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66)화 (66/136)

#66

옷장 안에 가득한 명품 브랜드 로고가 딱 박힌 옷과 식탁과 서랍 함에 쓰인 브랜드 이름을 보자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권태범이 은근슬쩍 내 시선을 피했다.

“이거 다 태범 씨가 사드린 거예요?”

“크흠. 그려! 우리 권 서방이 해준 건디, 와?”

할머니는 권태범의 편을 들었다. 궈, 권 서방? 언제부터 호칭이 저렇게 바뀐 거야?

“할머니, 궈, 권 서방이라뇨.”

“고럼 살림까지 합쳐뿔고 이제 와서 무신.”

거침없는 할머니의 말에 뒷목이 뜨거웠다. 손으로 급히 부채질을 하는데 할머니가 안마의자 리모컨을 띡- 하고 누르며 말했다.

“왔으면 퍼뜩 손부터 닦고, 짐 풀고 나와라. 할미도 한 5분 정도 남았으니께.”

오랜만에 보는 내가 반갑지 않은 건지 할머니는 손을 훠이훠이 저으며 눈을 감았다.

“할머니, 그래도 손주 왔는데 얼굴 한 번만 보여주시면 안 돼요?”

새까만 선글라스에 가려 할머니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는 선글라스를 벗어 신줏단지 모시듯 조심히 케이스에 넣었다.

“됐냐?”

“네에…. 그럼 옷만 갈아입고 나올게요.”

하아…. 결국 반쯤 포기하고 나보다 익숙하게 방을 찾아가는 권태범을 따라갔다.

“언제부터예요?”

“글쎄. 내가 남는 집이 좀 많아서.”

“이 집도 태범 씨 거예요?”

어쩐지 집이 엄청 넓더라. 이렇게까지 신경 안 써줘도 되는데. 내가 미안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자 권태범이 내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짐을 내려놓았다.

“차유원 할머니면 나한테도 가족이지.”

그건 그렇긴 한데…. 그래도 에르메스 선글라스는 좀 과하잖아!

이러다가 할머니 집이 강도의 표적이… 될 일은 없겠구나. 무섭게 생긴 조폭들이 딱하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집에 누가 감히 들어올까.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이렇게까지 해줄 거라고 생각도 못 했는데.”

“그래.”

권태범은 늘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해줄 수 없는 일을 해주었다. 내가 진짜 생각하지도 못한 일을 대신 해준 그를 꽉 안았다.

“근데 할머니한테 아직 말씀 안 드렸죠?”

“응.”

“많이 혼날까요?”

“각오해야지.”

아직도 눈을 감으면 한 손엔 프라이팬과 다른 한 손엔 뒤집개를 들고 나를 보던 할머니의 모습이 생생했다.

“우리 할머니 진짜 무서운데….”

“나도.”

“풋-”

웃음이 터졌다. 권태범도 할머니가 무섭다니. 역시 이 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건 차유원의 할머니였다. 손깍지를 껴서 잡고 결연하게 방을 나섰다.

“아이고, 시원타. 항상 잘 쓰고 있네, 권 서방.”

“할머니. 드릴 말씀이-”

“그랴, 우리 똥강아지 그동안 공부 많이 했어? 살이 쪼매 붙은 것도 같고.”

“네네, 할머니 근데요-”

안마 의자에서 나온 할머니가 내 손을 주물럭거리다 혀를 찼다.

“오메, 아직도 삐쩍 골았네. 안 되것다. 할미가 니네 온다고 밥해놨으니까 쪼매만 기다리고 있어.”

후다닥 주방으로 향하는 할머니의 발걸음이 우사인 볼트 못지않았다. 결국 1차 시도는 보기 좋게 실패했다. 권태범도 은근 긴장을 했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잘 먹겠습니다.”

“그랴. 더 있으니께 팍팍 먹고. 권 서방 자네도 많이 들게.”

