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80)화 (80/136)

#80

띵-

내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에 오른 권태범의 얼굴을 힐끔 올려다보며 입을 다물었다. 굳이 말하고 싶지 않은 거면 꼬치꼬치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그가 위험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서 가끔 숨이 막힐 듯 걱정스러웠지만 현재는 그냥 이 순간을 즐기고 싶었다.

[어서 오세요, 두 분이신가요?]

[네.]

[자리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식사를 위해 우선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자연스럽게 영어로 직원과 대화하는 권태범의 모습이 엄청나게 섹시했다. 침을 꼴깍 넘기며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자 권태범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태범 씨….”

권태범의 손바닥을 손가락으로 간질거렸다. 무언가 내가 말하려는 의도를 알아차렸으려나? 자중…. 크흠, 자중하긴 해야지만 ‘모처럼 해외까지 왔는데 신혼인 우리가 자중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희 이따 그거 해요.”

까치발을 들어 그의 귓가에 속삭이자 권태범의 눈빛이 일렁였다.

“그… 그거 비슷한 거 말고, 그거요.”

권태범과 나의 끝은 항상 손장난이 전부였다. 사실 여기 오기 전 의사 선생님한테도 물어봤고 나도 만반의 준비를 했으니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

“그런 얘기는 여기 오기 전에 하지 그랬어.”

권태범은 자꾸만 계속되는 내 유혹에 꽉 조인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풀며 한쪽 눈을 찡그렸다.

“히히. 알겠으면 이따 일찍 와야 해요?”

“그래.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래야겠네.”

권태범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떡였다. 그의 턱이 단단하게 굳어있었다. 자리를 안내하는 직원을 따라 걸으며 작게 키득거렸다. 권태범은 내가 먹고 싶다고 했던 딤섬도 주문하고 그 외에도 다양한 음식을 주문했다.

[일행이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습니다. 모든 음식에 복숭아는 빼주시고 무알코올 샴페인도 한 잔만 부탁드립니다.]

[트라우벤사푸트 레드 유기농 무알코올 스파클링을 제일 많이들 찾으시는데 이걸로 준비해드리면 될까요?]

[네,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음식이 나오는 대로 준비해드리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사라진 직원을 뒤로하고 나는 한눈에 들어오는 홍콩의 스카이라인을 바라보았다.

“야경은 더 예쁠 거 같아요.”

“저녁에도 여기 올까?”

“우리 저녁에 바쁠걸요?”

내가 배시시 웃자 권태범도 그런 나를 따라 작게 웃었다. 여기서 먹는 것 대신 룸서비스로 스테이크를 사달라고 해야지. 창밖을 한참을 구경하다 보니 음식이 나왔다.

“안에 육즙이 뜨거우니까 일단 식혀줄게.”

내가 곧장 새우가 박혀있는 딤섬을 집으려 들자 그가 그런 나를 말리며 딤섬 몸통 부분을 살짝 찢었다. 움푹 파인 숟가락 위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육즙이 터져 나왔다. 권태범이 그 위로 절인 생강을 올려주었다.

“뜨거우니까 조심해서 먹어.”

“잘 먹겠습니다.”

후후 불어 딤섬을 한입에 넣자 생경한 맛이 느껴졌다. 텔레비전에서 봤을 땐 그냥 만두랑 비슷할 거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보단 조금 더 이국적인 향이 느껴졌다. 향신료 때문인지 독특한 맛이 났지만 내 입맛엔 맞았다.

“맛있어?”

“네! 하나 더 주세요.”

어미 새를 기다리는 제비 새끼처럼 권태범이 주는 음식을 받아먹었다. 권태범은 내 앞에 소고기 볶음밥이나 새우 완탕면도 덜어주다 뒤늦게 직원이 가지고 온 샴페인을 내밀었다.

“무알코올이니까 기분만 내라고. 짠할까?”

“네, 짠!”

“짠.”

그와 함께 잔을 부딪히자 쨍-하고 맑은 소리가 우리 앞에 작게 울려 퍼졌다.

***

“흐음…. 딱 하나만 더 먹을까…?”

괜히 아무도 없는 방 안을 두리번거리며 혼자 양심에 찔려 했다. 권태범은 나가기 전에 페로몬을 잔뜩 퍼부어주곤 종이봉투 하나를 건네주었다.

“돌아와서 세어 본다고 했는데.”

그렇게 열심히 화이팅까지 외쳤는데 그럴 수 야 없지. 결국 침을 꿀꺽 삼키며 상자를 다시 닫았다. 일부러 눈앞에 있으면 먹고 싶을까 봐 멀찍이 떨어진 테이블에 올려두고 침대로 돌아왔다.

“흠… 자. 태범 씨도 나갔고 슬슬 준비해볼까?”

사실 내일은 권태범의 생일이었다. 내일 아침에 권태범 모르게 미역국을 끓이는 건 어려울 거 같아 오늘 그가 밖에 나가면 끓이려고 한국에서부터 미역국 재료를 준비를 해왔다. 권태범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에 서둘러 가방 문을 활짝 열고 재료를 꺼냈다.

“어휴… 태범 씨 몰래 가져오느라 죽는 줄 알았네.”

옷 사이에 숨겨놓았던 미역국 재료를 하나씩 꺼냈다. 아까 호텔로 들어올 때 캐리어에서 바스락 소리가 나 진땀을 흘렸다. 그래도 눈치를 못 챈 것 같아 다행이었다. 지난 며칠 동안 주방장 아저씨한테 특별 훈련을 받긴 했는데 막상 혼자서 끓이려고 하니 긴장이 되었다.

