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59)화 (59/136)

#59

‘호빵아, 미안해. 정말, 정말 미안해.’

지난 꿈에서 멀어질 것만 같았던 호빵이가 떠올랐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희미해져 가던 모습이 생각나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때 아이를 쉽게 포기하려 해서 그런 것일까. 너무 준비도 안 된 상태로 귀한 아이를 품어서일까. 갑자기 다가온 무서운 상상에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시이발, 차, 차유원…!”

“흐윽, 어떡, 흡, 어떡해….”

금방이라도 남자가 내 머리채를 잡을 것 같았다. 살기 어린 목소리로 차유원을 부르며 다가오는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흑, 태범 씨, 태, 태범 씨….”

너무너무 무서운 상황에 그저 권태범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도망친 건 자신이면서도 그가 너무 보고 싶었다. 이 순간에도 태범에게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가 너무 보고 싶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기적이겠지만 제발. 제발 한 번만 아이와 자신을 도와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권태범의 옆에는 이제 다른 사람이 있었다. 그 생각에 심장이 철렁, 가라앉았다. 순간 발목이 꺾여 휘청거렸다.

“아…!”

몸이 기울어지고 경사가 진 언덕이 시야에 닿았다. 본능적으로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배를 감싸 안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어떻게 되더라도 아이만 살 수 있다면. 짧은 순간이었지만 아이만이라도 무사하길 바라며 배를 감싼 손에 단단한 힘을 주었다.

“차유원!”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감쌌다. 익숙한 향이 바람을 따라 희미하게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권태범이 너무 보고 싶은 마음에 내가 만들어낸 환상인가?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빨리 찾을 순 없었을 텐데. 그래도 아까 그 남자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차유원, 차유원!!”

간절하게 목이 터져라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도 무거운 눈꺼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우리 호빵이는 괜찮겠지…?’

몸이 너무 무거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 몸을 흔들며 다급하게 부르는 목소리조차 점점 멀어졌다. 흐릿한 의식 사이로, 그리웠던 향기가 스며드는 것 같았다

***

“차유원. 차유원!! 정신 차려, 차유원!”

태범은 의식을 잃은 듯 축 늘어진 유원을 끌어안고 소리쳤다. 조금만 늦었어도 이 가파른 언덕에서 굴렀을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잡아!”

준석이 소리쳤고 부하들은 하나같이 살기 어린 눈빛으로 남자를 죽일 듯 쫓아 비탈길을 단번에 올라갔다. 태범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마치 죽은 사람처럼 눈을 감고 있는 유원을 내려다보았다.

“유원아.”

창백한 얼굴로 아무 미동도 없는 모습에 태범의 심장이 불안정하게 뛰었다. 그가 떨리는 손으로 유원의 코 아래에 손가락을 대었다. 다행히 미약하지만 유원은 숨을 쉬고 있었다. 그제야 태범은 꽉 참은 숨을 내뱉으며 준석에게 말했다.

“당장 차부터 대기시켜… 유원아…?”

유원을 번쩍 안고 걸음을 옮기던 태범은 유원의 엉덩이를 감싸 안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축축한 감각에 우뚝 멈춰 섰다.

“혀, 형님…!”

제 손에 닿은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준석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유원….”

태범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제 손에 물든 유원의 피를 발견한 태범의 얼굴이 무너지듯 떨려왔다.

“안 돼, 차유원!”

이를 악문 태범은 유원을 꽉 안아 든 채 서둘러 언덕을 내려갔다. 무슨 정신으로 그 가파른 길을 내달렸는지. 태범은 유원을 제 품에 꼭 안은 채 달리고, 또 달렸다. 마침내 차가 들어올 수 없는 언덕길을 모두 내려온 태범은 뒷좌석에 유원을 눕히고 운전석 문을 거칠게 열었다.

“형님! 제가, 제가 하겠습니다. 이러다 사고 납니다!”

