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63)화 (63/136)

#63

“저 몸은 조금 힘들어도 지금 엄청 행복해요. 제가 그동안 이상한 오해를 하는 바람에 되게 슬프고 외로웠거든요.”

내 등을 천천히 쓸어주는 그의 손길을 느끼며 어리광을 부리듯 권태범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볐다.

“저 진짜 좋아하는 거 맞죠?”

“그래.”

“저도 태범 씨 엄청 좋아해요…. 사실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았어요. 근데….”

처음에는 그가 원작에서처럼 미친 광공일까 무서웠고, 다정한 그의 모습을 보면서는 나를 향한 그의 사랑이 윤설아에게 돌아갈까 무서웠다. 근데, 그런 불안한 마음과는 달리 그가 너무 좋았다. 권태범과 함께 있는 모든 순간이 다 행복했다.

“제가 겁쟁이라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했어요.”

“괜찮아. 내가 다 알고 있었으니까.”

다 알고 있었구나. 왠지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의 가슴팍에 파고들어 얼굴을 숨기자 그가 나를 꽉 껴안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사랑해, 차유원.”

“네?”

갑자기 사랑한다는 그의 말에 깜짝 놀라 권태범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입을 벌리고 눈을 깜빡이자 권태범이 입을 맞추었다.

“사랑해, 유원아.”

얼굴뿐만 아니라 몸 전체에 화르륵 열이 오르며 숨이 가빠졌다. 심장이 터질 듯 빠르게 뛰어 심장 소리가 그에게 닿지 않을까 걱정되는 수준이었다.

근데, 그래도 너무 좋다…. 권태범이 나 사랑한다는 거잖아.

이젠 원작처럼 그가 막 엄청 집착하고 감금해도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순 없을 것 같았다. 그만큼 나도 이제 권태범을 좋아하나 보다. 너무 좋으면서도 부끄러워 시선을 살짝 피하자 그가 나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사랑해.”

“…….”

“사랑해.”

“한 번 더요. 한 번 더 말해주세요.”

“사랑해, 차유원.”

나를 보며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말에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나도요. 나도 엄청 사랑하고 있어요.”

그 말과 동시에 그가 천천히 다가와 눈을 살짝 감았다. 입술에 그의 숨결이 닿았다. 입안을 가르고 들어오는 그의 혀를 감싸 안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달콤하고 촉촉한 키스를 나누며 오랫동안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

“잘 잤어?”

언제 또 스르르 잠든 것인지, 눈을 떠보니 점심때가 훨씬 지난 시간이었다. 내 옆에 앉아 불편한 자세로 서류를 넘기는 권태범을 보자 조금 미안해졌다.

“서재에서 하시지….”

“괜찮아.”

권태범은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 나를 일으켜 주었다.

“밥은.”

“조금 먹을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래, 먹으러 가자.”

근데 권태범은 여태 밥도 안 먹은 건가? 내가 힐끔거리자 권태범이 부드러운 얼굴로 내게 물었다.

“왜. 무슨 할 말 있어?”

“아, 아뇨. 그냥 잘생겨서….”

“그래, 다 네 거야.”

맞아. 다 내 거다. 푸흐- 하고 웃음이 터져 나오는 입가를 가렸다. 들뜬 마음에 공중에 뜬 발을 이리저리 흔들자 그가 나를 추슬러 안고 주방으로 내려갔다.

“어, 아저씨!”

“유원 님!”

얼른 권태범에게 내려달라고 한 뒤 주방장 아저씨한테 달려갔다. 뒤에서 못마땅한 듯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이젠 더 이상 권태범이 무섭지 않았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조금 마른 것…이 아니라 살이 조금 붙으셨네요?”

“헤헤….”

“사 먹는 음식이 더 맛있으셨나 보네요.”

“에이, 아저씨 요리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죠!”

약간 서운한 얼굴로 나를 보는 아저씨를 향해 장난스럽게 웃었다. 주방에서 나는 맛있는 냄새에 코를 킁킁거리며 아저씨한테 물었다.

“엄청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 메뉴가 뭐예요?”

“된장찌개랑 불고기요. 얼른 앉으세요, 형님도 아직 식사 전인데.”

“불고기 짱 좋아요!”

권태범이 의자를 빼주어 후다닥 자리에 앉았다.

“맛있게 드십시오.”

음식을 따뜻하게 데워온 아저씨가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팽이버섯이 잔뜩 들어있는 불고기를 한 움큼 집어 입에 넣었다. 짭조름하고 달콤한 고기를 하얀 쌀밥이랑 먹으니 너무 맛있었다. 입맛이 없었던 게 다 거짓이었는지 술술 잘 들어갔다. 권태범이 숟가락 위에 올려준 백김치도 야무지게 잘 먹었다.

“잘 먹네.”

“엄청 맛있어요! 역시 주방장 아저씨, 짱짱!”

천천히 먹으라며 흥분한 나를 달래는 권태범을 뒤로하고 그다음으로 된장찌개를 향해 숟가락을 뻗었다. 두부와 애호박을 큼지막하게 썰어 넣은 된장찌개를 덜어 밥이랑 비벼 크게 한술 떴다.

“저 된장찌개도 엄청 먹고 싶었어요.”

도망 다닐 때 생각보다 한식을 잘 먹지 못해서 그런지 오랜만에 먹는 된장찌개가 엄청 반가웠다. 권태범이 내 입가에 묻은 밥풀을 떼어준 순간이었다.

“우윽-”

익숙한 기시감과 함께 입 안 가득 퍼지는 비린내에 급히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차유원!”

