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79)화 (79/136)

#79

“주말이면 괜찮을 거 같아요!”

그동안 정신없이 병원과 학원을 오가며 지낸 결과, 시간이 훌쩍 흘러 여름도 어느새 끝이 보이고 있었다.

그동안 열심히 학원 진도도 따라잡고, 호빵이도 무럭무럭 잘 자라고 평화로운 시간의 연속이었다.

“그래. 간 김에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차유원 좋아하는 것도 많이 하자.”

“네! 좋아요.”

아버님은 호빵이의 성별을 알게 되신 후로 거의 매일같이 선물을 보내 주셨다. 학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아버님이 보내주신 선물을 정리하는 게 일과가 되었다. 테이블 위로 높게 쌓인 선물을 하나씩 뜯으며 태범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 이것도 너무 귀엽다. 호랑이 모자네요.”

이런 걸 어디서 구하셨담.

불어로 쓰여있는 걸 보니 이번에 프랑스로 여행가셨다가 사 오신 듯했다. 손바닥만 한 모자를 구경하며 다음 선물을 뜯어보는데 다리에 쥐가 남과 동시에 화장실이 가고 싶어졌다.

“으… 태범 씨 저 좀.”

시간이 많이 흐른 만큼 어느새 배도 부쩍 많이 나왔다. 남성체 알파의 아이는 일반 베타의 아이보다 성장 속도가 빠르다고는 들었지만, 하루가 멀다하고 불러오는 배는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 외에도 다리가 수시로 저리기도 하고, 화장실 가는 횟수도 많이 늘어났다. 일어나는 게 불편해 그를 향해 손을 뻗자 권태범이 나를 번쩍 안아 들고 화장실로 데려갔다.

“이, 이제 됐어요….”

아무리 혼인신고까지 마친 사이라도 생리 현상까지 보여주는 건 곤란했다. 나를 변기에 내려주고 나갈 생각이 없는 그의 허벅지를 손으로 밀어내자 작게 웃은 그가 알겠다고 하곤 화장실을 나갔다.

“진짜 그냥 가라니까요.”

그런데도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래서 마음 편히 화장실도 못 간다니까.

“걷기 힘들잖아.”

“아직 20주차인데 33주차 때는 어떡하려고 그래요?”

“그땐 더 많이 안아줘야지.”

“엄청 무거울 텐데?”

“그러라고 하는 운동인데 뭐.”

권태범은 여전히 나를 번쩍번쩍 안으며 그와 나의 침실로 향했다. 익숙하게 내 옷을 벗기고 목욕까지 시켜준 다음 침대에 내려놓은 권태범은 곧바로 튼살 크림을 가져왔다.

“저 이거 싫은데….”

“장난 안 칠게.”

“맨날 말로만 그러잖아요.”

배가 나오기 시작하고 나서부터 권태범이 내 배나 허벅지 같은 곳에 튼살 크림을 발라주었다. 처음에는 마사지도 받는 것 같고 좋았지만 자꾸만 예민한 곳을 톡톡 건드는 탓에 매번 몸이 민감해졌다.

“이번에는 정말 장난치지 말아요….”

그리고 결국 손장난으로 끝까지 갔던 어젯밤을 떠올리며 고개를 마구 저었다.

“알겠어. 힘 풀고 누워.”

익숙하게 내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손바닥에 크림을 짜는 그를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곧이어 질척한 크림과 함께 권태범의 손이 내 배에 닿았다. 그가 마사지하듯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때….

“아!”

호빵이가 권태범의 손이 닿은 곳을 발로 빵 하고 찼다.

“호빵이 아직 안 잤어?”

“근데 아빠 배를 그렇게 막 차면 안 되지. 아빠 힘들어하잖아.”

부드럽지만 나지막하게 말하는 권태범의 목소리에 호빵이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잠잠해졌다. 호빵이는 정말 신기하리만큼 우리의 말을 알아듣는 것 같았다. 나는 호빵이가 다시 잠들세라 얼른 입 밖으로 소리 내어 호빵이한테 말했다.

