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네. 지금 막 청소까지 싹 끝내놓고 오는 길입니다.”
“수고했어.”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눠도 시큰둥한 얼굴로 권태범의 호랑이 문신을 구경했다. 살짝 드러난 옷 사이로 보이는 호랑이 문신을 보니 큰 백호가 생각나기도 했다. 단단한 피부 위로 호랑이 그림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이는데 권태범이 방을 나서며 나한테 말했다.
“아직 다 꾸민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한 번 가보자.”
“뭔데요?”
‘제가 봐도 되는 거예요?’ 하고 그를 빤히 올려다보자 권태범은 가보면 안다고 나를 재촉했다. 우리는 방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향했다.
“어? 여긴.”
여긴 권태범의 옆방이었다. 부부는 각방을 쓰면 안 된다더니 그것도 아닌가…. 권태범의 의중을 모르겠다. 그래도 그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고 절대 떨어지지 않겠다고 혼자서 다짐했다.
“우와… 귀여워!”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내 불안했던 마음이 모두 사라졌다. 따스한 느낌이 물씬 드는 방 안에는 마치 소인국에 놀러 온 것처럼 아기자기한 아기 용품이 잔뜩 놓여 있었다. 원래 내 방도 혼자 쓰기 넓었는데 그 옆방까지 함께 터놓은 듯 축구를 해도 될 정도로 엄청 넓었다.
“내려줘?”
“네네!”
흥분한 나머지 발을 대롱대롱 굴리자 권태범이 나를 바닥에 내려주었다.
“이게 다 뭐예요?”
알록달록 예쁜 아기 용품이 가득한 방을 둘러보며 그에게 물었다.
“호빵이 어린이날 선물.”
그러고 보니 오늘이 벌써 어린이날이었구나. 이런 것도 챙길 줄 알다니. 새삼 권태범이 귀엽게 느껴져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춘 후 아까부터 눈여겨봤던 곳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와! 엄청 귀여워!”
방 한쪽에 놓인 아기 침대는 엄청 작았다. 물론 호빵이한테는 크겠지만 다섯 명이 굴러다녀도 될 만큼 커다란 권태범의 침대에 비하면 엄청나게 귀여웠다. 호랑이 무늬가 그려진 이불을 만지작거리자 권태범이 저것도 보라며 뒤에 있는 아기 옷장을 가리켰다.
“이거 에르가몽인데!”
옷장 문을 열어보니 아기 옷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안 그래도 점점 아기 용품에 관심이 많아 눈여겨보았던 물건이 이 방에 잔뜩 있었다.
“헐, 이건 아직 발매 전인 신상품인데?”
영유아 발달에 좋은 교구를 집으며 그를 돌아보자 권태범이 그렇게 좋냐고 웃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 옆에 선 준석 아저씨가 간이 벽을 살짝 밀었을 땐 정말 반쯤 기절하는 줄 알았다.
“여기 키카예요?”
“키카?”
“키즈 카페요.”
방을 하나만 튼 게 아닌지, 아예 집을 키즈 카페로 만들어 놓은 권태범의 클래스에 박수를 쳤다.
“호빵이가 엄청 좋아하겠다.”
어렸을 때 정말 갖고 싶었던 볼 풀장에 들어가 누워서 배를 문질렀다. 사실 호빵이 핑계를 대긴 했지만 내가 다 동심으로 돌아온 듯 재밌었다. 속이 울렁거렸던 것도 잠시, 권태범이 준비한 것을 구경하니 어느새 해가 어두워져 있었다.
“하아. 아이고, 힘들다….”
“더 사고 싶은 거 있으면 준석이한테 말해. 아니면 전에 줬던 카드로 사거나.”
“네. 근데 세상에 존재하는 아기 물건은 태범 씨가 다 산 거 같아서 더 안 사도 될 거 같아요.”
