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분명 엊그제까지만 해도 강릉의 날씨는 쌀쌀했는데 여긴 조금 후덥지근했다. 임산부의 체온이 보통사람보다 더 높아서 그런가? 가만히 서 있는데도 뺨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권태범은 그런 나를 안고 그늘진 곳으로 걸어갔다. 휴게소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가 이러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라 이젠 익숙해졌다. 나도 조금 뻔뻔해졌다고 생각하며 그의 가슴에 몸을 기댔다.
“이제 날씨가 이제 많이 더워졌어요.”
“벌써 5월이니까.”
“그래도 우리 호빵이 태어나려면 아직 한참 멀었어요.”
권태범이 테이블 의자에 나를 내려주며 큰 손으로 부채질을 시작했다. 손이 워낙 커서 그런지 부채 못지않게 시원했다.
“출산 예정일이 10월 12일이라고 했었지?”
“네. 시간이 빨리 가면 좋겠어요. 얼른 호빵이 만나고 싶어서. 근데 조금 무섭기도 해요.”
아직 5월 초밖에 되질 않았으니 우리 호빵이를 만나려면 적어도 6개월 정도 남아 있었다. 지금도 이렇게 힘든 게 많은데 점점 배가 불러오면 어떨지 걱정되기도 하고 호빵이를 빨리 만나고 싶기도 하고 머릿속이 복잡했다.
“늦어도 7월부터는 재택근무로 돌릴 거야. 6월에 있는 중요한 프로젝트만 끝내면 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네. 태범 씨도 걱정하지 마세요. 별채에 아저씨들도 있고 하니까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얘기할게요.”
그 말에 권태범이 살짝 짜증 난다는 듯 손을 잠시 멈칫하다 다시 부채질을 해주었다. 오메가의 임신에 대해 공부를 해 보니 오메가의 아이는 임신 6개월 차 이후 급속도로 성장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 시기엔 알파의 페로몬이 충분하게 공급되어야 했다. 남자인 내가 임신했다는 사실도 믿기지 않는데 이 세계에 존재하는 알파와 오메가라는 형질이 신기했다. 알파에게 이런저런 영향을 받는 것도.
“아, 저 근데 이상한 게 있었어요.”
알파, 오메가 형질에 대해 생각해보니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그 오메가는 다른 사람의 페로몬을 맡을 수 있다고 들었는데 저는 태범 씨 페로몬밖에 못 느끼는 거 같아요. 예전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닌 거 같았는데.”
그 말에 권태범이 묘한 얼굴을 하더니 입술이 보기 좋게 미소를 지었다.
“태범 씨랑 있으면 막 마음도 편하고 배도 덜 아프고 그래요.”
계속 더 해보라는 듯 턱을 괴고 나만 빤히 바라보는 권태범이 이상해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그가 내 뺨을 톡톡 찔렀다.
“내가 차유원 알파여서 그래.”
“네?”
“내가 호빵이 아빠니까.”
헐… 그게 그런 이유라 그랬던 거였어?
오늘따라 검은색 셔츠를 입은 권태범이 졸라 섹시했다. 그늘진 이마부터 광대까지 유려한 선으로 이루어진 뼈대와 남자답게 잘생긴 눈썹. 그리고 셔츠 안에 있을 탄탄한 몸매까지. 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빠르게 권태범의 몸을 훑어봤다.
‘저, 정신 차려, 차유원. 욕구 불만도 아니고 왜 이래!’
얘는 진짜 발랑 까진 놈이었던 게 틀림없었다. 호빵이가 보고 있으니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권태범의 자태에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러다 권태범과 눈이 마주쳐 화들짝 고개를 숙였다. 뒷목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몸에 열이 조금씩 더 오를 때였다.
“형수님, 더우면 차에서 드실래요?”
“아, 아니요! 얼른 먹을래요.”
사람이 많아 조금 늦었다며 아저씨가 내 앞에 두 개의 알감자를 놓아주었다. 하나는 설탕이 솔솔 뿌려진 알감자였고, 다른 하나는 그냥 버터에만 구운 알감자였다. 설탕이 묻은 알감자를 겨우 다섯 개밖에 못 먹는다고 하니 한숨이 나왔다.
“정확히 딱 다섯 개야.”
알고 있는데 유의하라는 듯 다시 한번 말하는 권태범이 얄미워 뾰족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조금 전 야릇하고 간질거렸던 분위기는 어디 가고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아무것도 없는 알감자를 콕 찍었다.
“잘 먹겠습니다.”
“이건 안 먹어?”
“으따가 맨 므즈막에 먹을겅에여.”
뜨거운 알감자를 힘겹게 먹으며 권태범이 뺏어갈까 봐 보호하듯 손으로 가림막을 세웠다. 권태범은 준석이 사 온 커피를 마셨다.
그러고 보니 음식을 먹어도 문제가 없다. 밖에 나오자 입덧이 신기하리만큼 사라진 것이다.
“우리 호빵이는 진짜 야외 체질인가 봐요. 집에서는 음식이 안 들어갔는데 이렇게 꼭 나오면 잘 들어가요.”
“그러게. 아빠 편하라고 그러는 건가.”
“헤헤. 그런가 봐요. 엄청 착해요.”
배를 천천히 문지르며 작은 목소리로 ‘호빵아, 고마워.’ 하고 속삭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권태범이 웃음을 흘렸다. 부끄러워진 마음에 귓불을 붉히며 아껴두었던 설탕 알감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리저리 둘러보며 고심 끝에 가장 크고 설탕이 많이 뿌려진 알감자를 포크로 콱 찍어 한입에 넣었다.
