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71)화 (71/136)

#71

“태범 씨, 저 내, 내려주세요!”

“그러다 다쳐.”

회장님 앞에서 무슨 추태인지. 나는 계속해서 얼른 내려달라며 그의 어깨를 두어 번 내리쳤다. 하지만 권태범은 내 말을 무시하더니 회장님께 말했다.

“저도 올라가서 쉴 겁니다, 유원이랑.”

“그럼 나도 방 하나만 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세요.”

그 말에 권태범이 어이없는 얼굴로 회장님을 바라보았다. 권태범에게는 통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시는 듯 회장님은 인자한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아가, 며칠간 여기서 묵어도 되련?”

“아, 네! 그, 그렇게 하세요.”

회장님의 말에 얼른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봐라. 좋다고 하는 거.”

회장님은 내 대답에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당당한 목소리로 권태범에게 말했다. 그 모습을 보기도 싫다는 듯 권태범이 혀를 찼다.

“좋다고 한 적도 없어요. 그리고 아버지가 그렇게 부담스럽게 보는데 유원이가 내쫓겠어요? 그리고 그 말투는 뭐예요, 갑자기.”

“영화 보면 이렇게들 말하던데. 왜, 별로냐?”

“네.”

조금… 어색하긴 하지만 그래도 괜찮은데 권태범은 가차 없이 솔직한 감상평을 내뱉었다. 머쓱한 표정을 한 회장님이 으름장을 놓았다.

“어쨌든. 며칠 여기서 묵을 생각으로 온 거니까. 알아서 해라.”

“아버지 집 놔두고 왜 저희 집에서 주무십니까? 여러 사람 피곤하게 하지 말고 이만 돌아가세요.”

“크흠. 우리 유원이랑 놀려고 그런다!”

헉. 나, 나…? 권태범의 품에 안긴 상태로 똑닮은 부자의 대화를 얌전히 지켜보다가 내 이름이 나와 화들짝 놀랐다.

“유원이 저랑 놀기에도 바쁩니다.”

“저, 저…! 내가 새아가만 아니면…!”

우락부락한 얼굴로 권태범을 향해 소리치던 회장님이 내가 깜짝 놀라자 입을 다물었다.

“큰 소리를 내서 미,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일단 유원이 재우고 올 테니까 다시 얘기해요.”

아, 아니 내가 애냐고…! 권태범의 이상한 말에 회장님은 당연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는 나를 향해 좋은 꿈을 꾸라며 손까지 흔들어주셨다.

“푹 자거라, 아가.”

“가, 감사합니다.”

권태범의 등 뒤로 소파에 앉아 짐가방을 열어 짐을 하나씩 풀어놓는 회장님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렇게 호빵이를 포함한 삼대의 이상한 동거생활이 시작했음을 알리는 소리가 집 안 전체에 울려 퍼졌다.

***

그의 품에 안겨 방 안에 들어온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래도 아버님인데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요….”

나보다 나이가 많은 권태범에게 이렇게 잔소리를 하게 될 날이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하지만 아까처럼 막 돌아가라고 소리치고, 어른의 말을 뚝뚝 잘라먹는 행동은 내 상식에서 벗어난 일이었다.

조금 전의 그를 떠올리며 나는 짐짓 엄한 얼굴로 권태범을 바라보았다. 최대한 엄하고 단호한 표정을 지었는데 이런 내 모습은 그에게 씨알도 안 먹히는 모양이었다.

“하아…. 반성하세요.”

“그래.”

권태범은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머금고 내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속으로 한숨이 나왔다. 하긴 지금 품에 대롱대롱 안겨 있는데 엄한 얼굴을 해봤자 무서울 리가 있겠어? 그래도 사람이 말하는데 진지하게 받아주지….

나는 서운한 마음에 입을 삐죽 내밀었다. 턱에 잡힌 자국을 손가락으로 쓱 문지른 권태범이 나를 침대에서 내려주었다.

“알겠어. 이따 아버지한테 사과할게.”

“네… 어른한테 버릇없이 굴면 안 되는 거예요.”

“응. 명심할게.”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준 권태범이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눈에 졸음이 한가득이네. 일단 조금 자. 저녁 다 되면 깨워줄 테니까.”

“네에…. 회장님께 꼭 사과하세요…. 저도 꼭 깨워주시고요….”

머리를 만져주는 손길에 졸음이 밀려왔다. 권태범 대신 그의 페로몬 향이 가득한 호랑이 인형을 껴안으며 눈을 감았다.

***

“아버지.”

유원을 재우고 다시 1층으로 내려온 태범은 어느새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권 회장을 불렀다.

“그래, 새아가는 잠들었냐?”

“유원이 일어나기 전에 이만 가세요.”

사과하기로 유원과 약속했던 건 어디로 가고 태범은 한층 더 불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으흠. 요즘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그러자 권 회장은 태범의 말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소파에 앉아 신문만 읽었다. 그 모습에 태범은 불편한 심기를 굳이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자연스럽게 태범의 페로몬과 권 회장의 페로몬이 뒤섞여 거실의 상황은 유원이 있을 때보다 더 숨 막히게 되어버렸다.

그 순간, 아이스박스를 든 준석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형님, 이건 냉장고 안에 정리해두겠습니다.”

서울로 올라오기 전, 유원의 할머니는 여러 종류의 반찬을 챙겨주셨다. 요즘 들어 날씨가 좋아 음식이 상할까 아이스박스에 넣어두었는데 준석이 트렁크에서 꺼내온 모양이었다.