역시 돈이 최고다. 안 그래도 멋져 보였던 권태범이 더 멋지고 더 예뻐 보였다. 고생한 권태범의 볼에 입술을 맞추자 그가 씨익 웃으며 내 입술에 입을 맞춰왔다.
“자 이번엔 차유원 어린이 선물도 보러 가야지.”
“제 거도 있어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는데 권태범은 말없이 미소만 지은 채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어? 여긴 권태범, 아니 우리 방이잖아.
고개를 갸우뚱하자 그가 드레스 룸을 열었다.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지 몰라서.”
“미, 미친.”
“고운 말.”
“아니, 그래도!”
무슨 명품 숍에 온 줄 알았다.
“그때 옷 사러 같이 못 간 게 마음에 걸려서.”
“그래도 사주셨잖아요. 티셔츠랑 재킷이랑 엄청나게 많이.”
내 말에 조용히 웃는데 그의 눈빛이 마치 ‘그거 가지고 되겠어?’ 하는 듯했다.
“근데 태범 씨 옷은요?”
원래 권태범의 드레스 룸은 전부 내 옷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냥 한쪽만 내줘도 됐는데 이렇게 하면 태범 씨가 불편하지 않을까? 그가 걱정하지 말라며 한쪽 벽을 쭉 밀었다.
“오…. 아예 방을 개, 개조하셨네요.”
“나중에 호빵이 옷도 넣어야 하니까 겸사겸사.”
아예 한쪽 방을 터서 옷 방을 늘린 스케일에 입이 벌어졌다. 호빵이 옷을 넣어야 한다면서 빈 곳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옷들이 빽빽했다. 그다음으로 권태범이 나를 데려간 곳은 1층에 있는 그의 서재 바로 옆방이었다.
“여긴 또 무슨 방이에요?”
“이제 슬슬 몸이 무거워질 텐데 그러면 움직이기 힘들잖아. 여기서 공부하는 게 어때?”
‘여기서…? 역시 학원에 다니지 말라는 말일까?’
내부는 완전 수험생 공부방처럼 완벽하게 꾸며져 있었다. 여기도 너무 좋긴 하지만 학원에서 다른 친구들과 같이 공부하고 싶었다.
“저 학원 계속 다니고 싶은데… 그러면 안 돼요?”
눈치를 보며 물어보자 권태범이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내 작게 웃었다.
“차유원이 그러고 싶다는데 왜 안 돼. 학원을 가지 말라는 게 아니라 온실까지 왔다갔다 하면 힘드니까 여기서 공부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보는 거였어.”
“아….”
아, 맞아. 그러고 보니까 매일 유리 온실에서 공부했었는데. 몸이 무거워지면 거기까지 가기 힘들겠구나. 괜히 머쓱한 마음에 뺨을 긁으며 웃었다.
“바로 옆방이니까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봐도 되고. 아니면 내 서재에 책상 하나 놔줄까?”
“아니요, 괜찮아요. 여기서 하면 되죠.”
그가 일하는 데 방해가 되기는 싫었다. 그리고 권태범의 직업이 직업인지라 내가 알면 안 될 내용도 있을 거고. 새삼스럽게 이 다정한 남자가 조폭이라는 사실이 이해가 안 갔다. 사실 조폭보단 조폭 회사가 기반인 건설 회사의 전무였지만. 그게 그거지 뭐….
권태범이 만들어 준 공부방을 둘러보는데 뒤에 선 그가 말했다.
“내일 병원 갔다가 할머님 뵈러 갈까?”
“진짜요? 태범 씨 시간 괜찮아요?”
“응.”
“좋아요…. 할머니 보고 싶어….”
매일 전화는 드렸지만 그래도 직접 찾아뵙는 거랑은 다른 문제였다. 게다가 할머니께서 제천으로 내려가신 뒤에 한 번도 찾아뵙지 못한 게 마음에 쓰였다. 또 눈물이 나올 거 같아 훌쩍이자 권태범이 나를 꽉 안아주었다. 임신을 해서 그런지 시도 때도 없이 감정이 오락가락하며 쉽게 눈물이 났다. 권태범의 품에서 실컷 어리광을 부리다 다시 침실로 돌아왔다.