“조, 조금 놀라긴 했는데 아빠는 괜찮아. 신나게 놀아, 호빵아.”

처음에 태동을 느꼈을 때 너무 무서워서 울었던 게 생각났다. 그날따라 몸이 무거워서 침대에 누워 영어 단어를 외우고 있었는데 누가 배를 톡톡 두드리는 느낌이 났었다.

설마 하고 배 위에 손을 올려두자 호빵이가 다시 그곳을 툭 하고 건드렸었다. 호빵이와의 첫 교감에 무서워서 울었던 것도 잠시 너무 신기하고 감격스러워서 울음을 그쳤었다.

권태범도 정말 많이 놀랐었지. 그때가 생각나서 내가 키득거리자 권태범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르고 나를 따라 웃었다.

***

“유원아. 이젠 진짜 일어나야지.”

“으응…. 피곤해요…. 5분 만… 더.”

“그 말만 벌써 3번째인데.”

태범은 유원의 눈두덩이 위에 입을 맞추고 반쯤 억지로 그를 일으켰다.

“얼른 세수랑 양치만 하고 다시 자자.”

유원을 품에 안아 든 태범은 욕조 팔걸이에 그를 앉혀놓고 익숙한 손길로 세수를 시켜주었다. 자신이 해주는 대로 얌전히 눈을 감고 있는 모습에 태범의 손길이 더 부드러워졌다. 유원을 모두 씻기고 밖으로 데리고 나온 태범은 핸드폰으로 날씨를 검색했다.

“요즘 홍콩 날씨는 어떠려나.”

사업 진행 확인차 홍콩에 방문하기로 한 태범을 따라 유원도 홍콩에 가기로 했다. 그는 날씨를 확인하고는 유원에게 반팔을 입히고 얇은 셔츠도 하나 따로 챙기기 위해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아직도 자네.”

셔츠를 꺼내오는 동안 유원은 그새 잠들어 있었다. 태범은 익숙하게 그를 추슬러 안아 침실을 빠져나왔다.

“형님, 황 비서가 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합니다.”

한 손엔 캐리어와 다른 한 손은 유원을 안고 나온 태범은 갑작스러운 사고 소식에 고개를 돌렸다.

“몸은 어때. 많이 다친 건가.”

“오토바이와 살짝 부딪힌 거라 다리 인대가 조금 늘어난 게 전부라고 합니다.”

“다행이군. 그럼 황 비서 대신 갈만한 인력이 있나?”

이미 공사가 시작된 상황이라 딱히 통역이 필요한 일은 없었지만 중간에 현장 방문 일정이 있었다. 태범은 없으면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준석을 바라보며 물었다.

“다행히 강 비서가 광둥어를 할 줄 알아 동행하기로 했습니다.”

“그래. 알겠어.”

“네, 그럼 이제 출발하겠습니다.”

준석은 유원을 안은 태범 대신 캐리어를 차에 실었다. 그리고 자신도 서둘러 운전석에 오른 뒤 인천 공항으로 차를 몰았다.

역시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공항으로 가는 고속도로는 유독 한산했다. 어제저녁 여행을 간다는 생각에 늦게까지 잠을 못 이룬 유원은 여전히 태범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었다.

결국 입국 수속 전까지 잠을 깨지 못한 유원은 비몽사몽 한 얼굴로 비행기에 탑승해 홍콩국제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단잠을 이루었다.

***

“헉, 여기가 어디예요.”

눈을 뜨자마자 눈 앞에 펼쳐진 이국적인 광경에 잠이 확 깼다. 익숙한 한글 간판은 어디로 가고 한자와 영어로 뒤섞인 간판이 거리에 가득했다.

“이미 홍콩에 도착했고 이제 호텔로 가는 중이야.”

“진짜요? 나 깨우지….”

