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헉, 벌써 점심시간이에요?”
“점심시간이 지나고도 남았습니다. 4시가 넘었어요.”
정말 잠깐 다녀온 것 같은데 4시가 넘었다고?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니 아저씨의 말대로 4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창백해진 안색으로 긴 한숨을 내쉬는 아저씨를 보니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그냥 조금 산책한 건데….”
“형님에게 연락을 드려야 하나 정말 많이 고민했습니다. 다음부턴 꼭 미리 말씀해주세요.”
“네, 아저씨….”
권태범한테 또 혼날 뻔했다. 음… 근데 그러면 이제 곧 저녁시간이잖아?
“오늘 태범 씨 야근한다고 했죠?”
“네, 조금 늦으신다고 전달받았습니다.”
“저 아직 배 안 고픈데 도시락 싸서 태범 씨한테 가고 싶어요! 서프라이즈로!”
애인이 생긴다면 하고 싶었던 일 100가지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내가 눈을 반짝이자 아저씨가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물었다.
“아직 입덧 중이시지 않으세요? 냄새 때문에 힘드실 것 같은데요.”
“마스크 2개 쓰고 하면 돼요. 그리고 냄새는 생각보다 괜찮더라고요, 입에만 안 들어오면.”
진짜 몇 주 전까지 냄새만 맡아도 속이 안 좋았는데 요즘은 점점 안정기에 들어서서 그런지 입에만 들어오지 않으면 괜찮았다.
“그럼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메뉴는 어떤 걸로 할까요.”
“히히. 도시락은 역시 김밥이죠!”
“알겠습니다. 올라가서 준비하고 내려오세요.”
“네!”
아저씨에게 감사를 표하고 촐랑촐랑 2층 계단을 올랐다. 멋있게 보이고 싶어 권태범이 만들어 준 내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옷장 문을 열었다. 아직 태그를 뜯지도 않은 옷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그중에서 상큼한 하늘색 니트를 꺼내 입고 통이 넓은 바지를 골랐다.
“이제 진짜 배가 좀 나온 것 같네. 4개월까지는 다 내 살이라던데.”
입덧 때문에 잘 먹지 못했었는데 배가 왜 이렇게 나오는지 모르겠다. 잘 늘어나는 고무줄 바지를 위주로 사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맞는 옷이 없을 뻔했다.
쭉 늘어난 바지를 탁- 하고 튕긴 후 손을 깨끗하게 씻고 거실로 내려왔다. 주방으로 들어가자 형형색색의 김밥 재료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근데 태범 씨는 김밥 좋아하세요?”
“형님이 평소에 워낙 표현을 잘 안 하셔서요. 그냥 가리지 않고 잘 드시는 것밖엔 모르겠습니다.”
표현을 잘 안 한다고? 하긴 그를 처음 봤을 땐 무표정한 얼굴에 완벽한 얼굴과 몸이어서 마치 로봇을 대하는 것 같았지. 그래도 요즘은 사랑한다, 잘생겼다는 표현을 자주해서 그런지 표현을 잘 안 한다는 말이 공감되진 않았다.
아저씨한테 지금 이 얘기를 했다간 주책이라고 욕을 먹을 것 같았다.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태범 씨가 좋아했으면 좋겠다.’라고 아저씨에게 말했다.
***
“저는 왜 자꾸 옆구리가 터질까요?”
아저씨가 만 김밥과는 다르게 내 김밥은 옆구리가 뻥 터져있었다. 너덜거리는 김밥을 보며 시무룩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유원 님의 정성이 가득한 김밥이니 좋아하실 겁니다.”
차마 괜찮겠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는지 아저씨는 나를 위로했다.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한 거 같아요…. 그냥 아저씨가 만든 걸로만 싸가야 할까 봐요.”
“아직 시간도 많고 재료도 많으니 조금만 더 해보시죠.”
권태범의 밑에서 일하는 직원들 몫까지 준비해서 그런지 아직 남은 재료가 많았다. 후우…. 결국 심기일전해서 장갑을 끼고 김발을 집어 들었다. 김에 적당한 양의 밥을 넓게 펼치고 단무지와 계란지단을 올렸다. 그리고 당근과 햄, 우엉, 시금치를 차례대로 올린 후 김밥 끝에 밥풀을 묻혔다.
“후… 이번엔 꼭!”
처음엔 이것저것 많이 넣은 바람에 뚱뚱해진 김밥이 터진 거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모양이 제대로 잡혀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내가 만든 것 중에 제일 나아 보였다.
“예쁘게 잘하셨네요.”
“와….”
“칼은 위험하니 제가 썰어드리겠습니다.”
드디어 옆구리가 터지지 않은 김밥을 내 손으로 완성했다. 혹시나 터질까 봐 조심조심 아저씨에게 건네고 한 발 물러섰다.
“어떠십니까?”
“맛있어 보여요!”
“그럼 형님 도시락은 유원 님이 만드신 김밥으로 싸겠습니다.”
아저씨가 도시락통에 김밥을 차곡차곡 담았다. 이걸 본 권태범의 반응은 어떨지 벌써부터 기대가 됐다. 놀러 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의 회사를 방문하는 것뿐인데 마음이 설렜다.
“다 됐습니다.”
“우와. 감사합니다, 아저씨.”
“직원들 몫은 마저 포장해서 식탁에 올려두겠습니다.”
“네!”