“아니야, 실수만 하지 말자. 정 모르겠으면 주방장 아저씨한테 전화하면 되니까.”

메모장을 꺼내 미역국 레시피를 하나씩 읽으며 주방에 있는 냄비를 꺼냈다. 미역을 한 움큼 집어 물에 불리고, 아까 벗어놓은 재킷을 집었다.

“설마 비는 안 오겠지?”

오늘 저녁에 비가 온다고 했지만 아직 하늘이 시커멓진 않았다. 어차피 호텔 근처 베이커리에만 다녀오면 되는 거니까. 생일날에 생일 케이크를 빼놓을 수 없었다. 내가 먹고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본래 목적은 권태범의 생일 케이크이다.

아버님이 주신 카드를 꼭 쥐고 호텔 방을 나섰다. 권태범 몰래 돈을 쓸 일이 있을 때마다 자주 애용하는 카드였다. 이럴 때만큼은 아버님의 카드가 정말 유용했다.

“어…? 강 비서님?”

재킷을 걸치고 문을 열자 그동안 권태범의 회사를 오고 가다 눈에 익은 얼굴이 보였다. 홍콩 출장에 강 비서님도 같이 오신 건가? 근데 여긴 어쩐 일로….

“여긴 무슨 일-”

“유원 님, 지금 권 전무님께서…!”

다급하게 말을 꺼낸 강 비서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 얼굴을 보며 갑자기 심장이 쿡쿡 쑤셔오기 시작했다. 소설 속 내용이 모두 나 때문에 바뀐 줄 알았는데. 설마…. 권태범이 다쳤다는 소설 내용이 눈앞에 그려졌다. 누군가 내 심장을 도려내는 것처럼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유원 님! 괜찮으십니까!”

갑자기 온몸에 힘이 풀렸다. 휘청거리는 다리에 급히 벽을 짚고 숨을 헐떡이자 강 비서가 그런 나를 부축해주었다.

“저는 괜찮아요. 근데 우리 태범 씨는요…?”

“……그게.”

지금 내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 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머뭇거리는 강 비서를 재촉했다.

“태, 태범 씨는요. 태범 씨한테 무슨 일이라도….”

“죄송합니다. 일정을 수행하시다가 그만… 전무님은 지금 근처 병원에서 응급 수술을 받고 계십니다.”

“어, 어떡, 윽….”

결국 예상했던 대로 닥친 현실에 배가 뭉쳐오며 손발이 달달 떨렸다.

“유원 님!”

“흑… 괜찮아요. 빨리… 빨리 태범 씨한테… 가주세요.”

힘을 풀면 바로 정신을 잃을 것 같았지만 이러는 순간마저도 시간이 아까웠다. 발끝에 힘을 꽉 주고 강 비서를 따라갔다. 서둘러 그에게 가고 싶었다. 배가 너무 아프고 머리가 무거웠지만 그를 만나는 게 모든 일의 우선이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강 비서를 따라 차에 타서 빠른 속도로 호텔을 빠져나갔다. 어느새 창밖으로 투둑투둑, 굵은 소나기가 내려 하늘이 뿌옇게 흐려졌다. 빠르게 도시를 빠져나와 고속도로로 진입한 차가 한적한 곳에 들어섰다.

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하는 동안 권태범과 아저씨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쪽 상황이 그만큼 정신없다는 방증이었다.

“강, 강 비서님. 얼마나 더 가야 하나요?”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아무리 달려도 보이지 않는 병원에 입술이 마르고 마음이 초조해졌다. 다리를 달달 떨며 창밖을 내다보자 건물도 몇 개 없고 인적이 드문 것 같았다. 최근 급격한 속도로 개발되기 시작한 구역에 새 랜드마크를 짓는다던데. 여기가 그 도시인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곳에 병원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결국 조심스럽게 입을 떼어내며 강 비서에게 물었다.

“강 비서님? 저희 병원 가는 거 아니었어요? 여긴 대체 어디-”

“아, 시발, 더럽게 시끄럽네.”

“…네?”

순간 내가 잘못 들었나? 눈을 두어 번 깜빡거렸다. 방금 강 비서님이 뭐라고 하신 거지? 너무 충격을 받은 머리가 강 비서의 말을 잘 못 받아들인 것 같았다. 때마침 차가 멈춰 서며 강 비서가 운전석에서 내렸다.

“내려.”

“가, 강 비서님…?”

운전석에서 내려 뒷문을 연 강 비서의 얼굴이 두 눈에 들어왔다. 평소와 다르게 딱딱한 강 비서의 얼굴을 보자 무언가 확실히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보면 언제나 부드럽게 웃어주던 강 비서는 어디로 가고 지금 그녀의 얼굴은 무미건조 그 자체였다.

“내리라고.”

“윽-”

강 비서는 내 머리카락을 낚아챘고 강한 힘으로 나를 잡아당겼다.

“강 비서님, 왜 이러세요….”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자 강 비서가 질 나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지금도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보죠? 그럼 유원 님이 알아들을 수 있게 한마디만 할게요.”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내게 말하는 강 비서님의 모습은 평소에 내가 봐왔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곧이어 부드럽게 휘어졌던 눈매가 싸늘하게 굳으며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에 내리꽂혔다.

“네 배 속에 있는 그 애새끼 살리고 싶으면, 얌전히 입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해.”

선명하게 분노를 품은 강 비서의 눈이 내 배를 가리켰다. 그녀의 얼굴 위로 묘한 쾌감과 함께 기분 나쁜 미소가 스며들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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