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역시나. 결국 권태범도 내가 보고 싶어서 잠을 못 잤다는 거 아니야. 이렇게 멋진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널뛰듯 두근거렸다. 이불 속에 꼭꼭 숨겨져 있는 발끝이 저절로 꼼지락거렸다.
이렇게 서로 좋아 죽겠는데 밀당을 어떻게 해….
아무리 생각해봐도 밀당 같은 걸 할 시간에 서로 마음을 표현하고 죽을 만큼 사랑하는 게 더 좋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권태범의 손을 꼬옥 잡았다.
“태범 씨, 아까 할머니가 뭐라고 한 거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
“혼날 만했지.”
“왜요? 따지고 보면 내가 꼬셔서 태범 씨가 넘어온 건데.”
“그러게, 생각해보니 억울하네.”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작게 웃는 권태범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시간이 흐르고 어둠에 적응해서 그런지 아주 조금씩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권태범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나 웃고 나서 눈썹을 문지르는 그의 사소한 행동을 지켜보다 문뜩 그의 목에 난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이건 어쩌다가 생긴 건지 물어봐도 돼요?”
한눈에 봐도 엄청 크게 난 상처였다. 깊게 팬 흉터가 조금만 잘못되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듯 보였다.
“오래돼서 지금은 기억 안 나.”
기억이 안 나는 게 아니라 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내 말에 권태범의 눈빛이 너무 슬프게 가라앉았으니까. 그래서 더 이상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저 아프진 않았을까, 걱정이 들었다. 조심스럽게 그의 흉터를 손끝으로 덧그렸다. 안타까운 마음에 가슴이 아팠다.
“지금은 안 아파요?”
“응.”
“그래도 회복되기까지 엄청 힘들었겠다.”
“…응. 많이 아프고, 많이 힘들었어.”
왜 생겼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서 그렇게 말하는 권태범을 끌어안고 그냥 그의 넓은 등을 토닥여주었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그를 아프게 하는 모든 것이 사라지기를 바랐다.
“그동안 고생하셨어요, 태범 씨. 이젠 아플 일 없을 거예요.”
권태범을 위로하며 소설 속 내용을 되짚어보았다. 큰 사건을 중심으로 떠올리며 그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건을 기억하려 했다.
‘뭐가 있었더라. 그에게 도움될 만한 일이면 좋겠는데. 헐. 맞아. 이렇게 중요한 걸 여태 까먹고 있었다니.’
소설 중반부, 권태범이 위험할 뻔했던 순간이 있었다. 거의 목숨을 위협받을 정도로 크게 다쳤었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우리가 살고 있는 집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일이 떠오르자 이번엔 내가 그를 꼭 지켜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무슨 일 있으면 제가 꼭 지켜줄게요. 내가 태범 씨 나, 남편이잖아요.”
“든든하네, 우리 남편.”
내 등에 닿는 그의 손이 작게 떨렸다. 그 일을 떠올리는 건지 애써 태연한 척해도 불안해 보였다. 피곤한 눈을 한 권태범의 등을 천천히 토닥여주며 그가 잠들 때까지 괜찮다, 괜찮아라고 속삭여주었다.
잠이 든 권태범의 얼굴을 오랜만에 보았다. 매일 나를 씻기고 재우는 건 권태범의 몫이어서 꽤 오랫동안 이 모습을 보지 못했다. 잠든 권태범을 살피다 어둡게 내린 그의 머리카락 끝을 문질렀다.
“이번엔 제가 지켜줄게요.”
눈을 감고 있는 그에게 속삭이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그와 자고 싶었지만 이렇게 있다가 잠들면 내일 할머니한테 혼나는 건 내가 아니라 권태범이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그의 얼굴을 조금 더 눈에 담고 방을 나섰다.
***
“어제는 혼자 잘 잤어요?”
“응.”
우리 둘은 어젯밤 얼굴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처럼 시치미를 딱 떼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크흠. 참말로 어제 혼자 잤어?”
“네? 다, 당연하죠!”
눈을 가늘게 뜨고 내 표정을 살피는 할머니의 시선을 피했다. 이러다가 새벽에 몰래 그를 만나고 온 걸 금방 눈치챌 거 같았다.
“그럼 됐고. 아무튼 둘이 가서 쌈 좀 뜯어 와.”
“쌈이요?”
“그랴. 자. 얼른.”
할머니는 빨간 소쿠리를 권태범에게 건네며 재촉했다. 권태범은 사랑방에서 긴 챙이 달린 모자를 챙겨 내게 씌워주었다. 할머니는 또 그런 우리의 모습이 보기 좋았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주방으로 사라지셨다.
“우와. 내려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건 언제 다 심으셨대?”
넓게 펼쳐진 밭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봄이어서 그런지 상추와 깻잎, 고추 등 다양한 채소가 푸릇하게 피어나 있었다.
“태범 씨, 고추 먹어요?”
“먹지.”
“저는 매워서 안 먹는데. 그럼 10개만 따갈게요.”
거의 가지만큼 엄청나게 큰 오이고추를 똑, 하고 떼어내는데 엄한 생각이 들었다.
“크흠. 태, 태범 씨는 상추 좀 따주세요. 많이….”
나 혼자 찔려서 식은땀을 흘렸다. 소쿠리로 얼굴을 가리고 뜨거워진 낯을 겨우 식혔다.
“후…. 요즘 진짜 왜 이러지. 왜 이렇게 야한 생각만 드는 거야.”
