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밖에서 무슨 일 있었나?”
“없었어요.”
“그란디 갑자기 우찌 이러노.”
할머니는 멍하니 앉아 있는 나를 보며 물었다. 그냥 갑자기 아까 일로 머리가 먹먹했다.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대충 먹고 소파에 앉아 넋을 놓고 있자 할머니가 걱정했다.
“유원아. 아가 니 무슨 걱정 있누?”
“아, 아니요. 그냥 기분이 좀 그래서…. 죄송해요.”
“하이고, 니가 진짜 아를 배긴 했나 보다. 기분이 저리 오락가락하는 걸 보믄.”
할머니는 내 손에 잘 깐 오렌지를 쥐여 주었다.
“일단 과일 좀 먹어라. 뭐 좀 먹어야 아가도 잘 크지.”
아침 한 끼를 잘 못 먹었다고 나를 걱정하는 할머니의 모습에 억지로 입에 오렌지를 넣었다.
“윽-”
여태 잘만 들어가던 과일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 급히 입을 막고 화장실로 향했다.
“우욱- 으….”
어제 하루는 잘 먹고 잘 자고 그랬는데 아까 호빵이한테 잘못한 게 있어서 그런지 입덧이 다시 시작되었다. 물만 먹어도 물비린내가 나서 구역질을 했고, 침을 삼켜도 속이 울렁거렸다. 화장실에서 한참을 앉아 있다가 사랑방으로 건너가 자리에 누웠다. 기운 없이 누워있는 내 손과 발을 권태범이 주물러주었다.
“나 기분이 안 좋아요….”
“우리 차유원이 왜 그럴까. 어젠 밥도 잘 먹고 아까는 산책도 잘하고 왔는데.”
할머니껜 죄송하지만 그냥 우리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그의 페로몬 향이 가득한 방에 들어가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찾아온 건데 갑자기 돌아가겠다고 하면 할머니가 서운해할 게 분명해서 집에 가고 싶다고 할 수도 없었다.
“우리 유원이가 고생이 많네.”
“흑… 너무 힘들어요….”
혼자 있을 때는 그냥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옆에서 달래주는 사람이 있으니 눈물이 나왔다. 팔자에도 없는 입덧을 하는 것도 힘들고 아랫배가 콕콕 쑤시는 것도 아팠다. 호빵이는 너무 좋은데 이런 증상이 너무 싫었다.
권태범이 페로몬을 느슨하게 풀어주었다. 천천히 그의 페로몬이 나를 달래듯 포근하게 안아주는 느낌이 들었다.
“일단 좀 자자. 푹 자고 일어나.”
그가 내 눈을 가리더니 다른 손으로는 천천히 가슴을 토닥여주었다. 이렇게 누워 있으니 잠이 오긴 하는데 기분이 너무 울적했다. 자고 일어나면 이 우울한 기분이 사라지길 바랐다.
***
“으응….”
찌뿌둥한 몸을 쭉 펴고 일어나자 이미 점심때가 다된 시간이었다. 어제도 일찍 잤는데 하루에 너무 많이 자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권태범을 찾는데 주방에서 할머니와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이고, 요로코롬 해야지! 빡빡!”
“네.”
이게 무슨 소리지?
서둘러 주방으로 들어가자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있는 권태범이 보였다. 게다가 그의 손에 아까 내가 뽑은 새하얀 무가 들려있었다.
“태범 씨…? 할머니…? 지금 뭐 하세요…?”
놀라서 묻자 할머니는 별거 아니라는 듯 답했다.
“무생채 담는 법 알려주고 있제. 먹고 싶었다믄서.”
“제가요…? 아, 네! 먹고 싶었어요… 하하….”
아까 얼떨결에 핑계를 댄 말이 이렇게 나비효과로 돌아올 줄 몰랐다. 그걸 기억하고 할머니한테 배우고 있는 모습이 좀 감동적이기도 하고.
“그래서 태범 씨가 직접 배우고 있던 거예요?”
“나중에 먹고 싶을 때 해주려면 미리 배워야지.”
“고럼! 아무튼 집중혀, 권 서방.”
“네.”
할머니의 옆에서 큰 몸을 구기고 앉아 무생채를 담는 권태범을 보자 웃음이 터졌다. 답답한 듯 미간을 구기며 하나하나 알려주는 할머니도, 그런 할머니 옆에서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집중하는 권태범도. 그런 모습이 너무 좋아 그들의 맞은편에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권태범이 직접 담근 무생채를 넣고 만든 비빔밥을 먹고 할머니와 함께 근처 시장도 구경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오래 걸으니 다리가 아파 집에 돌아올 땐 또 그의 품에 안겨서 들어왔다. 옆에 같이 있는 할머니의 눈치가 보였지만 할머니는 오히려 흐뭇한 표정을 지으셨다.
“오늘은 할머니가 같이 자라고 허락해주셨어요!”
할머니는 어제까지만 해도 밀고 당겨야 한다며 같이 못 자게 해놓고선 오늘은 같이 자라며 나를 쫓아내셨다. 오늘은 당길 때인가? 아무튼 귀여우시다니까. 할머니에게 마음속으로 불경한 생각을 하고 권태범 곁에 누웠다.
“아, 좋다.”
어제의 그 우울한 감정은 어디로 가고 다시 기운이 났다. 그래서 저녁엔 아침 겸 점심에 못 먹었던 제육 쌈밥을 두 그릇이나 먹었다.
“로션도 안 바르고.”
씻고 나서 훌러덩 누워버렸더니 권태범이 로션을 들고 왔다.
“태범 씨가 발라주세요.”
