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히윽- 태, 태범 씨…?”
눈을 뜨자마자 나를 내려 보고 있는 권태범의 얼굴에 화들짝 놀랐다.
‘여긴 어떻게 온 거지? 그동안 코빼기도 안 보였으면서.’
일단은 무조건 잘못했다고 싹싹 비는 게 상책이었다. 두 손을 끌어모은 채 고개를 들었다.
“잘못…, 어…?”
오랜만에 보는 권태범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그동안 잘 먹고 잘산 게 아니었나? 권태범의 눈 밑에 그늘진 다크서클은 정말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근데 광공도 다크서클이 생길 수 있나…?’
나는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어디 아프세요?”
내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권태범이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었다.
“하… 너, 진짜.”
“아!”
이마에서 느껴지는 아픔에 눈을 부릅뜨고 권태범을 노려보았다.
‘씨이… 내가 뭘 잘못했다고 꿀밤이야!’
양심 없는 생각을 하며 욱신거리는 이마를 문질렀다. 눈을 뾰족하게 말아 뜨고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자 권태범이 또다시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앗 때리지 마세- 읏…!”
또 꿀밤을 때리는 줄 알고 눈을 질끈 감았다. 곧이어 다가올 아픔을 기다리는데, 꿀밤 대신 그가 내 손목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 끌어당겼다.
“하아….”
“어… 태, 범 씨?”
“다신 위험하게 그러지 마, 유원아.”
나를 소중하리만치 조심히 감싸 안고 호흡하는 권태범의 숨결이 뒷목을 간지럽혔다. 따스한 손길을 느끼자 심장이 작게 콩닥거렸다.
“무, 무슨 일 있었어요…?”
고개를 살짝 떼어내고 마주한 권태범의 얼굴이 조금 지쳐 보였다.
‘윤설아랑 무슨 일 있었나. 그나저나 여긴 어디지?’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느껴졌다.
“여기… 병원이에요?”
옷도 병원복이네…? 어색해서 병원복 끝을 잡고 눈을 깜박거리자 권태범의 얼굴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
“기억 안 나?”
“어…. 네.”
눈을 깜빡이며 마지막 기억을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분명 아저씨들을 따돌리려고 시장까지 간 건 기억나는데….
따라오지 않는 대신 절대 도망가지 않겠다고 손가락 약속까지 했는데. 아저씨들이 나한테 많이 화났으면 어쩌지? 그러고 보니 아저씨들은… 괘, 괜찮으시겠지? 권태범이 좀 무섭긴 해도 자기 사람은 끔찍하게 아끼니까….
아저씨들을 찾아 눈을 또르르 굴리자 권태범이 내 턱을 쥐며 눈을 맞추었다. 무언가 꿰뚫어 보는 것처럼 바라보는 시선을 견디기 어려워 이리저리 시선을 피하자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 아파여….”
‘권태범은 왜 이렇게 화가 난 거야…. 내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으면서.’
입을 삐죽 내밀고 고개를 들자 권태범의 시선이 내 배를 향하고 있었다.
“히윽-”
병원? 설마.
깜짝 놀란 마음에 서둘러 상의를 올려 배를 살폈다. 다행히 배를 가르거나 한 상처는 없었고 여전히 아랫배가 조금 튀어나와 있는 걸 보면 호빵이한테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았다.
“하아… 다행- 읍….”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혼잣말에 서둘러 상의를 내리고 배를 둥글게 문지르며 권태범이 들을 수 있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아아, 배, 배고파라…. 하하….”
그러면서 혹시 모를 일에 그에게서 등을 살짝 돌린 채 웅크려있자 권태범이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 넌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네? 제가 왜요…?”
“하, 윤설아랑 내가 뭐?”
권태범은 헛웃음을 내뱉더니 단추 하나를 풀었다. 이어서 넥타이까지 풀고 뻐근한 듯 목을 감싸 쥐는 모습이… 조금 섹시하네…?
‘크흠. 아니야, 정신 차리자. 보기 좋은 떡이긴 하지만 남의 떡인 걸….’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권태범에게서 시선을 떼어냈다.
‘아니. 그나저나 자기가 왜 기분 나빠 하는 거야? 혹시 내가 눈치챘다고 그런 건가? 씨이…. 내가 뭐. 정말 진심으로…는 거짓말이고 그냥 나랑 호빵이는 피해 줄 테니까 윤설아랑 잘 살라고 한 건데 왜 자기가 기분 나빠 해. 나쁘려면 내가 더 나빠야지.’
권태범이 자꾸만 이해 안 간다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봐서 내 얼굴도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윤설아 씨는 어쩌고 여기까지 오셨어요….”
스스로 생각해도 간이 배 밖으로 나오긴 한 거 같지만 여긴 병원이었다. 손을 조금만 뻗으면 너스콜이 있으니, 죽이려고 하면 난리 한 번 피우지 뭐. 내가 새침하게 턱을 치켜들며 권태범에게 묻자 그가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왜 자꾸 윤설아 얘기가 나와. 너랑 내 사이에.”
