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78)화 (78/136)

#78

‘뭐 어쩌겠어.’ 싶은 마음에 어깨를 으쓱이며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그 길로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0교시 시간이 다가와서 그런지 다른 사람들도 우르르 엘리베이터에 탔다. 하지만 그들 중에도 이준 형은 없었다. 그만뒀나 싶은 마음에 시무룩해진 얼굴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아,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보는 원장 선생님과 두 눈이 마주치자 민망해 죽을 것 같았다.

“어서 와요, 유원 학생. 오랜만이네요.”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자 원장 선생님이 따뜻한 얼굴로 내 손을 잡으며 화이팅 넘치게 말했다.

“오늘부터 저희 학원과 함께 열심히 해봅시다! 아직 5월이니 충분히 가능성 있어요!”

“가, 감사합니다. 정말 열심히 할게요.”

열의가 넘치는 선생님의 목소리에 내가 다 힘이 났다. 선생님의 손을 마주 잡고 열심히 고개를 끄떡이자 선생님이 메모지 하나를 건넸다.

“어제까지 나간 수업 진도를 과목별로 적어둔 거예요. 1교시 국어는 수능 특강 242페이지부터 하면 됩니다.”

“아….”

순간 먼저 나간 진도를 따라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네, 감사합니다.”

국어 이외에도 영어와 수학, 탐구 과목까지…. 이미 진도는 절반 정도 지나가 있었다.

“그럼 오늘도 화이팅!”

“화, 화이팅….”

원장 선생님의 응원을 뒤로하고 터덜터덜 강의실로 향했다.

“아, 이준이 형 아직 다니고 있는지 물어볼걸.”

늘 일찍 오던 이준의 자리가 비어있는 걸 보면 아무래도 그만둔 것 같았다. 너무 아쉬웠다.

임신을 하고 나서 부쩍 많아진 수면량에 수업을 듣다가 꾸벅 졸아버렸다. 가뜩이나 남들보다 공부하는 시간도 적은데 이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2교시부턴 뒤에 나가 키다리 책상에 서서 수업을 들었다.

“아이고, 다리야….”

쉬는 시간에는 의자에 앉아 저린 다리를 주물렀다. 임신을 하면서 혈액순환에도 문제가 있었는데 그래서 조금만 서거나 걸어도 다리가 부어올랐다.

에구… 진짜 쉬운 게 하나도 없구나.

그래도 부쩍 커가는 게 느껴지는 호빵이를 생각하면 뿌듯했다. 이따 학원이 끝나고 권태범과 같이 산부인과 진료를 받으러 가기로 했다. 오늘은 저번 주에 예약한 기형아 검사도 받고 무엇보다 호빵이의 성별이 나오는 날이라 부쩍 긴장이 되었다.

겨우 수업을 마치고 학원을 나가자 권태범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방 이리 줘.”

가방을 가져간 권태범이 어깨에 가방을 멨다. 귀여운 병아리 열쇠고리가 딸랑거리는 모습은 여전히 웃음이 나왔다.

“오늘 오랜만에 공부하는 건 좀 어땠어? 할 만했어?”

“아니요, 졸려서 죽는, 흡, 아니 힘들었어요.”

유난히 죽는다는 말을 싫어하는 권태범의 모습에 급히 단어를 바꿔서 말했다.

“아직 잠이 많을 때라. 그러니까-”

“근데 오랜만에 사람들이랑 다 같이 공부하니까 좋더라고요. 승부욕도 생기고.”

혹시라도 과외 받으라고 할까 봐 그의 말을 자르고 학원을 다녀서 좋은 수많은 이유를 내뱉었다. 그가 알겠다고 끄떡이고 나서야 진짜 심경을 토로할 수 있었다.

“후… 저 조금 떨리는 거 같아요.”

오늘 드디어 호빵이의 성별을 알 수 있는 날이다. 게다가 지난주에 받았던 기형아 검사의 결과도 함께 나오는 날이라 긴장감이 두 배가 되었다.