바다를 건너 다른 나라에 올 때까지 그냥 쿨쿨 잤다는 생각에 너무 민망했다. 그러자 권태범이 이미 몇 번이나 깨웠는지 아느냐고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호, 호빵이가 피곤했나 봐요.”

근데 이건 사실인 부분이기도 했다. 내가 많이 들떴긴 했지만 호빵이도 들뜨는지 배를 자꾸만 차셔 잠을 쉽게 이룰 수 없었다. 그걸 권태범도 알면서. 괜히 입술을 삐죽 내밀자 그가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그래, 알겠어. 배는 안 고파? 체크인만 하고 바로 밥 먹으러 가자.”

“좋아요. 태범 씨 근데, 저 에그타르트도 먹고 싶고 그때 태범 씨가 사 왔던 제디 쿠키도 먹고 싶어요!”

“그건 밥이 아닌데.”

내겐 주식으로 쳐도 괜찮았는데 권태범의 눈엔 턱도 없었다. 결국 그럼 ‘딤섬도…’라고 말을 추가하자 그의 눈빛이 조금 풀어졌다. 임당 검사나 다른 산전 검사에서 모두 정상이라고 했는데 권태범은 여전히 철두철미하게 내 몸 상태를 관리했다.

‘뭐, 그만큼 나를 신경 써준다는 거니까.’

입꼬리가 씰룩거려 괜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한국과는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풍경에 정말 홍콩에 왔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그간 몇 번이나 올 기회가 있었음에도 처음에는 권태범한테서 도망가느라, 그다음엔 학원 진도를 따라잡느라 바빠서 오지 못했었다. 창문을 살짝 내리자 습한 공기가 이마에 닿으며 홍콩의 여름 날씨가 피부로 느껴졌다.

“이따 저녁에 비 온대. 그래서 조금 습할 거야.”

“괜찮아요. 어차피 오늘은 호텔에만 있을 거 아니에요?”

“응. 차유원이 가고 싶은 에이랜드는 내일 가자. 오늘은 잠깐 현장에 다녀와야 할 거 같아.”

그럼 권태범이 없는 동안 에그타르트랑 제디 쿠키 먹으면서 기다리면 되겠다 싶었다. 내 그런 생각이 표정에서 드러나는지 권태범이 당부했다.

“몇 개 먹었는지 다녀와서 세어볼 거야.”

“완전 치사해!”

“치사해도 어쩔 수 없어.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 조금만 참자.”

권태범은 내 입술에 입을 맞추며 나를 달랬다. 생각보다 임신하고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먹는 거에 제약이 있다는 점 하나만큼은 너무 힘들었다. 입덧을 할 때 거의 주식처럼 먹었던 스테비아 토마토는 이제 보기만 해도 질렸다.

설탕 없는 핫도그를 먹는 것도 핫도그한테 너무 잘못하는 거 같아서 마음도 불편했다. 캐러멜이 잔뜩 코팅된 팝콘도 먹고 싶고, 무설탕 아이스크림 말고 혀를 녹일 것 같은 초콜릿 아이스크림도 먹고 싶었다.

“알겠어요….”

“착하다, 내 남편.”

그래도 우리 호빵이를 위해서라면 앞으로 남은 3개월 정도는 참을 수 있을 거 같기도 했다. 핸드폰 케이스에 넣어둔 호빵이의 정밀 초음파 사진을 보고 열의를 다졌다.

“화이팅!!”

“그래, 화이팅.”

권태범과 함께 화이팅을 외치며 달린 차는 도심 한가운데에 있는 호텔로 들어갔다. 호텔에 들어가 물 흐르듯 체크인을 마치고 태범은 준석을 보며 말했다.

“이따 3시에 로비에서 만나지.”

“네, 알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준석이 로비를 빠져나갔다.

“준석 아저씨랑 다른 아저씨들은요?”

“걔넨 따로 마무리 지을 일이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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