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그렇게 아버님의 손을 잡고 본채로 걸어오는 내내 뒤에서 뜨거운 시선이 목덜미에 닿았다. 자기 아빠의 사랑을 뺏어가서 노려보는 건 아닐 테고. 권태범 대신 내가 맞잡은 아버님의 손 때문인 것 같았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진다고 또다시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내 상태를 기민하게 눈치챈 권태범이 페로몬을 정리하며 아버님을 조용히 부르는 걸로 일단락되었다.
“아버지는 이 방을 쓰시면 됩니다.”
안방과 가까운 방은 권태범이 드레스 룸이랑 호빵이 방으로 다 개조해놓은 상태라 아버님의 방은 우리와 가장 멀리 떨어진 손님방으로 정해졌다. 자신의 선택이 탁월했다는 듯 권태범의 얼굴에서 묘한 만족감이 숨겨지지 않았다.
“크흠. 좀 멀긴 하구나.”
말이야 같은 층이지 계단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있는 침실과 달리 왼쪽에 있는 끝 방이니 거리가 멀긴 했다.
“유원이만 아니었으면-”
“나도 유원이 아니면 오지도 않았어!”
권태범의 말을 가로채며 아버님은 버럭 소리쳤다. 또다시 투닥투닥 말싸움이 시작되기 일보 직전인 상황에 일부러 배를 잡고 말을 꺼냈다.
“저, 저 배고파요…. 식사 안 하세요?”
“많이 배고파? 얼른 내려가자.”
“크흠. 어서 내려가자꾸나.”
두 부자는 앞다퉈 내 옆자리를 사수하려 했다. 결국 세 명이 나란히 주방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
“잘 먹었습니다….”
사실은 잘 먹지 못했다. 집에 오자마자 보란 듯이 다시 시작된 입덧 때문에 밥 한 숟가락 먹기도 힘들었다. 화장실을 몇 번 들락날락하다 주방으로 돌아오니 어느새 식탁이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두 분 다 제대로 드시지도 못하고….”
“으응… 아니다, 먹을 만큼 먹었어.”
오늘 종일 제대로 먹질 못해서 기운이 없었다. 아버님이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고 권태범은 방울토마토를 씻어왔다.
“먹어봐.”
“감사합니다.”
토마토를 별로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의 성의를 봐서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동그란 토마토가 이에 짓이겨지고 그 안에서 토마토즙이 톡 하고 터져 나왔다.
근데, 내가 알던 방울토마토가 아니었다.
“달아요!”
토마토에 설탕을 뿌려놓은 맛이었다. 그것도 완전 설탕 절인 토마토! 내가 눈을 반짝이며 그를 올려다보자 표정이 안 좋았던 얼굴이 느슨하게 풀어졌다.
“맛있어?”
“네네. 아! 아버님도 드셔 보세요! 엄청 달고 맛있어요.”
토마토 중에서 가장 알이 크고 빨갛게 물든 방울토마토를 집어 아버님께 건넸다.
“어쩜 이렇게 착할 수가….”
아버님은 방울토마토 하나에 감동받아 눈물을 글썽이셨다. 권태범이 엄청 사근사근한 성격은 아니니 작은 것에도 기쁜가 보다. 아예 그릇을 가운데로 밀어 넣었다.
“다 같이 먹어요.”
“아니야, 밥도 제대로 못 먹었는데. 이거라도 많이 먹어야지.”
아버님은 본인은 먹을 만큼 먹었다며 다시 내 앞으로 그릇을 밀어주었다. 아니 근데 진짜 맛있긴 너무 맛있었다. 설탕을 좋아하긴 하는데 그래도 이렇게 토마토에 뿌려 먹어도 되려나?
당 수치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고 했는데…. 토마토를 먹다 말고 걱정이 되어 권태범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동그랗게 부푼 내 뺨을 톡톡 치며 입을 열었다.
“설탕 뿌린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먹어. 스테비아라고 다 배출되는 거니까.”
그 말에 열심히 토마토를 집어 먹으며 배를 채웠다. 내가 워낙 단 걸 좋아하는데 과일을 마음껏 먹지 못하는 게 안타까워 그가 찾아낸 거라고 했다.
“아, 이제 좀 배불러요….”
한 그릇을 비우고 계속해서 방울토마토를 추가해서 먹었더니 배가 빵빵하게 부풀었다. 이제 겨우 10주 차인데 누가 보면 20주 차가 넘은 임산부인 줄 알겠다. 배에 낀 티셔츠를 쭉 잡아당기고 자세를 바로 했다.
나를 지켜보던 아버님께서 갑자기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셨다.
“보자마자 주려고 했는데 까먹고 있었구나. 자 받거라, 아가.”
이미 이전에 한 번 본적이 있던 물건이었다. 내 지갑 속에서 확실한 존재감을 띠고 있는 물건이기도 하고.
“이, 이건 왜….”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사 먹고, 사고 싶은 게 있어도 사고. 한도가 없으니까 빌딩을 사도 괜찮겠구나 하하.”
농담이시죠…? 호탕하게 웃으며 새까만 블랙 카드를 건네주는 아버님의 모습에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하지만 거절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기업 회장님께서 주시는 건데 무조건 받아야지! 이걸로 나중에 호빵이 유치원도 보내고, 등록금도 내고 해야지! 아버님이 보지 못하게 고개를 돌려 권태범에게 입을 벙긋거렸다.