알감자를 넣자마자 입안에 고소한 버터 향과 함께 단짠단짠의 맛이 퍼졌다. 진짜 너무 맛있었다. 아껴 먹기 위해 천천히 입을 오물거리며 달콤함을 오래도록 음미했다.
달달한 알감자는 순식간에 입에서 녹아내렸다. 정신을 차리니 다섯 개를 모두 먹은 뒤였다.
“벌써 다 먹었어요….”
“그래, 이제 가자.”
애처롭게 아직 많이 남은 알감자를 내려다보는데 권태범이 단번에 치우라며 준석 아저씨에게 말했다. 준석 아저씨가 들고 가는 알감자를 바라보며 출산만 하면 집에 잔뜩 쌓아두고 먹으리라 다짐했다.
“이렇게 묻히고 먹는데 애기가 아니야?”
권태범이 손을 뻗어 입가에 묻은 설탕을 가져갔다. 애라고 놀리는 권태범을 보면서도 순간 저 설탕은 원래 내 것이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쫍-”
쫍…?
혀에 닿는 달콤함과 동시에 정신을 차리자 어느새 권태범의 손가락을 입 안에 넣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헉….”
급히 그의 손을 놓고 내 침으로 젖은 권태범의 손가락을 티슈로 닦아주었다. 내가 민망해서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못하고 있자 어깨까지 들썩이며 크게 웃었다. 난생처음 보는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에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아, 큭, 미치겠, 하, 진짜 차유원.”
“죄, 죄송해요.”
저번에도 딸꾹질을 하다가 그의 손을 먹은 적이 있었는데 그래도 그땐 실수였다. 점점 열이 올라서 이러다 진짜 얼굴이 터지는 게 아닌가 싶었다. 뜨거워진 얼굴을 문지르자 권태범이 내 손을 잡아 내리며 붉어진 내 얼굴을 감상했다.
“애기야.”
“힛- 노, 놀리지 말아요….”
“여보야.”
“헉.”
부끄러워 눈을 꽉 감았는데 자꾸만 나를 유혹하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래… 씨…. 여보라고 부르는 권태범 보고 싶다. 결국 실눈을 뜨자 권태범이 내 양쪽 뺨을 쥐며 입을 맞추었다.
쪽-
“달다, 차유원.”
이미 내가 설탕을 쪽쪽 빨아 먹어서 단맛이 느껴지지 않을 텐데 권태범은 뭐가 그리 좋은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
“유원아, 일어나야지.”
배도 부르고 날도 따뜻해서 그런지 차에 타자마자 잠이 들어버렸다.
“으응… 피곤해애….”
하지만 자도, 자도 잠이 부족했다. 나를 깨우는 손길을 밀어내자 누군가 나를 달랑 들어올렸다.
“이제 진짜 다 왔는데.”
이마에 입을 맞춘 권태범이 속삭였다. 간지러운 느낌에 결국 졸린 눈을 힘겹게 떴다.
“저 졸려요….”
“그럼 할머니 뵈러 안 갈 거야? 다시 서울 돌아갈까?”
“어! 아, 아뇨, 저 내려주세요.”
뒤늦게 정신이 들어 발을 바동거렸다. 하지만 나를 감싸 안은 단단한 손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고 결국 그의 뺨에 입을 맞추고 나서야 권태범은 나를 내려주었다.
“우와, 근데 여기가 할머니 집이구나.”
계약이 끝나 가게를 접고 제천으로 내려간다고 하셨을 때, 금전적으로 어려우신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을 보니 우리 할머니, 알고 보면 땅 부자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도 집이 아주…. 으리으리했다.
“형님, 형수님. 오셨습니까.”
“그래. 수고가 많다.”
“아닙니다!”
낯선 얼굴에 권태범의 뒤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자 보는 아저씨들이 감격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형수님!”
“형수님, 저는 신정수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아, 혹시 저희 할머니 지켜 주시는….”
“맞습니다!”
“아! 그렇구나. 아저씨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이분들은 제천에 계셔서 처음 뵙는 거구나. 감사한 마음에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아저씨들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그래. 오늘은 내가 있을 테니까 이만 들어가서 쉬어.”
“감사합니다, 형님!”
권태범은 지갑에서 노란 지폐를 있는 대로 꺼내 남자들에게 건넸다. 그것을 받아 든 아저씨들은 90도에 가까운 인사와 함께 멀리 사라졌다.
“들어가자.”
“네.”
오랜만에 뵙는 할머니는 어떻게 하고 사시나 궁금했다. 무얼 하고 계신지 벨이 눌린 지 오 분이나 지나고 나서야 현관문이 열렸다.
마늘을 빻고 계시나? 집 안에서 진동 소리가 들려왔다. 의아해하며 들어가자마자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하, 할머니? 이게 뭐예요?”
“왔냐, 우리 강아지.”
할머니는 거실 한쪽에 자리 잡은 안마의자에 누워 계셨다. 그것도 까만 선글라스를 멋들어지게 낀 채.
“뭐 하긴. 안마 받지. 아이고, 세상에 이리 좋은 게 다 있었다니. 참말로 좋다.”
차유원 할머니 정말 땅 부자가 맞는 건가? 아니면 로또라도 맞으신 건가? 그래서 가게도 접으신 거고?
집이 무척 호화스러웠다. 심지어 살짝 열린 문 틈으로 보이는 안방에는 자개함까지 있었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차유원도 금수저가 분명했다. 어…. 근데 이거 어딘가 익숙한 브랜드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