사실 또 입덧을 할까 봐 입덧을 줄여주는 약을 먹고 왔는데 다행히 효과가 있는지, 아니면 호빵이가 효자인지 밥이 잘 들어갔다.

“아참. 동치미도 무쳐놨는디, 기다려봐라. 갖고 올테니께.”

“으니으요!”

오랜만에 매슥거리지 않아 정신없이 먹다가, 음식을 더 가져온다는 할머니의 말에 손을 내저었다. 지금만 해도 너무 많았다. 그러나 어느새 할머니는 냉장고에서 반찬통을 꺼내 내 앞에 놓아주었다.

“우리 강아지가 젤로 좋아하는 거라 할미가 진즉 해놨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반찬이라는데 나는 처음 본다. 동치미는 그냥 새하얀 무만 떠올랐는데 이렇게 무쳐서 먹기도 하는구나. 동치미를 참기름과 매실청, 고춧가루에 버무렸는지 고소하고도 새콤달콤하니 엄청 맛있었다.

“잘 먹으니 보기 좋네.”

내가 잘 먹으니 할머니도 기분이 좋은지 흐뭇한 얼굴로 내 앞에 반찬을 밀어주었다.

“그래서 일요일에 올라간다고?”

“네. 여기까지 왔는데 할머니 밥 실컷 먹고 가려고요.”

“그랴, 잘 생각했어. 또 뭐 먹고 싶은 건 없고?”

“네. 이제 엄청 배불러요.”

안 그래도 이제 10주 차가 넘어가니 슬슬 배가 나오기 시작했다. 밥까지 많이 먹어 두둑해진 배를 문지르자 권태범도 식사를 마친 건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설거지는 제가 하겠습니다.”

“그려.”

이번에도 할머니는 쿨하게 권태범에게 뒷정리를 맡기더니 나만 데리고 주방을 나섰다. 반찬 그릇을 정리하는 권태범을 뒤돌아보며 머뭇거렸지만 할머니의 힘은 엄청 셌다.

“유원아. 저놈이 잘해주냐?”

나를 데리고 안방으로 들어온 할머니는 조용히 물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할미한텐 솔직하게 말해도 뎌.”

‘이, 이미 많이 늦은 거 같아요.’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저었다.

“엄청… 잘해줘요. 과분할 만큼. 그래서 되게, 되게 행복하고 저 사람이 너무 좋아요.”

“나이도 너보다 훨씬 많은데도 좋으냐? 그것만 생각하면 할미 혈압이-”

할머니는 다시 생각하면 한숨만 나온다며 뒷목을 부여잡으셨다. 혹시나 할머니가 쓰러지실까 봐 걱정이 되었다. 근데 입장을 바꿔서 내가 차유원의 할머니어도 그랬을 것 같았다.

네다섯 살 차이도 많은데 차유원과 권태범은 9살이나 차이 났으니. 어린 차유원을 홀랑 잡아먹은 권태범이 도둑놈이지, 뭐.

“예전부터 그놈이- 아니여, 이제 와서 무신.”

“네?”

‘예전부터?’

예전부터 뭐였다는 거지? 내가 되물었지만 할머니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화제를 돌렸다.

“아무것도 아녀. 아무튼 아가. 힘든 일 있음 할미한테 말하고. 알겠지?”

“네. 그럴게요.”

다짐에 다짐을 하자 할머니가 장하다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다정한 할머니의 손길에 또다시 죄책감이 피어나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진짜 차유원도 아닌데 할머니의 과분한 사랑도 받고, 되돌릴 수 없는 일도 저질렀다.

권태범의 아이를 가진 건 절대 후회하진 않지만, 할머니께는 너무 죄송했다. 하지만 지금 말이 나왔을 때 할머니께 모든 사실을 털어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자세로 바르게 앉아 침을 꿀꺽 삼키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할머니, 저 있잖아요-”

“우리 유원이만 행복하면 됐어. 요새 꿈은 잘 안 꾸고?”