권태범의 허벅지를 베고 눈을 감았다. 거친 손이지만 내 얼굴에 로션을 발라주는 손길은 매우 부드러웠다.
그 와중에도 마사지를 하듯 솜털 반대 방향으로 바르는 모습에 결국 힘을 준 입술이 느슨하게 풀어졌다.
“푸핫-”
입가에 로션을 발라줄 때 움직여서 그런지 혀끝에 화장품 맛이 났다. 그런데도 너무 웃겨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이리 와, 차유원.”
“에스테틱에서 일했어요? 푸흡, 왜 이렇게 잘해요?”
푸핫- 웃음을 터뜨리며 배를 붙잡고 뒹굴자 눈이 조금 크게 떠지던 권태범도 나를 따라 웃었다.
“아이고, 배야… 하… 웃겨서 죽을 뻔했네.”
“죽지는 말고.”
숨을 헐떡이고 열이 오른 얼굴에 손으로 부채질하자 그가 창문을 조금 열었다.
“근데 진짜 왜 이렇게 잘해요? 순간 저 숍에 온 줄 알았잖아요.”
“…튼살 크림.”
“네?”
“나중에 튼살 크림 발라주려고 미리 배웠어.”
뭐야… 씨이……. 감동이잖아.
왜 자꾸만 매번 이렇게 사람을 감동시키는 건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창피한 듯 귓가가 살짝 붉어진 권태범의 양 뺨을 잡고 입을 맞추었다.
쪼옥- 소리가 날 만큼 그의 입술에 뽀뽀를 하다가 얼굴이 조금 더 빨개진 권태범을 보고 다시금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내 남편이 세상에서 제일 귀엽다.
“아, 맞다. 회장님 몸은 좀 괜찮으세요?”
문뜩 드는 생각에 고개를 돌려 권태범을 보았다. 고개를 돌리니 그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게 눈에 띄었다. 많이 안 좋으신가? 생각보다 표정이 별로라 큰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지금은 많이 괜찮아지셨어.”
“퇴원은 하셨어요?”
“응.”
아, 그럼 괜찮겠다. 마침 내일이 어버이날이니 인사를 드리러 가면 될 것 같았다.
“잘됐다. 그럼요, 우리 내일 회장님한테 인사드리러 가요!”
어차피 내일 점심 먹고 올라가려 했으니 올라가서 아버… 음… 회장님 댁에 가서 저녁도 먹고 결혼 허락도 받아야지. 아직 익숙하지 않은 호칭에 혼자 어색한 입매를 문질렀다.
“회장님은 어떤 음식 좋아하세요?”
“…왜?”
“…네?”
‘왜’라니…? 좋아하는 음식을 물어보는 게 그렇게 당황스러운 일인가? 처음 보는 얼굴로 굳은 권태범에 내가 더 당황스러웠다. 긴 침묵 끝에 권태범이 먼저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니까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신 거 같아.”
“네? 갑자기요?”
언제는 다 나으셨다면서…? 게다가 퇴원까지 하셨는데…? 갑자기 손바닥 뒤집듯 바뀐 말에 의아해서 그를 보았다.
“그리고 굳이 안 가도 돼.”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나저나 회복하시는 게 더디셔서 걱정이네요….”
내가 도망쳤을 때가 수술실에서 나온 날이었는데 아직까지 상태가 별로시면…. 그래서 회장님의 상태를 물었을 때 권태범의 표정이 안 좋았구나.
“그럼 다 나으시면 인사하러 가요.”
“그래. 다 나으면.”
아픈 아버지를 생각하고 싶지 않은지 그는 눈을 감아버렸다. 굳은 표정을 보니 마음이 무거웠다. 미안한 마음에 권태범을 끌어안고 그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
“할머니, 그러면 다음에 또 올게요.”
헤어짐은 언제나 익숙하지 않았다. 게다가 나이가 많은 할머니를 혼자 두고 가려니 마음이 더 안 좋았다.
“할머니 진짜 서울 같이 안 가실 거예요…?”
“내가 거길 왜 가, 내 집 냅 두고.”
“저희 올라가는 김에 같이 올라가면 좋죠, 뭐…. 제가 맛난 것도 사드릴게요, 네?”
“아유, 시끄러. 얼른 올라가, 차 막힌다.”
마지막까지 매달려 꼬셨지만 할머니는 넘어오지 않았다. 할머니는 기어코 내 손을 떼어내곤 나를 조수석으로 밀어 넣었다.
“권 서방, 운전 조심히 허고. 유원이 니는 옛날만치로 팔랑팔랑 뛰어다니지 말고, 항상 몸조심해야 뎌.”
“알겠어요…. 할머니, 저 또 내려올게요.”
할머니의 모습이 손톱만큼 작아질 때까지 창문을 내다보며 손을 흔들었다. 큰 집에 외롭게 혼자 계시는 모습을 보니 어릴 적의 내 모습이 생각나 마음이 찡했다.
내가 계속 속상해하자 권태범이 휴게소에 들려 델리만쥬를 사줬다. 부드러운 빵 안에 들어있는 달콤한 크림 덕에 울적한 마음이 조금씩 씻겨나갔다.
“집이다!”
이젠 진짜 내 집이라도 된 듯 새까만 대문을 보자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천천히 열리는 대문을 지나 주차장으로 향하는데 못 보던 차 한 대가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어? 태범 씨, 차 샀어요?”
그에게 묻자 권태범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핸들을 잡는 손에 핏줄이 솟은 것도 같았고.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오랜만에 느껴보는 싸늘한 공기에 눈치를 보며 권태범을 따라 차에서 내렸다.
“형님, 오셨습니까.”
“박준석은.”
“아, 작은 형님은 지금 회장….”
“잠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