재를 밟고 시멘트 통 위로 올라섰다. 생각보다 높은 위치에 심장이 떨렸다. 아래를 향하던 시선을 옮겨 창문을 밀자 창문이 스르륵 열리기 시작했다. 창문까지 닫을 생각은 하지 못했나보다. 조심스럽게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주위를 살폈다.
“앗, 차가….”
아직 비가 완전히 그친 건 아닌지 얼굴 위로 차가운 빗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생각보다 바닥과의 거리가 꽤 멀었다. 발을 잘못 디뎠다간 큰일 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하… 씨…. 어쩌지.”
결단을 내려야하는 순간인데 이게 마음처럼 쉽게 되지 않았다. 점점 빗물에 젖어가는 얼굴을 닦아내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호빵아. 우린 할 수 있어.”
하지만 혹시 모를 일에 재킷을 벗고 배를 둘둘 감쌌다. 최대한 배에 타격이 가지 않게 감싸 안으며 아래를 향해 뛰어내렸다.
“윽, 하… 됐다….”
다행히 머릿속으로 떠올렸던 최악의 상황은 오지 않았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무릎이 살짝 욱신거리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역시 젊은 게 최고인 건가.
“호빵아, 아빠 성공했어!”
다행히 배도 아프진 않았다. 아기집이 커지느라 가끔 욱신거리긴 했지만 호빵이도 비교적 얌전했다. 하지만 아직도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누가 오기 전 걸음을 재촉했다.
‘하… 여기가 어디야, 진짜.’
가장 위험한 순간에서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그다음도 문제였다. 주변은 가로등 하나 없이 어두웠고,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여전히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일단 경찰서나 사람이 보이면 무조건 도와달라고 하자. 그나마 영어가 통하는 나라니까 다행인 건가.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는 생각에 눈을 부릅뜨고 걸음을 옮겼다.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창고에서 멀리 도망쳤다. 강 비서가 정말 나를 두고 어디로 가버린 건지 생각보다 쉽게 도망칠 수 있었다.
다리가 뻐근했다. 이렇게까지 오래 걸어본 게 너무 오랜만이라 지치고 힘이 들었다. 권태범이 무사한지 알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오로지 그 일념 하나로 모든 고통을 견디며 걸음을 재촉했다. 한참을 걷고 걷자 곧이어 큰 도로가 나왔다. 두 갈래로 나뉜 길에 어떻게 할까 고민한 끝에 길가에 있는 꽃을 뜯었다.
“그래, 인생은 운이야, 차유원.”
꽃잎을 하나씩 떼어 꽃 점을 보았다. 그 결과에 따라 오른쪽으로 꺾어 또 한참을 걸었다. 저 멀리 보이는 불빛에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아! 다행이다.”
눈 앞에 펼쳐진 사람의 흔적에 활짝 웃으며 젖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차가 없는 틈을 타 길을 건너며 불이 켜진 건물로 방향을 틀었을 때였다.
끼익-
불길한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본능적으로 배를 감싸며 눈을 감았다.
“흡!”
몸을 덮쳐오는 알파의 페로몬에 무릎이 꺾였다. 권태범에게서 느껴지던 향이 아니었다. 강압적으로 몸을 누르고 위협하려는 드는 분위기가 피부 위로 느껴져 호흡이 가빠졌다.
“내가 얌전히 있으라고 했잖아요, 유원 님.”
멈춰 선 차에서 내린 강 비서가 싸늘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강 비서 옆으로 처음 보는 얼굴의 남자들도 내게 다가왔다. 그들의 시선이 닿은 곳이 따끔거렸다.
“하… 잠깐 다녀온 사이에 이렇게 뒤통수를 치고 도망가면, 나도 약속을 지키고 싶어지지 않는데 말이죠.”
강 비서의 시선이 배에 닿았다. 나는 급히 배를 감싸 안고 강 비서에게 애원했다.
“강 비서님. 제가, 제발, 저 좀 한 번만 보내주세요… 네?”
강 비서는 나를 벌레 보듯 내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여기서 부탁할만한 사람은 강 비서밖에 없었다. 당장이라도 그녀의 발을 핥을 수 있다는 듯 고개를 조아렸다.
“흑, 태범 씨한테 가야 해요, 제발 저 그 사람한테 가야 해요… 네? 제발 한 번만.”
“그렇게 만나고 싶어요?”
강 비서의 말에 희망의 불씨가 다시 화르륵 불타올랐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요, 그럼 만나게 해줄게.”
하지만 활짝 웃는 그녀의 얼굴이 너무나 무서웠다. 내가 이상한 기시감에 미간을 찌푸리자 고개를 돌린 강 비서가 남자들을 향해 광둥어로 말을 전했다. 그녀가 나를 향해 턱짓을 하자 남자 한 명이 내 앞으로 불쑥 다가왔다.
“강… 비서님…?”
그 말과 함께 머리 위로 둔탁한 고통이 느껴졌다.
“하윽- 으흐….”
“한숨 자고 일어나요. 그럼 재밌는 일이 있을 거야.”
이러면 안 되는데… 태범 씨를 만나야 하는데…. 우리 아가, 아가야….
눈앞이 불투명한 빛으로 물들며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찬 바닥에 쓰러진 몸이 남자들에게 들려 짐짝처럼 차에 실리는 것을 끝으로 두 눈이 스르륵 감겼다.
그렇게 모든 것이 암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