또다시 할머니가 내 말머리를 잘랐다.

근데 꿈…? 몽유병을 말하는 건가? 그나저나 할머니도 알고 계셨어?

“매일 밤 끙끙거리면서 울어 싸더니 요즘은 괜찮아진 거 같던디. 할미 모르게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할머니의 말에 일기장에 쓰여 있던 차유원의 이야기가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젠 안 그래요. 이제 이상한 꿈도 안 꾸고 힘든 일도 없으니까 할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려, 이제 할미 걱정 안 해.”

할머니는 그러고 나서도 두어 번 내게 권태범에 대한 질문을 하시다 겨우 안도하셨다.

“할머니, 망고 또 사 왔어요. 이번에는 애플망고도 사 왔는데 우리 얼른 먹으러 가요.”

주방에서 나는 물소리가 그친 걸 보니 설거지가 끝이 난 모양이었다. 할머니를 거실로 이끌었다. 그렇게 임밍아웃 2차 시도는 또다시 실패했다.

***

이번에도 권태범이 과일을 내왔는데, 몇 번 해봐서 그런지 이번에는 먹기 좋게 잘 깎아서 가져왔다. 푸흐- 완전 권태범네 부하들이 알면 기절할 일이었다.

“우왓, 샤인 머스캣!”

“천천히.”

“느에-”

알이 엄청 커서 두 개를 입에 넣자 볼이 빵빵하게 부풀었다. 흘린 과즙을 자연스럽게 닦아준 권태범이 할머니께 말했다.

“이것도 한 번 드셔 보세요.”

“크흠.”

할머니는 어색한지 권태범이 건네는 포크를 받아 망고를 드셨다. 잘 드시는 할머니를 보고 이때다 싶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할머니 그…. 사실은 말씀드릴 게 있는데요.”

“그려, 해봐.”

듣는 둥 마는 둥, 샤인 머스캣만 둘러보며 대강 넘기는 할머니에게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꺼냈다.

“저… 할머니 증손주가 생긴 거 같아요.”

“…뭐라꼬?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거 같은데, 니 뭐라캤나 유원아?”

“할머니한테 증…손주가 생겼다고요.”

순간 할머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손에 들린 포크가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내 아랫배에 시선을 돌린 할머니가 권태범을 노려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방 이 호로 잡것들이!!”

당장이라도 권태범을 찢어 죽일 기세인 할머니의 앞을 가로막았다.

“죄송해요! 하지만 호로가 아니라 호모예요!”

“시방 지금 결혼도 안 한 총각이 임, 임신…! 아이고… 유원 아부지야, 유원 애미야. 이것 어쩌면 좋다냐….”

할머니는 털썩 바닥에 주저앉아 한탄 섞인 목소리로 차유원의 부모님을 불렀다. 할머니께서 임신 사실을 알게 되면 많이 놀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막상 저렇게 속상해하시는 걸 보니 더 죄책감이 들었다.

“죄송해요, 할머니….”

“하이고 내가 니를 두고 내려오면 안 된 기였는데.”

할머니는 볼록 나온 내 배를 보고 가슴을 퍽퍽 치셨다.

“…권 서방.”

“네, 할머님.”

올 게 왔다. 오늘 권태범의 등짝이 남아나지 않을 거였다. 할머니가 계속해서 권태범을 때린다면 내가 꼭 지켜줄 거다. 권태범은 무릎을 꿇고 앉아서 할머니의 매서운 눈초리를 받았다.

“니 정확한 나이가 몇이나 됐누.”

“서른 두 살입니다.”

“우리 유원이 나이는 알고?”

“…예.”

권태범의 대답에 할머니의 눈이 조금 더 가늘어졌다. 못마땅하다는 듯 그의 얼굴을 훑는 할머니의 눈빛은 스산하다 못해 얼어붙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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