“저 근데 회장님은 괜찮으세요?”
이불 속에 파묻혀 고개만 빼꼼 내밀고 물었다.
“아직 요양 중이셔. 왜?”
“그, 저, 저도 인사드리러 가야 하니까요.”
조금 부끄러운 마음에 우물쭈물 말하자 그가 차차 생각해 보자며 내 가슴팍을 토닥여주었다. 아까 늦게까지 잠을 잤지만 다시 노곤해져 조금씩 잠이 몰려왔다.
“천천히 하자. 아직 무리하면 안 되잖아.”
“네에…. 그럴… 게요.”
임신 초반부터 많은 일이 일어난지라 호빵이를 위해서라도 당분간 조용히 지내기로 했다. 수마에 빠져드는 가물가물한 뇌리로, 괜히 나 때문에 권태범이 하루 종일 굶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범 씨…. 뭐라도 챙겨 드세요…. 꼭이요….”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입술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며 완전히 잠에 빠져들었다.
***
아침 일찍 일어나 집 근처에 있는 유명한 산부인과도 다녀오고 다다음 주에 있을 기형아 검사도 예약하고 왔다. 병원에 들른 김에 초음파 검사도 다시 해보고 피 검사랑 소변 검사까지 마쳤다. 며칠 동안 식단 조절을 한 효과가 있을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당 수치가 많이 떨어져 권태범에게 칭찬을 받았다.
덕분에 오늘은 과일을 많이 먹어도 된다고 해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샤인 머스캣과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망고를 들고 제천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알감자에 설탕 솔솔 뿌려 먹고 싶어요.”
“안 돼.”
갑자기 밀려드는 요의에 급하게 휴게소에서 내렸다. 볼일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길게 늘어선 간식 코너가 눈에 들어왔다. 고소한 버터 향이 나는 곳에서는 탱글탱글한 알감자가 뽀얀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제가 아니라 호빵이가 먹고 싶대요.”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권태범의 팔을 흔들며 졸랐다.
“호빵이도 안 돼.”
“왜요. 여기까지 왔는데…. 그럼 하, 핫도그는요…?”
“설탕 없이?”
“설탕 없는 핫도그가 있어요?”
“차유원.”
씨…. 휴게소까지 왔는데 못 먹게 하는 권태범이 미웠다. 화장실이 가고 싶어 들른 거긴 했지만 알감자도 엄청 먹고 싶었다. 알감자는 설탕에 소금을 살짝 뿌려 한입에 넣는 게 국룰인데 설탕 없이 먹으라니. 이건 정말 국가법에 위반하는 행위였다.
“대신 과일 먹기로 했잖아. 이따 샤인 머스캣 먹기 싫어?”
이젠 수준급으로 나를 달래는 그의 스킬에 감탄하다가도 뒤에서 꼬맹이가 맛있게 먹는 알감자가 눈에 들어와 슬퍼졌다.
“흐윽…. 제가 먹고 싶은 게 아니라, 흣, 우리 호빵이가 먹고 싶은 거라고요!”
나를 쳐다보지도 않는 권태범이 미워 눈물이 나왔다. 내가 먹고 싶은 게 아니라 호빵이가 먹고 싶은 건데. 게다가 하루 종일 먹지도 못해서 속도 쓰린데… 흑.
“대신 딱 세 개만이야.”
“다섯 개….”
눈물이 그렁한 내 눈을 쓸어주며 권태범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결국 그는 준석 아저씨에게 말했다.
“설탕 뿌린 거랑 아무것도 안 뿌린 거 하나씩 사와.”
“네, 형님.”
“아저씨!”
내 부름에 뒤를 돌아본 준석 아저씨한테 윙크를 했다.
“소금도 살짝 뿌려주셔야 해요!”
아저씨가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지만 나는 웃음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