“우리 호빵이 아무 이상 없겠죠?”

“당연하지. 그리고 확률적으로 오메가랑 우성 알파 사이에 태어난 아이는 98% 이상 정상으로 태어난다는 연구 결과가 있어.”

권태범은 수많은 연구 결과를 예시로 들어 내가 걱정하던 부분까지 모두 짚어주었다. 그의 전문적인 말에 걱정스러웠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아직 시간 남았는데 뭐라도 먹고 갈래?”

“초코 우유요.”

“…또 초코야?”

곤란한 얼굴로 한쪽 눈썹을 찡그린 권태범이 내 말랑한 볼을 주물렀다.

“그게요, 제 말을 잘 좀 들어보세요. 아, 일단 차에 타요.”

예약 시간이 다가와 일단 차에 올랐다.

“끄응….”

아무리 힘을 줘도 안전벨트가 달칵거리며 잘 맞지 않았다. 내가 벨트 하나 때문에 자꾸 끙끙 소리를 내자 권태범이 안전벨트를 직접 채워주었다.

“아직 애기네, 이런 것도 못하고.”

“크, 크흠.”

운전석에 앉아 백미러로 우리를 보는 준석 아저씨의 얼굴에 급히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 맞아, 저 초코 우유….”

“그건 너무 달아서 안 돼.”

“그게 제가 먹고 싶은 게 아니라요….”

내가 호빵이 핑계를 대며 먹고 싶다고 조른 게 하루 이틀이 아니라 권태범이 의심스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가늘어진 눈초리에 억울해서 항의했다.

“씨이… 그 초음파 검사할 때 초코 우유 먹으면 좀 더 선명하게 나온다고 그랬단 말이에요!”

내가 그렇게 해명했어도 그의 시선은 여전히 나를 믿지 못하는 듯했다. 결국 아까 전에 검색했던 블로그의 포스터를 권태범에게 보여주었다.

“맞죠? 단 거 먹으면 아가가 깨서 활발하게 움직인다고 그랬어요. 오늘 호빵이 성별도 보는 날인데 호빵이가 부끄러워서 다리를 안 벌리면 어떡해요.”

“…알겠어. 그래도 이번만이야.”

“네, 당연하죠.”

벌써부터 입 안에 달콤한 초콜릿 향이 가득 번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금세 편의점에서 파란색 너구리 그림이 그려진 초코 우유를 사 온 준석 아저씨가 빨대를 꽂아 내게 내밀었다.

“잘 먹겠습니다.”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차에 기대 초코 우유를 열심히 쪽쪽 빨아 마셨다. 호빵이 덕분에 먹은 초코 우유가 유독 더 달게 느껴졌다.

***

“드레스 사다 놓은 건 어쩌죠?”

조금의 여유도 없이 꽉 차 있는 호빵이의 옷장을 떠올리며 말했다. 남자라고 파란색, 여자라고 분홍색을 입힐 필요는 없어서 다양하게 구매를 하긴 했지만 여아용 드레스만큼은 아무래도 호빵이한테는 무리일 것 같았다.

“기부해도 되고. 아니면 그냥 호빵이 입혀도 되고.”

“그럴까요? 어릴 때는 뭘 모르니까 드레스 입혀도 귀여울 거 같긴 해요.”

드레스를 입은 호빵이를 상상하며 작게 키득거렸다.

“아… 엄청 귀엽겠다.”

산부 수첩에 붙인 사진을 이리 돌려보고 저리 돌려봤다. 아기가 누워있는 위치를 잘 보면 성별을 알 수 있다고 하는데 호빵이가 남자아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인데도 전혀 모르겠다. 어쨌든 무럭무럭 커가는 호빵이의 사진을 쭉 훑어보다 산부 수첩을 곱게 접고 가방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때….

툭.

가방에서 담뱃갑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순간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들자 권태범이 싸늘한 눈으로 담뱃갑을 바라보고 있었다.