호빵이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은지 자꾸 음험한 생각을 하는 머리통을 세게 쥐어박았다. 빠른 손길로 고추를 다 따고 할머니가 시키지도 않은 무를 뽑으려 권태범과 멀리, 아주 멀리 거리를 두었다.
“이게, 끄응…. 왜 이렇게 안 뽑, 후… 안 뽑혀… 으앗!”
아무리 힘을 줘도 뽑히지 않는 무청을 잡고 젖먹던 힘까지 쏟아부었다. 그러다 갑자기 쑤웅, 하고 무가 뽑혀 나와 엉덩방아를 찧었다.
“악! 아으… 아파….”
“차유원!”
요란스럽게 소리를 지른 탓에 멀리서 권태범이 놀란 얼굴로 달려왔다.
“괜찮아?”
그는 급히 나를 일으켜주고 엉덩이에 묻은 흙까지 털어주었다.
‘아우 창피해. 호빵이도 미안.’
놀란 얼굴로 내 몸 구석구석 살피는 권태범에게 어색한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하아… 이거 나 주고 그냥 가만히 있어. 시킨 적도 없는 무는 왜 뽑은 거야.”
“그냥… 무생채… 먹고 싶어서요.”
급한 대로 변명을 늘어놓고 그의 손을 잡은 채 다시 상추밭으로 돌아갔다. 권태범이 제 옷을 벗고 마련해준 자리에 앉아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벌레가 먹은 상추는 버리고 크기가 적당한 상추만을 고르는 그의 손길이 유려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권태범이 딴 상추로 소쿠리가 가득 찼다.
“땀난 것 좀 봐. 많이 더워?”
일은 권태범이 다 했는데 겉모습만 보면 내가 다 한 것 같았다. 엉망인 손과 옷, 땀이 나는 이마. 권태범이 보기에도 웃긴지 내 밀짚모자를 벗겨내 땀을 닦아주었다.
“자 이제 가야지. 업혀.”
“괜찮은데….”
사양하는 말과는 달리 너른 등을 내보이며 무릎을 굽힌 권태범에게 홀라당 업혔다. 그의 목을 끌어안고 널찍한 등에 얼굴을 기댔다.
“태범 씨. 우리 산책할까요?”
시간을 보니 조금은 땡땡이를 쳐도 괜찮을 것 같았다.
권태범이 말없이 방향을 돌렸다. 한쪽에 피어난 개나리를 보며 솔솔 불어오는 봄바람에 기분이 좋았다. 바람을 따라 그의 시원한 페로몬 향이 느껴지자 더 기분이 좋아 웃음이 절로 났다.
“저기 앉았다 가면 좋을 거 같아요.”
“그래.”
집에서 꽤 떨어진 곳엔 큰 버드나무와 그 아래 작은 평상이 놓여 있었다. 마을 주민들이 와서 쉬는 곳인지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조심스럽게 나를 내려준 권태범이 내 엉덩이를 보며 물었다.
“엉덩이는 괜찮아? 멍든 거 아니야?”
“괜찮거든요! 세게 넘어진 것도 아니라.”
“그래도 앞으로는 조심해.”
“네.”
괜찮지 않다면 지금 여기서 내 엉덩이를 확인할 거 같은 분위기라 무조건 아니라고 잡아뗐다. 평상에 누워 나뭇가지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에 눈을 감았다.
“있잖아요.”
“응.”
권태범은 손으로 눈이 부시지 않게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나는 그를 빤히 보다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져서 묻고 말았다.
“태범 씨는 내가 왜 좋아요?”
권태범이야 당연히 잘생기고, 키도 크고, 돈도 많고, 게다가 엄청나게 다정하고 나를 사랑해주니까 그렇다 쳐도 나는 그냥 너무 평범했다.
“네? 왜 좋아요? 호빵이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대답이 없다. 불안함에 입술을 깨물자 권태범이 심각한 얼굴로 내 입술을 풀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내 옆에 누웠다. 우리는 누운 채로 마주 보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당연히 너를 사랑하니까 호빵이도 사랑하는 거야. 네가 먼저야, 차유원.”
“크흠. 그, 그래요? 그럼 말고요….”
호빵아 미안. 네 아빠 내가 먼저래….
자식보다 나를 더 사랑한다는 말에도 심장이 거세게 뛰는 걸 보면 내가 생각해도 참 철없는 아빠였다.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술을 꾹꾹 누르며 고개를 돌렸다.
“그럼 왜 좋은 건데요?”
“너니까.”
“엑. 그게 뭐예요.”
나는 그를 좋아하는 이유를 지금껏 백번은 얘기했겠구먼, 그냥 차유원이라는 말에 김이 샜다.
“내 인생에 들어온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차유원이어서. 그래서 좋아.”
권태범은 나를 사랑하는 이유가 그걸로 충분하다는 듯 더없이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따뜻한 눈빛에도 갑자기 가슴이 찌릿하며 불길한 마음이 들었다. 갑자기 왜 이러지…?
날카로운 바늘로 심장을 콕콕 쑤시는 것처럼 가슴이 아려왔다. 숨을 쉴 때마다 호흡이 불안정해지며 눈앞이 흐려졌다,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유원아?”
“아, 네.”
나를 부르는 소리에 숨을 꾹 참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만 가자. 할머님 기다리시겠다.”
“네, 그래요….”
그가 다시 등을 내밀어 탄탄하고 따뜻한 등에 업혔다. 그런데 왜인지 모를 불안감에 입술을 잘근거렸다. 그와 함께하는 미래를 꿈꾸며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길은 이상하게 심장이 불길하게 두근거렸다. 진짜 차유원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내게 적색 신호를 보내며 경고하는 기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