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61)화 (61/136)

#61

“으에…?”

권태범의 큰 손에 뺨이 눌려 발음이 새어 나왔다. 그 이후에도 권태범은 쪽쪽 내 얼굴에 입을 맞추더니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의 품에 안겨 있자니 권태범의 페로몬 향이 폐부 속으로 들어찼다. 훌쩍훌쩍 눈물을 흘리며 은근슬쩍 그의 폐로몬 향을 맡고 있는데 권태범이 말했다.

“다 울었어?”

“아직 조, 조금 더 남았어요….”

당황해서 얼떨결에 저렇게 대답해버렸다. 또 피식 웃은 권태범이 물기가 남은 내 눈가를 문질러주었다.

“다 운 거 같은데.”

“근데요… 태범 씨.”

그의 품에 안겨 생각을 조금 해봤다. 그렇게 내린 결론은 이건 아니라는 것이었다. 권태범이 내가 그의 아이를 임신한 것도 알고, 장난인지 진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를 책임진다고 했지만 권태범 옆에는 윤설아가 있었다.

그녀가 있는 한 권태범과 나는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였다. 이게 바로 조연의 삶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이 상황이 슬프면서도 마음이 차츰 안정이 되어갔다.

“책임… 그거 안 해주셔도 돼요.”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그… 저 사실 다 알고 있거든요. 윤설아 씨랑 태범 씨랑 그렇고 그런 사이인 거. 그러니까 그 양육비만 조금… 지원해주시면-”

“하아….”

갑자기 그에게서 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양육비라는 말이 부담스러운 건가. 우울함에 입꼬리가 내려갔다. 권태범이 내게 그의 겉옷을 입혀주더니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태, 태범 씨?”

“직접 보여주는 게 빠르겠어.”

“뭐가요? 뭐, 뭔데요!”

병실 밖으로 나가 복도를 지나가자 사람들이 힐끔힐끔 우리를 쳐다보았다. 부끄러워서 그의 어깨를 내리치며 발을 동동 굴렀지만 권태범은 꿈쩍도 안 했다.

“유원 님, 오랜만입니다.”

“아, 준석 아저씨….”

권태범과 떨어져 있던 만큼 오랜만에 뵙는 아저씨의 얼굴이 많이… 안 좋았다. 그 이유가 나인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워졌다.

“한기찬은.”

“윤설아 씨랑 오고 있습니다.”

“윤설아 씨가 여길 왜….”

보여준다는 게 설마 이런 거야? 갑자기 여기서 윤설아의 이름을 듣게 될 줄 몰랐다. 보기 싫어. 이 상태로 윤설아와 만나기 싫어, 정말.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조금 더 거세게 그의 품에서 달아나기 위해 반항했다.

“씁. 가만히 있어. 그러다가 넘어질라.”

그러자 권태범이 아이를 다루듯 내 엉덩이를 살짝 토닥였다. 낯부끄러운 그의 행동에 뒤에서 준석 아저씨의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크흠.”

그 때문에 얼굴에 열이 잔뜩 올랐다. 얌전히 권태범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작게 숨을 쉬는데 점점 이쪽으로 소리가 가까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한기찬.”

“넵, 형님.”

윤설아가 도착한 모양이었다. 권태범은 지금 뭐하는 짓이야.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다른 사람을 품에 안으면 어떡해. 내가 안아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윤설아가 신경 쓰여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

“인사해. 여긴 내 약혼자.”

왜… 윤설아가 다른 사람과 손을 잡고 있지?

“안녕하세요, 형수님. 한기찬이라고 합니다.”

“어… 저기….”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한기찬이라는 권태범의 부하와 손을 잡고 있는 윤설아를 보며 내가 대답을 못 하고 있자 그녀가 나를 향해 인사했다.

“저희 구면이죠? 저는 윤설아라고 해요. 여기 기찬 씨랑 교제 중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앞으로는 유원 씨 공부를 도와주기로 했어요. 잘 부탁해요.”

생글생글 웃는 윤설아를 보고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가 내민 손을 마주 잡았다. 내 손을 잡고 열심히 흔드는 그녀를 보며 무언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인사는 그쯤 하지.”

“에이. 오랜만에 보니까 반가워서 그렇죠.”

“서, 설아 씨….”

권태범은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지만 윤설아는 권태범이 무섭지도 않은지 콧방귀를 뀌며 내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한기찬이라는 남자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두 사람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아니 그러니까.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냐고.

“인사했으면 이제 가봐.”

“왜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같이 식사라도-”

“설아 씨, 이만 가요. 네?”

권태범의 미간이 와락 일그러지는 것을 본 한기찬이 간절하게 윤설아를 말렸다. 그러자 알겠다며 픽 웃은 윤설아가 다음에 또 보자는 말을 남기고 차에 올랐다.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 상황에 어안이 벙벙했다.

“이게 무, 무슨 상황이에요…?”

“아직도 이해가 안 돼?”

권태범은 피식 웃더니 내 머리칼을 쓸어 넘기곤 재킷을 꼼꼼하게 여며주었다.

“한기찬이랑 윤설아는 곧 결혼할 사이야. 그러니 당연히 나랑 윤설아는 아무 사이가 아닌 거지.”

“…네?”

“그리고 애초에 난 너밖에 없었어, 차유원.”

“……네에?”

“사람을 꼬셔놨으면 책임을 지라고 했잖아, 꼬맹아.”