“…….”

“서, 서프라이즈…?!”

씨이… 이거 일부러 숨긴 것도 아니고 내가 피우는 것도 아닌데 이게 왜 이 타이밍에 나오는 거야? 진짜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권태범의 반응에 내가 다 긴장이 되었다. 오늘따라 관절이 삐걱삐걱 거리는 것 같았다.

“태범 씨…? 저 왜 그렇게 쳐다봐요?”

“아니지?”

아니, 이 사람이! 지금 호빵이가 듣고 있는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뜨거운 콧바람을 흥흥 불자 그가 비닐도 뜯지 않은 담뱃갑을 집으며 말했다.

“설마 나 주려고 산 거야?”

“네. 아 그게 그냥 편의점 갈 일이 있었는데, 태범 씨 생각나서요. 태범 씨가 피우는 담배가 이거 맞죠?”

얼른 칭찬해 달라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권태범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내가 담배 끊은 지가 언젠데.”

“엑? 진짜요?”

“애가 둘인데 그럼 끊어야지.”

그냥 내 앞에서만 안 피우고 다른 데서는 당연히 피우는 줄 알았다.

“애가 둘이라뇨…! 근데 태범 씨한테서 담배 냄새나던데요?”

희미한 냄새도 잘 맡아져서 그런지 권태범의 몸이나 머리카락에서 가끔씩 담배 냄새가 묻어났다.

“그럼 이건 그냥 태범 씨가 버려주세요.”

뭐, 착각했나 보다 생각하고 고개를 돌리며 이왕 가방을 연 김에 어질러진 가방 속을 주섬주섬 정리했다.

***

늦은 저녁, 잠든 유원을 확인하고 거실로 나온 태범은 곧바로 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 모였나.”

-네, 형님.

“지금 가지.”

간단한 통화를 마치고 전화를 끊은 태범은 싸늘한 얼굴로 제 손에 들린 담뱃갑을 일그러뜨렸다. 별채에 있는 체력 단련실로 향한 태범은 긴장한 얼굴로 모여 있는 남자들을 향해 걸어갔다.

“긴말 않겠다. 담배 피우는 놈들, 앞으로.”

태범의 말에 대다수의 남자들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태범의 눈가가 서슬 퍼렇게 물들었다. 원래 흡연했던 사람은 담배 냄새를 잘 맡지 못한다더니 그동안 이 부분을 놓치고 있었다. 남자들에게서 나오는 냄새를 맡으니 유원이 말한 대로 옅게나마 담배 냄새가 느껴졌다.

“유원… 아니, 내 남편이 임신을 한 건 너희들도 잘 알고 있는 부분일 거야.”

그 말에 남자들이 아차 싶은 표정으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근데. 오늘 유원이 가방에서 담배가 나오더군.”

태범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 서 있던 남자들이 하나같이 퍼득 고개를 들었다.

“나한테 주려고 샀다는데. 이게 어떻게 된 걸까.”

“왜, 왜….”

태범의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가 담배를 끊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늘 태범의 곁에 지나갈 때면 지독하리만큼 매운 박하 향이 느껴지기도 했고, 준석이 알려놓았기 때문에 모두가 숙지하고 있는 사항이었다.

“내가 담배를 피우는 줄 알더라고, 나한테서 담배 냄새가 나서.”

그 말에 남자들은 뜨악한 얼굴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모두 자신의 옷 속에 들어있는 담배를 당장 숨기고 싶은 마음이었다.

“내 남편은 임산부다. 고로 전원 금연을 명한다. 못하겠으면 당장 이 집에서 나가도 좋아.”

태범은 남자들에게 천천히 경고했다. 그러자 모두 주머니에 넣어뒀던 담배를 주섬주섬 꺼내 준석이 내민 비닐봉지에 넣었다. 커다란 비닐봉지 안에 담뱃갑이 수북하게 쌓인 그 날 이후로, 운언동 저택엔 금연 열풍이 일기 시작했다.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