요즘 권태범의 일이 많은 터라, 준석 아저씨 또한 덩달아 바빠졌다. 그 때문에 평소엔 준석 아저씨 대신 태식 아저씨가 나를 도와주고 계셨다. 대중교통도 잘 되어 있고, 택시도 있으니 혼자 다녀도 된다고 했지만 권태범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단칼에 거절했다.
이제 내가 어딜 가든 누군가 따라오는 것이 익숙해졌기도 하고, 권태범이 언젠가 나를 잡고 “아직 그 자식들을 전부 잡은 게 아니다.”라며 당부했기 때문에 잠자코 그의 말을 따랐다.
“태식 형님한테는 제가 연락드릴 테니 손부터 씻고 나오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아저씨!”
장갑을 꼈어도 기름이 묻어 손바닥이 미끈거렸다. 찝찝했던 손을 꼼꼼하게 씻고 밖으로 나오니 태식 아저씨가 그새 거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시죠, 형수님.”
“네!”
나를 대신해 양손에 도시락을 든 아저씨를 따라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뒷좌석에 오르려하는데 살짝 열어진 대문 사이로 또다시 저번에 느꼈던 그 시선이 느껴졌다.
“아저씨, 잠깐만요.”
처음엔 그냥 지나쳤지만 두 번이나 똑같은 게 느껴진다면 이건 그냥 넘어갈 게 아니었다. 운전석 문을 여는 아저씨를 붙잡고 잠깐 밖에 나가봐야겠다고 말했다.
“위험합니다. 형수님은 차에 들어가 계십시오. 제가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네. 그럼 부탁드릴게요.”
아저씨의 말대로 차에 들어가 얌전히 기다렸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돌아온 아저씨가 나를 안심시켰다.
“길고양이인 것 같습니다. 주변에 사람은 없었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거 같아요.”
“길고양이요?”
“네. 아주 작은 새끼 고양이가 전봇대 뒤에 있더라고요.”
“아 그렇구나. 괜히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인걸요. 그럼 이제 출발하겠습니다.”
길고양이였다니 다행이다. 요즘 들어 계속해서 누굴 관찰하는 버릇이 생겨서 그런가 나도 모르게 예민하게 느꼈었나 보았다. 그제야 안심이 되어 시트에 등을 기대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제 정말 여름이 다가오고 있나 보다. 5시가 훌쩍 넘은 시간인데 아직도 해가 높이 올라있었다. 품에 안은 도시락을 꼭 끌어안았다.
“도착했습니다.”
“저 혼자 올라가도 돼요?”
내 말에 아저씨는 그냥 작게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역시 안 되나. 조용히 수긍하고 태식 아저씨를 졸졸 따라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박준석 비서실장님 연결 부탁드립니다.”
“누구라고 전해드릴까요?”
“본가에서 왔다고 전해주십시오.”
“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데스크에 앉아있는 직원이 전화를 연결하더니 곧이어 아저씨에게 전화를 바꿔주었다.
“형님, 저 태식입니다. 지금 아래에 형… 아니, 유원 님이랑 와 있습니다.”
준석 아저씨랑 통화를 하던 태식 아저씨가 목소리를 줄이더니 형님껜 비밀로 해달라고 전했다. 아저씨는 전화를 끊고 나를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은 집무실에서 일하고 계신답니다. 지금 올라가면 될 겁니다.”
전화기를 건네받은 직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우리를 엘리베이터 앞까지 안내해주었다. 임원 전용인 엘리베이터에 올라 한 번에 권태범의 집무실이 있는 17층까지 올라갔다.
“형수님, 오셨습니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준석 아저씨가 나를 보며 조용히 인사를 건넸다.
“네, 태범 씨 아직 저녁 안 드셨죠?”
“네, 아직입니다.”
“다행이네요. 아, 직원분들도 드시라고 넉넉하게 싸 왔어요.”
내 말에 태식 아저씨는 손에 들고 있던 도시락을 준석에게 건넸다.
“아이고, 뭘 저희들까지….”
“물론 주방장 아저씨가 도와주신 거니까 맛은 괜찮을 거예요.”
혹시나 걱정할까 봐 말을 덧붙였다. 준석 아저씨는 작게 웃으며 잘 먹겠다고 대답했다.
“그럼 맛있게 드시고 저는 태범 씨랑 저녁만 먹고 얼른 갈게요.”
“네, 들어가 보십시오.”
직원들과도 눈인사를 나눈 후 떨리는 마음으로 집무실 문고리를 잡았다.
똑똑-
노크를 하자 사무적인 권태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딱딱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에 오랜만에 긴장감이 느껴졌다. 천천히 문을 열고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무슨 일-”
“짜잔!”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묻는 권태범의 앞으로 달려가 크게 소리쳤다.
“유원아?”
어리둥절해 보이는 그의 앞으로 도시락을 내밀었다.
“권 전무님, 저녁 배달 왔습니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야?”
묘하게 한층 밝아진 목소리로 웃음을 터뜨린 그가 내 손에 들린 도시락 가방을 받아들었다.
“일단 이리와.”
그리곤 나를 소파에 앉혔다. 처음 와보는 권태범의 집무실은 굉장히 깔끔했다.
‘이런 곳에서 일을 하는구나.’
대기업 회장의 아들이고, 전무라고 해서 엄청 넓고 화려한 방에서 일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단출했다. 딱 있을 것만 있는 느낌. 그래도 곳곳에 있는 물건이 권태범다워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