권태범은 어리둥절한 내 눈두덩이에 입을 맞추고 다시 병실로 향했다. 그의 품에 안겨 다시 병실로 향하는 동안 나를 바라보는 수많은 눈길이 있었지만 그런 거는 신경 쓸 새가 없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고, 저 한기찬이랑 윤설아는 왜 저러고 있는 거고. 그럼 소설 원작은 대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건지 이것만으로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병실로 돌아와 나를 침대에 앉혀주고 옷을 벗겨준 권태범이 맞은편에 앉았다.

“아니 그, 그럼 왜 별채에… 수, 숨겨두신 거예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서 마음에 속에 담아두었던 말이 불쑥 터져 나왔다. 말을 내뱉고도 스스로가 놀라 고개를 숙였다.

“숨겨?”

모르는 척을 하는 거야, 아니면 진짜 모르는 거야…? 아니면 혹시 결혼은 윤설아와 하고, 나는 정부… 그런 느낌인 건가.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속이려고 그의 부하를 시켜 연기를 하고. 또 이렇게 내가 속고 나면 뒤에서 그녀를 만나고. 드라마에서나 봤던 전개에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여기서 울면 안 돼. 차유원. 절대 울지 마. 속으로 되뇌며 입 안의 살을 꽉꽉 깨물었다. 그러자 내 뺨을 쓰다듬던 권태범이 꽉 다문 입술을 손가락으로 갈랐다. 갑자기 입 안으로 들어오는 손가락에 꽉 깨문 살덩이를 놓으며 고개를 들었다.

“지금 네가 있는 집에 알파를 들이라는 거야?”

고개를 들자 내 시선에 맞춰 허리를 숙인 권태범과 눈이 마주쳤다. 내 말에 허를 찔린 듯 당황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권태범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서늘했다.

“네? 아니-”

“차유원, 똑바로 말해. 지금 누구를 집에 들이라는 거지?”

“…그게 아니라.”

“내가 없는 집에 다른 알파랑 있다니. 어림도 없지.”

권태범은 상상만으로도 짜증 난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지금… 왜 화가 난거지? 윤설아에 대해서 내가 말을 꺼내서? 그것도 아니면… 고개를 들어 권태범의 얼굴을 바라보자 오늘따라 그의 목에 난 상처가 돋보였다.

“윤설아를 좋아해?”

뭐야. 얘기가 왜 그렇게 흘러가는 건데? 당황스러움에 화들짝 놀라며 입을 열었다.

“네, 네? 제가 왜- 태, 태범 씨가 윤설아 씨랑 그렇고 그런 사이잖아요…!”

눈을 질끈 감고 그에게 소리쳤다. 그렇게 다정한 모습으로 서 있었으면서 저보고 윤설아를 좋아하냐고 묻는 권태범의 진지한 얼굴에 어이가 없었다.

“두, 두 분이 러트도, 같이 보냈다고….”

“뭐?”

이번엔 또 무슨 소리냐는 듯 권태범이 한쪽 눈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같은 알파끼리 무슨.”

“네…?”

알파…? 내가 멍해서 눈을 깜빡이자 그가 내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내며 말했다.

“윤설아 알파인 거 몰랐어?”

몰랐다. 알파고 오메가고 이 세계에 들어와서 처음 알게 된 단어였다. 분명 소설 속에서는 이런 단어를 본 적이 없었다. 이상해서 입술을 깨물고만 있자 권태범이 짧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도대체 무슨 상상을 했던 거야? 게다가 아까도 직접 보여줬잖아. 윤설아는 한기찬이랑 만나는 거.”

“그럼 그게 다… 오, 오해였다고요?”

진짜…? 윤설아가 권태범의 집에 온 건 한기찬 때문이고, 그때 러트를 보냈다는 건….

“그, 그럼 덕분에 러트 자, 잘 보냈다고 막 그랬던 건 뭐예요?”

이건 또 어떻게 알았냐는 듯 미간을 좁힌 그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원래 예정일보다 러트가 빨리 터져서 윤설아한테 도움을 좀 받았어. 우성 알파는 억제제 성분이 좀 강해서 미리 처방받지 않으면 구하지 못하거든.”

“아….”

어떡해…. 그럼 이게 다 내 오해였다는 거잖아. 진실을 알고 나니 머리가 아찔했다.

“그동안 혼자 오해하던 게 있으면 이번 기회에 다 물어봐.”

“이제, 어, 없는데요.”

“정말?”

권태범이 붉어진 내 귓불을 장난치듯 손톱 끝으로 꾹꾹 누르며 문질렀다.

“그… 그러면 태범 씨는 저를 조, 좋아하는 거예요…?”

“좋아하기만 할까.”

그건 또 무슨 말인지…. 내가 다시 눈을 굴리며 입술을 잘근거리자 권태범이 습관처럼 내 입술을 놓아주더니 말을 이어갔다.

“환장하지, 차유원한테.”

“미, 미친.”

장난스럽게 고개를 기울여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에서 묘한 열기가 느껴졌다. 화르륵 타오른 얼굴을 가리자 권태범이 키득거리며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것보다 우리 할 얘기가 있을 거 같은데.”

“네? 뭐, 뭐가요?”

권태범은 내 아랫배를 힐끗 살피더니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시선만으로도 화들짝 놀란 가슴이 퍼덕거려 사레가 들렸다.

“쿠, 쿨럭-”

“쯧-”

혀를 작게 찬 권태범이 내 등을 천천히 문질러 주었다.

“하으….”

겨우 진정된 가슴을 쓸어내리고 권태범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푹 숙였다.

“저기…. 저, 태범 씨…. 그게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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