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권태범은 갑자기 나에게 말했다.
“유원아, 지금 명훈이랑 온실에 가 있어.”
오자마자? 차를 너무 오래 타서 좀 눕고 싶은데…. 내가 눈을 굴리자 권태범이 곤란한 얼굴로 나를 달랬다.
“집에 불청객이 찾아온 거 같아서. 괜히 봐서 좋을 게 없으니까. 금방 끝나.”
“네에. 알겠어요.”
권태범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굳이 본채에 들어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건 맞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내 옆으로 다가온 명훈 아저씨를 보았다.
“이따 연락하면 유원이랑 내려와.”
“알겠습니다, 형님.”
내 머리를 쓰다듬은 권태범이 먼저 계단을 올랐다. 나는 오래간만에 만난 명훈 아저씨에게 말을 걸었다.
“저…. 아저씨.”
“네, 형수님.”
강릉에 있었을 땐 좀 더 친근하게 말했던 것 같은데 기분 탓인지 아저씨의 말투가 딱딱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그때 일 때문에 권태범에게 혼났겠지? 명훈 아저씨에게 뒤늦은 사과를 건넸다.
“저번에 그렇게 도망가서 죄송해요…. 제가 그동안 좀 오해를 하고 있어서….”
자세하게 얘기하긴 창피하지만 그동안 내가 오해하고 있던 부분과 그래서 불가피하게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전했다. 그러자 아저씨가 급히 입가를 가리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 크흠. 알겠습니다. 형수님이 충분히 오해할 만하셨네요.”
“그렇죠? 전 진짜 태범 씨가 저랑 우리 호빵이 죽이는 줄 알고….”
“호빵이요? 혹시 태명입니까?”
“아, 네! 꿈속에서 우리 호빵이 엉덩이가 진짜 푹신하니 호빵 같았거든요.”
“그랬군요….”
아저씨의 얼굴이 어쩐지 황홀해 보였다. 호빵이 드시고 싶으신 건가.
“이제 올라가도 되나요?”
“아, 네. 이쪽으로 오시죠.”
원래 마당과 연결된 계단 말고 지하 주차장과 연결된 계단을 올라가니 아저씨들이 묶는 별채가 나왔다. 이곳에 오니 그날의 일이 떠오르며 문뜩 윤설아에 대해서 궁금해졌다.
“아저씨도 윤설아 씨 본 적 있으세요?”
“아, 제수씨요?”
고개를 끄덕이며 별채 주변을 힐끔거렸다.
“기찬이랑 저번에 한 번 본 적 있죠. 제수씨네 집안에서 기찬이 만나는 걸 엄청 반대해서 홍콩으로 도망가고, 또 잡으러 가고. 어휴,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도망이요?”
“재벌가 아가씨가 저희 같은 사람을 만난다고 하니 집안의 반대가 심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랬구나…. 지금은 허락받았으려나?
“아직 허락은 못 받았고, 그래서 여기서 지내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내 표정에 생각이 다 드러났는지 아저씨는 내가 궁금한 게 생기는 족족 대답해주셨다. 아저씨와 보폭을 맞춰 천천히 산책길을 지나 유리 온실에 도착했다. 지난 며칠간 못 온 것뿐인데 그새 꽃이 활짝 피었다. 이제 봄옷을 완전히 벗어 던지고 본격적으로 여름을 준비하는 모습이었다.
“여긴 오랜만에 와 보는군요.”
아저씨는 생각에 잠긴 사람처럼 온실을 쭉 둘러보더니 말을 이어갔다.
“사모님께서 돌아가시고 난 뒤로는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아 방치된 곳이었습니다.”
방치되었다기엔 지금은 너무 아름다운 곳이었다. 여러 종류의 꽃이 흐드러졌고 중앙에 있는 작은 연못은 관리가 아주 잘 되어 이끼도 끼지 않았다.
“형님께서 유원 님을 위해서 다시 정비하라고 하셨거든요. 이뿐만 아니라 유원 님 덕분에 정말 많은 것들이 바뀌었어요.”
그러고 보니 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굉장히 삭막하고 쓸쓸했는데, 지금은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냥 날씨가 좋아져서 그런가 싶었는데…. 그나저나 사모님…? 설마 권태범의 어머니를 말하는 건가?
민감한 사항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사모님이라는 분이 태범 씨 어머니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네, 돌아가신지… 한 15년 정도 됐네요.”
아…. 태범 씨도 엄마가 없었구나. 15년 전이라면 권태범도 많이 어렸을 텐데. 그때의 권태범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근데 불청객이라는 사람은 누구예요? 혹시 다른 조직 보스고 막 그런 건가요?”
“하하…. 글쎄요.”
또다시 말을 아끼는 아저씨를 보며 입을 쭉 내밀었다. 권태범의 부하니 당연히 권태범의 말이 최우선이겠지만 그래도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저번 일도 의사소통 부족으로 오해한 건데 또 오해하면 어쩌지.”
들으라는 듯 혼잣말을 하자 아저씨가 부쩍 당황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러더니 결국 한쪽 눈을 찡그리며 내게 신신당부했다.
“그, 그럼 절대 제가 말씀드렸다고 하면 안 됩니다. 저 그럼 진짜 이번엔 중국행이 아니라 남극행이 될 수도 있어요.”
중국행? 남극행? 뒷세계에서 쓰는 은어 같은 건가? 일단은 궁금한 게 먼저였기에 고개를 끄덕이고 손가락까지 걸었다.