“그야 당연히-”
“차유원. 내가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라고 했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있다는 얼굴로 그가 내게 말했다. 거짓말. 그렇게 다정하게 있었으면서, 별채에 숨겨두기까지 했으면서…. 또 나를 이렇게 안심시켜놓고 나를 이용하고 윤설아에게 갈 게 분명했다. 그게 원작대로 가는 길이니.
“일단 검사마저 받고 서울로 가자. 여행은 이제 끝났어.”
뭐? 다시 집으로 간다고? 윤설아를 숨겨둔 그 집으로…?
순간 심장이 덜컥하고 내려앉았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아 가슴을 붙잡자 권태범이 당황한 얼굴로 내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차유원 왜 이래! 씹-”
그가 이를 악물고 너스콜을 누르려 했지만 나는 그의 손을 잡아 말렸다.
“괘, 흣…. 괜찮아요. 잠깐 놀라서 그래요.”
괜한 걸로 민폐를 끼치기 싫었다. 권태범에게 그러지 말라고 하자 그가 입술을 짓이겼다.
“무, 물 마시고 싶어요….”
내 말에 곧장 물을 가져온 권태범이 천천히 물을 먹여주며 내 안색을 살폈다. 당장 의사를 부를 기세였지만 나 때문에 그러지 못한 모양이었다.
“더 줄까?”
“아니요, 괜찮아요.”
입가에 묻은 물기까지 섬세하게 닦아준 권태범이 내 옷을 정리해주었다. 아까 상체를 들추다가 말려 올라간 건지 한쪽 끝이 올라가 있었다. 민망해서 괜히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고개를 돌렸다. 적막하고 어색한 시간이 흐르고 결국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기… 태범 씨. 근데 여기는 정말 왜… 온 거예요?”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온 건가?”
“그게 아니고 그… 여태 안 오셨잖아요….”
권태범이 기분 나쁜 티를 확 내며 말하는 탓에 자연스럽게 겁쟁이 모드로 그의 눈치를 보았다.
“그래. 말이 나온 김에 얘기하자, 차유원.”
“…네? 뭐, 뭐가요?”
저기 있잖아. 지금 그거 맞지? 내 스스로 무덤 판 거. 그것도 엄청 깊게 판 거 맞지, 유원아…?
권태범이 나를 번쩍 들어 자세를 고쳐 앉히더니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도망은 왜 갔어.”
“쿠, 쿨럭- 네?”
이렇게 다이렉트로 물어본다고? 살짝 돌려서 물어볼 수도 있잖아. 이럴 줄 알았으면 물을 조금 더 달라고 할 걸 그랬다. 괜스레 다 마신 생수병을 아련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임신한 건 왜 말 안 했어.”
“…….”
차분한 얼굴로 나를 보는 그의 모습에 울컥했다. 어떻게 그 상황에서 내가 말할 수 있었을까. 지금도 권태범이 호빵이를 포기하라고 할까 봐 무서워 죽을 것 같았다.
“혼자서 어쩌려고 이 먼 데까지 도망친 거야.”
“…….”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어.”
다정하면서도 화가 난 얼굴로 나를 다그치는 그 모습에 꾹 눌러 담았던 서러움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흐… 이게, 흑, 이게 다 태범 씨 때문이잖아요! 흐엉-”
그동안 혼자서 마음고생 하고, 힘들고, 서글펐던 생각을 떠올리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권태범이 광공이든 범죄자이든 그런 건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그의 가슴팍을 마음껏 내리치며 울음을 전부 토해냈다.
“흣, 채, 책임져요. 으흐… 나 아, 아직 어린데, 흑, 대학도 못 갔는데에… 으흑, 어떠, 어떡해애….”
내 모든 원망을 다 받아주고 등을 토닥여준 권태범의 손이 잠깐 멈칫했다. 그 짧은 순간마저 그가 멀어질까 두려워 권태범을 꽉 끌어안았다. 달달 떨리는 손으로 그의 옷자락을 쥐고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채, 책임져요, 흑, 책임, 지라고-”
“그래.”
“흐… 느에…?”
그의 입에서 나올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 말이 나오자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건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 권태범이 맞나?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권태범이 내 눈물을 닦아주며 픽 웃었다.
‘왜, 왜 웃어…?’
분명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그의 얼굴을 보자 더 서러웠다. 다시 눈물을 흘리며 코를 훌쩍였더니 권태범이 또다시 작게 웃었다.
“책임질게, 유원아.”
“장난, 흣, 장난치지 마세요….”
윤설아도 있으면서 날 책임질 리가 없잖아.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면서 한 번도 안 찾아왔으면서. 나는 서러워 죽겠구먼 권태범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평소와 달리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에 더 서러운 마음이 들어 다시 울음이 터져 나오려 했다. 숨을 훌쩍이며 다시 한번 더 눈물을 왕창 쏟아내려 할 때, 권태범이 내 양 뺨을 손에 쥐고는 입을 맞추었다.
쪽-
“흣-”
지금 이 상황이 도대체 뭐가 뭔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자 권태범이 또다시 내게 입을 맞추었다.
쪽-
“이, 이게 뭐 하는-”
윤설아를 놔두고 왜 나한테 입을 맞춰. 왜 뽀뽀해. 권태범을 밀어내고 고개를 푹 숙이자 내 뺨을 매만진 그가 턱을 잡아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추었다.
“미치겠다, 차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