‘우리 돈 굳었어요!’
그러자 권태범이 작게 웃었다.
저녁을 먹고 2층으로 올라오는데 계단 끝에 멈춰선 아버님이 나를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아버님 왜, 왜요…?”
“요즘 그 호랑이 소년이 재밌다던데 같이 보러 가지 않으련?”
아. 영화 보고 싶으셨구나. 지금 예매해도 볼 수 있으려나? 내가 고개를 돌려 권태범을 바라보자 그가 딱 잘라 거절했다.
“혼자 보러 가세요.”
“태범 씨?”
그는 나를 보며 잠깐 멈칫하더니 그래도 더 이상 참을 수 없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유원이가 아버지랑 영화를 왜 봐요? 그리고 사람 많은 데는 아직 안 가는 게 좋습니다.”
그 말에 아버님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차마 외면할 수 없어 아버님에게 제안했다.
“그. 테, 텔레비전에 나오면 같이 봐요.”
“그래…. 그러자꾸나. 그나저나 방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게 조금 아쉽구나.”
“하.”
권태범은 눈을 찡그린 채 어이없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버지 변태예요?”
“뭐, 뭐 이 자식아?”
“저희 신혼이에요. 방에서 뭘 할 줄 알고 자꾸 그러시는 건지. 아무리 자식이라도 프라이버시는 지켜주셔야죠.”
“컥, 아, 아니 지금 무슨 소리를….”
“어… 어…….”
권태범의 폭탄에 아버님도 나도 당황해서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어르신 앞에서 무슨 망발을 내뱉는 건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아버님도 너무 민망한지 처음으로 권태범에게 사과했다.
“크흠… 그래, 내가 생각이 짧았구나. 그럼 들어가서 쉬렴.”
“…아, 안녕히 주무세요….”
나는 아버님께 인사한 뒤, 권태범이 오든가 말든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미, 미쳤어! 앞으로 아버님 얼굴을 어떻게 봐요!”
권태범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퍽퍽, 내리쳤다.
‘뭐, 뭐라고…? 방에서 뭘 할 줄 아느냐고?’
수치심에 발을 동동 굴렸다. 무슨 변명이라도 하지, 그냥 태연하게 옷을 갈아입는 그 모습에 얼굴이 더 화끈거렸다.
“어차피 그날 이후로 그, 그거 비슷한 것도 해본 적도 없으면서. 아버님이 오해하시잖아요.”
“그럼 할까.”
“…네?”
“그거 비슷한 거. 해보자고. 내가 모르는 불만이 많은 거 같은데.”
아니 왜 하필 옷을 저렇게… 반쯤 벗은 채 점점 다가오는 권태범을 피해 한 걸음씩 물러섰다.
“태범 씨? 자, 잠깐 우리말로 해요.”
“말보다 더 잘 통하는 대화가 있을 수도 있잖아. 차유원 호기심은 많으면서 그건 궁금하지 않은 모양이지?”
네. 전혀 안 궁금… 조금 궁금하긴 한데. 내가 혈기왕성한 청소년도 아니고 때와 장소를 못 가릴 만큼 궁한 것도 아니었다.
“조, 조금만 뒤로 가주… 흣.”
뒷걸음질 치다 침대까지 밀려나고 말았다.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어 허둥지둥하는 찰나 권태범이 더 다가와 푹신한 침대에 눕고 말았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권태범의 그림자가 얼굴에 드리워지고, 그의 숨결이 뺨을 간지럽혔다.
“차유원.”
아씨…. 존나 잘생겼어. 오늘따라 저 호랑이 문신도 왜 이렇게 멋있고 섹시해 보이는 건지. 미치겠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가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입 벌려.”
아찔한 속삭임에 나도 모르게 몸이 녹아내렸다. 아까부터 그의 숨결을 따라 스며드는 시원한 페로몬 향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조금만… 조금만 더….
나도 모르게 권태범의 페로몬을 갈구했다. 그에게 몸을 밀착하고 열 오른 눈으로 그를 불렀다.
“태범 씨….”
농밀한 페로몬에 흠뻑 젖은 몸에 힘이 풀리고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그러다 문뜩 머리를 맞은 것처럼 번쩍 정신이 들었다. 지금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아버님이 계신데! 고개를 팍 들자 권태범의 코가 내 머리에 부딪혔다.
“윽.”
“헉. 괘, 괜찮아요?!”
권태범이 코를 붙잡았다. 화들짝 놀라 그의 얼굴을 살폈다.
“피, 피는 안 난다…. 휴우….”
하마터면 잘생긴 얼굴에 기스를 낼 뻔했다.
“미안해요. 너무 놀라서.”
하긴 이제 권태범의 말만 따라 부, 부부인데 너무 내외를 했나 싶었다. 눈을 질끈 감고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춘 후 후다닥 이불을 덮어썼다.
“미안해요. 그렇지만 오늘은 아버님이 계시니까 우리 그… 다, 다음에 해요!”
아버님 핑계를 댔지만 사실은 아직 내가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다. 솔직히 말해선 진짜 하고 싶은데…! 호빵이가 있어서 걱정도 되고 그 흉기를 떠올리자 차마 엄두가 안 났다.
권태범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 이불 속에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그러자 권태범이 이불을 슬쩍 내려주며 그런 내 옆에 누워 나를 꼭 안아주었다.
다음엔 안 봐준다는 속삭임과 함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