“사실은… 회장님께서 지금 본채에 와계십니다.”
“회장님이요?”
“네.”
회장님이면… 권태범의 아버지잖아!
헉. 아직 결혼은 안 했지만 그래도 권태범의 남편이나 마찬가지인 사람인데 이렇게 있을 수는 없었다. 나중에 회장님이 알면 얼마나 내가 버릇없이 보일까 걱정도 됐다. 서둘러 온실을 나서 본채로 향하는데 아저씨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형수님, 절대. 절대 제가 말씀했다고 하면 안 됩니다. 이건 정말 제가 형수님을 믿기 때문에 말씀드린 거예요.”
“네. 절대, 저어어얼대 말 안 할게요. 어떻게, 손바닥에 사인도 해드려요?”
농담으로 한 말 이었지만 아저씨는 냉큼 손을 내밀었다. 결국 손바닥에 복사와 사인까지 마치고 나서야 안심이 된다는 듯 앞을 비켜주었다.
임신한 몸으로 뛸 수는 없었지만 그동안 도망치면서 배운 경보로 열심히 마당을 지나 현관문 앞에 도착했다. 문을 열려는데 안쪽에서 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게 무슨 소리야! 서, 설마…. 권태범과 내 사이에도 집안의 반대가 있는 걸까?
우울한 생각에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며 집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내 기척을 느낀 권태범과 그를 꼭 닮은 중년의 남성이 나를 바라보았다.
“여긴, 하아….”
제일 먼저 나를 발견한 권태범이 말문이 막힌 듯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내 옆에 서 있는 명훈 아저씨를 매서운 눈길로 노려보았다. 나는 약속대로 아저씨를 지켜주기 위해 그 앞을 가로막았다. 아저씨는 그런 나와 권태범의 눈치를 보다 90도에 가깝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옳지. 왔네. 내가 있을 줄 알았어! 권태범, 이 불효막심한 놈 같으니라고!”
어느새 내 앞까지 다가온 회장님이 박수를 치며 나를 반기셨다. 얼떨결에 준비도 안 하고 첫인사를 드리게 된 탓에 잔뜩 긴장해서 입을 열었다.
“아, 안녕하세요…. 차유원이라고- 흡.”
“그래 너구나, 아가!”
고개를 숙이려는데 회장님이 내 두 손을 꽉 잡았다. 감격스러운 얼굴로 눈물까지 훔치더니 꽉 잡은 손을 위아래로 흔들어댔다.
“우리가 드디어 만나는구나! 너무 보고 싶었다, 새아가!”
“네? 아, 새, 새아가…. 가, 감사합니다.”
이미 내 존재에 대해서 알고 계셨나? 그리고 생각보다 꽤…. 나를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은 느낌이다. 예상과 다른 반응에 삐딱한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는 권태범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권태범이 다가와 내 손에서 회장님의 손을 떼어 놓으며 말했다.
“얼굴 봤으면 이만 돌아가세요.”
“크흠. 싫다.”
“아버지.”
권태범이 목소리를 낮추며 회장님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회장님은 내 뒤로 숨더니 권태범을 향해 소리쳤다.
“이렇게 된 거, 당분간 여기서 지내련다!”
여기까지가 조금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팔짱을 낀 채 회장님을 노려보는 권태범과, 그런 권태범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주방장 아저씨가 내온 토끼 모양 사과를 맛있게 드시는 회장님 사이에 앉은 나는 아주 죽을 맛이었다.
“태, 태범 씨… 저 숨 막혀요….”
이 삭막한 공기 속에서 숨을 쉬는 게 힘들었다. 내가 조용히 속삭이자 권태범이 내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아 내 상태를 살폈다.
“숨 크게 쉬어봐.”
“흐윽, 후, 후우….”
너무 긴장해서 그런가 숨을 쉬는 게 힘들었다. 호흡을 제대로 하지 못하자 손에 땀까지 났다. 그를 따라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고 내뱉자 숨이 점차 고르게 쉬어졌다.
“이, 이제 괜찮아요….”
“많이 안 좋으면 병원 갈까?”
“그래 아가, 당장 병원부터 가자. 아니지, 최 박사한테 연락을…!”
나보다 당황한 얼굴로 핸드폰을 꺼내 든 회장님을 말리며 급히 사과를 드렸다.
“아니에요! 이제 진짜 괘, 괜찮아졌어요. 걱정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새아가, 너만 괜찮다면 나야 뭐…. 정말 병원 안 가봐도 되겠니?”
“네.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위로 올라가서 좀 쉬자.”
“그, 그 정도는 아녜요….”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숨이 안 쉬어져서 어르신에게 걱정을 끼쳐드린 것도 죄송한데 나를 보러 왔다는 회장님을 두고 자리를 비울 순 없었다.
“그래, 저놈 말대로 좀 쉬거라. 내가 갑자기 찾아와서 많이 당황한 모양이다.”
“잘 아시네요. 아버지 때문에 유원이가 불편해하잖아요. 얼른 돌아가세요.”
“아, 아니에요!”
빽 하고 내가 소리 지르자 회장님은 감동한 얼굴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권태범을 노려보았다.
“새아가가 아니라는데?”
뭔가 뿌듯해 보이는 회장님을 뒤로하고 권태범은 나를 품에 안았다. 갑자기 두 다리가 공중에 붕 떠올랐다. 남의 귀한 아들을 종처럼 부려 먹는 듯한 모습에 내 얼굴이 화끈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