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다 까만색이네요?”
“그러게.”
내 말에 자신의 방을 쓰윽 하고 둘러본 권태범은 자기도 웃긴지 콧바람을 흘렸다. 요즘 들어 그가 잘 웃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광공블랙. 우리 태범 씨는 이제 광공도 아닌데 다음에 올 땐 예쁜 화분이라도 사 와야겠다.
“얼른 드세요. 배고프겠다.”
차가 조금 막힌 탓에 회사에 도착하니 6시가 넘어 있었다. 지금 이 시간까지 제대로 된 저녁을 먹지 못하고 일만 한 그가 안타까웠다. 도시락 뚜껑을 열고 젓가락을 권태범의 앞으로 내밀었다.
“짜잔. 어때요?”
“김밥이네?”
“싫어요? 다른 거 사 올까요?”
주방장 아저씨가 딱히 가리는 음식은 없다고 했는데 김밥을 별로 안 좋아하나? 내가 걱정하자 권태범이 천천히 김밥을 먹었다. 그는 맛을 음미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씨익 웃었다.
“맛있다.”
“진짜요?”
맛있다는 말에 몸에 힘이 풀리며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맛이 없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권태범의 입에 맞는 모양이었다. 내 볼을 톡 치고 권태범이 김밥을 더 먹었다. 맛있게 잘 먹는 그를 보자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도시락과 함께 가져온 국을 덜어 그에게 내밀었다.
“국도 같이 먹어요, 목 막혀요.”
“이것도 우리 남편이 만든 건가?”
“이건 주방장 아저씨 작품이요.”
권태범은 국물을 마시며 웃었다.
“그래도 재료 준비는 주방장 아저씨가 해주셨지만 싼 거는 제가 직접 했어요.”
“그래서 김밥이 제일 맛있나 보다. 근데 아직 입덧도 하면서 어떻게 김밥을 할 생각을 다 했어.”
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다행히 준비하면서 속이 울렁거리거나 입덧을 한 적이 없었다.
생각해보니까 진짜 신기하네?
“글쎄요. 오늘 아빠한테 갈 걸 알고 그랬나? 호빵이가 얌전해요.”
역시 우리 호빵이는 천재가 분명했다.
“저녁은 뭐 먹었어. 김밥 같이 먹을래?”
“아뇨, 제건 따로 싸왔어요.”
주방장 아저씨가 따로 싸준 도시락을 꺼내며 말했다. 냄새를 맡는 건 이제 어느 정도 괜찮은데 입에 들어가기만 하면 역한 나를 위해 최대한 향이 나지 않은 걸로 준비해주신 거였다.
“두부야?”
“네. 밥 대신 두부를 으깨서 넣은 건데 이거 진짜 맛있어요.”
다음에 직접 해줄 생각인지 권태범은 두부 유부초밥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김밥을 먹는 그의 옆에서 유부초밥을 집어 먹으며 입을 열었다.
“요즘 무슨 일 없죠? 사업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없지. 왜, 무슨 일 있어?”
“아, 아뇨. 그냥 태범 씨가 다치는 꿈을 꿔서요.”
일부러 말을 흘리며 물어보자 그가 정말 아무 일도 없다며 내 걱정을 덜어주었다. 원작과 지금 이뤄지는 사건 중 공통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너무 일찍 등장해서 원작 내용을 아예 바꿔 버린 걸까?
그래서 권태범도 광공이 아니고, 그가 윤설아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게 된 것일지도 몰랐다. 진짜 그래서 권태범이 다치는 일도 없으면 좋을 텐데…. 아직 마음속이 찝찝하긴 했지만 내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 같았다.
처음엔 권태범의 부하 중에서 그 남자를 찾기만 한다면 모든 일을 척척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있는지 없는지 정확히도 모르는 배신자를 찾는 일은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없어. 그럴 일은 앞으로도 없고.”
“그럼 다행이고요…. 그래도 항상 조심하세요.”
권태범의 직업상 항상 위험이 따라다녔다. 부디 그가 원작과 달리 다치지 않길 기도했다.
“학원은 다시 다닐 거지?”
“네. 그래야죠.”
“알겠어. 그 대신 호빵이를 위해서라도 너무 무리하지는 마. 내년에도 기회는 있으니까.”
“맞아요. 그리고 정 안 되면 아버님이 학교에 잔디를 깔아줘서라도 보내주신다고 했어요.”
요즘에 그렇게 해서 들어갈 수 있는 대학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버님의 말이 참 든든했다.
“잔디밭으로도 모자라면 말해. 건물 몇 개라도 세워줄 테니까.”
아 맞아, 여기 더 한 사람이 있었지. 게다가 대한민국 최고의 건설 회사 전무이니 건물 하나 세우는 건 아주 전문이었다.
“가, 감사해요.”
이러다간 정말 100층짜리 건물이라도 지어줄 기세라 얼른 공부를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먹었으면 저는 이만 가볼게요.”
“어딜.”
권태범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내 손을 잡아끌어 당겼다. 자연스럽게 내가 그의 허벅지에 앉게 되었고 가까이 닿은 그의 숨결이 목을 간지럽혔다.
“숨은 쉬어야지.”
순간 놀란 마음에 숨을 멈추었더니 권태범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나를 번쩍 들어 소파에 앉힌 권태범이 옷걸이에 걸려있던 제 재킷을 가져와 내게 덮어주었다.
“급한 것만 처리하면 되니까 거기서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같이 퇴근하자.”
“네, 알겠어요. 천천히 해도 돼요.”