“그래. 그러고 나서 회장님 좀 집에 모셔다드려.”

“네.”

명백한 축객령이 내려졌다. 내색은 안 하지만 당장이라도 쫓아낼 것 같은 상황에 권 회장은 마른침을 삼켰다.

“준석이가 모셔다드릴테니 그렇게 아세요.”

“새아가 허락도 받았는데 왜 그러냐.”

결국 입을 꾹 다물었던 권 회장이 불편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저는 허락 안 했습니다.”

“너 자꾸 치사하게 이럴 거냐!”

태범은 어디서 정보가 자꾸만 새어 나가는지 날을 한 번 잡아 쥐새끼를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유원의 존재를 알고 거기에 임신 사실까지 알게 된 이후로 권 회장은 매일 같이 태범을 닦달했다. 그러더니 결국 집까지 찾아왔고.

“같은 알파끼리 있으면 불편하다고 저 발현되자마자 쫓아내신 분이 갑자기 왜 한집에 있겠다고 이러세요?”

“좋다고 한 시간 만에 짐 싸 들고 나간 놈이 그게 할 말이냐?”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이어지는 설전에 냉장고에 반찬을 넣어두고 돌아온 준석이 숨을 꾹 참았다.

“도대체 저 없는 동안 뭐 하시려고 여기 있겠다는 겁니까.”

“유원이 옷도 좀 사주고! 맛있는 것도 좀 사 먹이려고 하지!”

“이미 제가 다 해줬어요, 앞으로도 해줄 거고요.”

“옷이야 많을수록 좋은 거고, 맛있는 거 사 먹였다면서 새아가는 왜 이렇게 마른 거냐.”

훅 치고 들어온 말에 태범은 미간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집에 돌아오자마자 유원의 입덧이 다시 시작되어 걱정이었다. 유원이 이 집을 꺼리는 것 같아 이사를 가야 하나 생각까지 한 참이다.

“아버지, 이렇게 한가하시면 회사에 나오세요. 이제 다 나으신 거 같아 보이네요.”

“아, 아이고…. 오래 서 있었더니 수술 부위가 벌어진 거 같구나.”

누가 봐도 꾀병인 게 분명한 듯 권 회장이 붙잡은 곳은 수술 부위가 아니었다. 뒤늦게 그것을 깨달은 권 회장이 은근슬쩍 손 위치를 바꾸더니 머쓱한 얼굴로 헛기침을 내뱉었다.

“하아….”

팽팽한 접전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그때, 가시밭에 서 있는 사람처럼 불편한 얼굴을 하던 준석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그럼…. 회장님이 별채에서 묵으시는 건 어떠십니까?”

태범과 권 회장의 고개가 준석에게 향했다. 두 사람 다 물러날 생각이 없는 상황에 준석의 제안은 꽤 나쁘지 않은 선택지였다.

“그, 그럴까?”

“…대신 주말 되기 전에 가세요.”

“가지 말라고 해도 갈 거다, 이놈아!”

양심이 찔린 권 회장이 버럭 소리치며 말했다. 그렇게 권 회장이 별채에 묵는 걸로 합의를 본 태범은 인사도 없이 발걸음을 돌려 서재로 향했다. 권 회장도 태범과 마찬가지로 별 미련 없다는 얼굴로 준석을 따라 본채를 빠져나갔다.

***

“회장님은.”

“저녁때 건너오신답니다.”

오랜만에 유원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려고 한 태범은 갑자기 틀어진 일정에 짜증스러운 얼굴로 눈썹을 문질렀다.

“나 없을 때 유원이한테 쓸데없는 소리 못하시게 네가 집에 좀 있어.”

“네, 형님.”

“그리고. 집에 쥐새끼 몇 마리가 굴러다니는 거 같은데. 조만간 청소 좀 하지.”

다원 그룹의 윤 상무도 그렇고, 유원의 존재와 임신 사실을 말하지 않았는데도 아버지가 알고 찾아오신 것을 보면 분명 집 안의 일을 밖으로 전하는 놈이 있는 게 분명했다. 안 그래도 유원의 신변 보호를 위해 집 안의 경계를 더 높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참이다. 태범이 준석에게 지시했다.

“냄새 맡고 몰려올 만한 걸로 준비해놔.”

“알겠습니다.”

쥐새끼 사냥을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먹기 좋은 미끼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준석은 최근 사업 상황과 그에 맞는 괜찮은 시나리오를 떠올렸다.

“가우룽싱구 수주 계약 건 진행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그게 아직 발전국에서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돈 욕심이 과하네.”

태범은 오늘따라 담배가 무척이나 생각났다. 하지만 그 대신 익숙하게 사탕을 입에 넣으며 박하 향이 진하게 나는 사탕을 입 안에 굴렸다.

“30억 정도만 현금으로 준비해놔.”

“넵.”

“왕 회장 측에 연락해서 조만간 발전 국장과 가우룽싱구 의원과 식사 자리 한 번 마련해보라고 전하고.”

작년 이맘 때쯤 왕 회장의 손녀와 발전 국장의 장남이 결혼을 했으니 왕 회장이 만남을 주선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닐 거다. 돈을 어느 정도 준비하면 일은 잘 풀리겠지. 다만, 그 액수를 늘리기 위해 간을 보고 있는 것일 테고. 태범은 빤히 보이는 속내에 피식 웃음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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