“유원 님!”

나를 따라오는 두 사람을 뒤로하고 입 안에 들어있는 음식물을 모두 토해냈다.

“우엑- 윽….”

쾅쾅-

“유원아, 괜찮아? 문 좀 열어봐.”

“욱- 흐으… 싫어, 요!”

당장이라도 문을 부수고 들어올 것처럼 문을 두드리는 권태범을 향해 소리쳤다. 지금 생각해보면 지난번 할머니 집에서 토했을 때도 입덧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때는 곧장 나를 따라 화장실 안으로 들어온 권태범이 내 등을 계속 두드려줬었지.

더럽지도 않은지 토하는 내내 내 등을 두드려준 그가 고마우면서도 나중에 생각하니 엄청 부끄럽고 창피했다. 이번에도 분명 그가 나를 따라올 거라는 생각이 들어 화장실에 들어오자마자 문을 꽉 잠갔다.

“유원아. 괜찮으니까 문 좀 열어봐. 어?”

“저는 괜, 우욱-, 흣, 괜찮아요.”

몸속에 있는 내장이 전부 토해질 듯 위가 꿀렁거려서 결국 오늘 먹었던 것을 모두 게워냈다.

“하아… 주, 죽겠다.”

한참을 변기를 붙잡고 숨을 고르다 칫솔을 찾았지만, 여긴 1층 화장실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급한 대로 입만 헹구고 나가자 열쇠를 들고 문 앞에 서 있는 권태범이 눈에 들어왔다.

“하아… 괜찮아?”

“네… 근데 조금 눕고 싶어요. 속이 매슥거려요….”

“그래 알겠어.”

권태범은 내 말에 곧장 나를 번쩍 안아 들고 2층 계단을 올랐다. 아직도 그의 손에는 열쇠가 들려있었는데 내 말을 존중해주느라 억지로 문을 열지 않은 게 분명했다. 원작과 달리 강압적이지 않은 권태범을 보자 힘든 것도 싹 사라졌다.

‘그래, 역시 원작처럼 그렇게 무서운 사람은 아니야.’

혼자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의 품에 달랑 안겨 안방으로 향했다.

“저 근데 양치하고 싶어요.”

혹시 냄새가 날까 입을 막고 조심스럽게 말하자 그가 방향을 바꿔 욕실로 나를 데려갔다.

“잠깐만 기다려.”

“태범 씨.”

권태범이 지그시 나를 바라봐 민망해져선 눈을 깜빡였다.

“그… 제 방에 가면 딸기 맛… 치약 있어요. 그걸로 할래요.”

내 말에 픽, 하고 웃은 그가 나를 욕조에 앉혀 놓고 딸기맛 치약이 묻은 칫솔을 가지고 돌아왔다.

“아- 해봐.”

“제가 할 수 있어요.”

다정한 음성에도 민망해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물러서지 않을 모양인지 허리를 굽힌 채 묵묵히 바라보기만 하는 그의 모습에 결국 입을 조금씩 벌렸다.

“착하네.”

권태범이 작게 웃고는 꼼꼼하게 양치질을 해주었다. 아프지 않게 구석구석 닦아주는 그를 보니 나중에 호빵이가 태어나도 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청 귀엽겠다….

반의반도 안 되는 어린 호빵이한테 양치질을 해주는 권태범이라니. 상상만으로도 기분 좋은 미소가 지어졌다.

“왜?”

“으으-”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개를 젓자 권태범이 입가에 묻은 거품을 닦아주며 말했다.

“다했다, 이제 우글우글하자.”

우글우글…. 이상하게 요즘 들어 권태범은 완전 나를 아기 취급했다. 내가 아기를 가진 거지 아기가 된 게 아닌데.

“우글우글 다 했어요.”

그럼에도 나를 챙겨주는 그의 모습이 너무 좋아서 더 어리광을 피워대는 거 같았다. 꼼꼼하게 젖은 얼굴을 닦아주는 권태범을 보니 가슴 속이 말랑말랑 해졌다.

‘너무 행복해.’

내게도 이런 행복이 올 거라는 걸 상상도 못 했는데. 너무 행복하고 앞으로의 미래가 기대되었다.

똑똑-

“형님, 저 준석입니다.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권태범이 입을 열었다.

“그래, 들어와.”

“아, 형수님. 속은 좀 괜찮으세요? 이럴 줄 알았으면 들어오는 길에 딸기 케이크라도 사 올 걸 그랬습니다.”

“딸기 케이크요…?”

그러고 보니 예전에 준석 아저씨가 사다 준 딸기 케이크 진짜 맛있었는데. 시트 안에 딸기도 큼직큼직하게 들어있고. 권태범을 향해 고개를 쓱 돌리자 그가 단호한 얼굴로 내 고개를 다시 돌려놓았다.

“안 돼. 이제 과자, 케이크, 아이스크림 전부 다 금지야. 너도 그렇게 알고 애들한테 전해.”

“히익, 왜, 왜요…. 설마 샤, 샤인 머스캣도…?”

“과일도 많이는 안돼.”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모습에 나는 울상을 지으며 준석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아저씨이….”

“씁, 그래도 소용없어 차유원.”

병원 진료를 받은 뒤 권태범은 내 건강에 부쩍 관심을 쏟았다. 그래도 과일을 마음껏 못 먹게 하다니. 힘없이 축 늘어지자 그가 나를 추슬러 안더니 준석 아저씨한테 물었다.

“그건 그렇고. 다 준비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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