일하는 권태범의 모습을 볼 수 있다니 이건 황금 같은 기회였다. 안경을 쓰고 일하는 남자가 얼마나 섹시한데. 욕심껏 그의 모습을 구경하는데 권태범이 간간이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마주치곤 피식 웃음소리를 내었다.
‘하… 진짜 잘생겼다.’
지금 당장이라도 법원에 가서 혼인신고를 마치고 싶었다. 저 잘생긴 남자가, 세상에서 가장 잘난 남자가 내 것이라고 말이다.
무섭도록 빠르게 일에 집중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것도 잠시 너무 배부르고 따뜻해서 그런지 잠이 솔솔 밀려왔다. 소파에 머리를 살짝 기대고 눈을 감자 금세 수마가 밀려드는 기분이었다. 태범 씨가 일을 다 할 때까지 조금만 자야겠다고 생각하며 몸에 힘을 풀었다.
***
탁-
마지막 남은 서류까지 확인을 마친 태범이 고개를 들어 유원을 살폈다. 계속해서 눈을 반짝이며 저를 구경하더니 어느새 잠이 들어버린 모양이었다.
태범은 자리에서 일어나 불편한 자세로 목이 꺾여있는 유원의 목을 바로 해주었다.
“태벙…. 흐움… 냐….”
입맛을 다시며 저를 부르는 소리에 태범은 웃음을 지으며 유원의 다리 뒤로 팔을 집어넣었다. 입덧 때문에 잘 먹지 못한 몸이 가볍게 들렸다. 태범은 생각보다 너무 가벼운 유원의 몸무게에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개구락지라도 달여 먹여야 하나.”
할머님이 말씀하셨던 보약을 떠올린 태범은 천천히 집무실을 나섰다.
“전무님, 퇴근하십니까.”
얼마 전에 새로 입사한 비서가 아직까지 남아있었나 보았다. 분명 모두 퇴근하라고 했을 텐데. 태범은 화면이 꺼져있는 컴퓨터를 바라보며 강 비서에게 말을 했다.
“네, 강 비서도 이만 퇴근하세요. 그리고 다음부턴 이렇게 늦게까지 나를 기다릴 필요는 없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태범은 엘리베이터 문을 잡아주는 강 비서에게 고개를 살짝 까딱이곤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리고 주차장 층의 버튼을 누르는 순간, 태범의 눈에 강 비서의 시선이 유원에게 닿은 게 들어왔다. 단순히 쳐다보는 것이 아닌 증오하는 사람을 노려보는 눈빛이었다.
“강 비서-”
이상한 기시감에 태범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보다 빨리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말았다. 빠른 속도로 내려가기 시작한 엘리베이터에 태범은 찝찝한 얼굴로 강 비서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준석이 보고한 서류에서 강 비서의 이력은 흠잡을 곳이 없었다. 가족관계나 주변도 깨끗했다. 태범은 괜한 기우라며 불안한 생각을 접으려 노력했다.
“으응…. 추워….”
에어컨 바람 때문인지 유원이 몸을 웅크리고 태범의 품을 파고들었다. 태범은 차가워진 유원의 뺨에 입을 맞추고 서둘러 차로 향했다.
***
오늘은 새벽부터 일어나 완벽한 준비를 끝마쳤다. 오랜만에 학원에 가는 날인데 늦을 수야 없었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이미 엄청 많이 늦었지만….
아무튼 학원을 다닌 날보다 나가지 않은 날이 더 많은 탓에 바짝 긴장한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
“그럼 다녀올게요. 이따 집에서 봐요.”
“그래. 힘들면 태식이한테 연락해서 들어오고.”
“네네, 태범 씨도 오늘 힘내세요!”
날씨가 많이 더워졌다. 처음으로 꺼내 입은 반팔에 청재킷을 걸치고 권태범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산뜻한 바람에 기분 좋은 미소로 발걸음을 옮기다 문뜩 내 시선에 편의점이 닿았다.
“이준이 형 아직 아르바이트 하려나…?”
권태범이 이준이 형에 대해서 아직 경계하는 것 같았지만 이준은 차유원의 몸에 빙의하고 처음으로 사귄 친구였다. 권태범한테서 도망갈 때 도움을 준 사람이기도 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편의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아, 저기 혹시 백이준이라고 오전 아르바이트생 그만뒀나요?”
이준의 자리에 처음 보는 얼굴의 여자 아르바이트생이 서 있었다. 혹시 몰라 그녀에게 이준에 대해 물어보자 잠시 생각을 하더니 긴가민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오전 아르바이트라면 제가 새로 왔는데요. 이전에 계시던 남자분 말씀하시는 건가?”
“아… 그래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음… 아! 저, 이거 하나만 주세요.”
계산대 주변에 살만한 것이 있을까 고민하다가 내 눈에 권태범이 자주 피우던 담배가 들어왔다.
“고등학생은 아니죠? 신분증 좀 보여주실래요?”
“재수생이라 학생은 맞는데 미성년자는 아니에요!”
눈을 가늘게 뜨는 여자를 향해 활짝 웃으며 신분증을 꺼내 보여주었다. 그래도 스물 셋이나 됐는데 학생처럼 보이나 보다. 어려 보이는 게 좋다가도 권태범과의 나이 차이를 생각하면 조금 걱정되었다.
‘나중에 호빵이가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겠지?’
계산한 담배를 주머니에 넣고 근처 화장실로 갔다. 거울에 비친 차유원의 얼굴은 요즘 행복해서 그런지 보기 좋았다.
“흐음…. 역시 귀엽고, 잘생겼어.”
거울로도 느껴지는 탱탱한 피부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래, 학생으로 오해할 만하긴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