뒤를 쫓아온 준석이 운전석에 오르려는 태범을 발견하곤 급히 그를 말렸다. 지금 이대로 그에게 운전을 맡겼다간 더 큰 사고가 일어날 거 같았다. 준석이 태범의 손을 거칠게 떼어내고 정신 차리라는 듯 소리쳤다.

“형님, 제발!!”

준석의 목소리에 태범의 눈빛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태범은 서둘러 걸음을 옮겨 뒷좌석에 올랐다. 태범이 유원을 감싸 안은 것을 본 뒤 준석은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제발 아무 일도 없길. 부디 저들에게 아무런 슬픔도 찾아오질 않길 간절히 바라는 준석의 손에 핏줄이 퍼렇게 솟아올랐다.

***

무슨 정신으로 병원까지 왔는지, 태범은 땀에 젖은 얼굴을 닦지도 못하고 유원을 안은 채 응급실로 향했다. 유원이 검사를 하는 동안 검사실 밖에서 한참을 기다리던 태범은 자신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사실에 스스로가 한심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초조한 얼굴로 주먹을 꽉 쥔 태범의 손엔 치료받지 못한 상처가 벌어져 나온 핏자국과 유원에게서 묻은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차유원 환자, 보호자님.”

유원의 이름 뒤에 붙은 ‘환자’라는 단어가 유원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태범은 이를 악물고 의사에게 향했다.

“다행히 태아와 임부님 건강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태범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피곤한 얼굴을 쓸어올린 태범은 의사의 어깨 뒤로 검사실에서 빠져나오는 유원을 발견했다. 새하얗게 질려있던 얼굴도 어느 정도 생기가 돌아와 있었다. 태범은 침대에 누워 새근새근 잠이 든 유원의 얼굴을 안타까울 정도로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보호자님께서 많이 놀라신 거 같은데 다행히 하혈은 아니고 착상혈이네요. 드문 현상은 아니지만 임부 체구에 비해 양이 조금 많이 나왔어요. 급성 스트레스가 원인일 수도 있으니 최대한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리고 되도록이면 식사는 단백질이랑 철분이 많은 음식을 섭취해 주시는 게 좋고요.”

급성 스트레스라는 말에 태범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조금 전 준석을 통해 유원과 함께 있었던 남자의 신상 정보를 파악했다는 보고를 들었다. 그 남자를 떠올린 태범의 턱이 단단하게 굳었다.

“그리고 이렇게 정신을 잃으시거나 하면 임부뿐만 아니라 태아에게도 좋지 않아요. 특히 지금 임신 초기인데 안정에 안정을 취하셔야 할 때입니다.”

태범은 정신을 잃은 유원이 피까지 흘리자 순간 그가 어떻게 된 줄 알고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다행히 건강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했지만, 얼마나 놀랐으면 기절까지 했을지.

“유의하겠습니다. 추가로 문제 있는 곳은 없습니까. 병원에 온 김에 검사받고 싶은데요.”

차트를 보며 이것저것 설명하던 의사는 태범의 손에 남은 상처를 발견하곤 잠시 멈칫하더니 말을 이어 나갔다.

“임부님께서 젊으시고 남성체 오메가셔서 그런지 아기는 잘 크고 있습니다. 주 수에 비해서 태아도 꽤 크고요. 일단은 임부님 깨어나시는 것부터 확인하고 추가로 검사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당장 유원을 서울에 있는 대형 병원으로 옮기고 싶었지만, 추가로 이상이 있는지 검사를 받은 뒤 옮기는 게 아무래도 나을 듯싶었다. 태범은 유원을 따라 1인실로 향하며 유원의 마른 손을 꽉 잡았다.

“형님.”

“어떻게 됐어.”

준석은 반나절 만에 얼굴이 핼쑥해진 태범을 바라보며 태블릿을 건넸다.

“근처에 있던 차량 블랙박스 영상입니다. 일단 확인 먼저 하시죠.”

태범은 준석이 건네는 태블릿 PC를 받아 들고 화면을 응시했다. 10분 정도로 짧게 압축한 영상에선 유원이 계단을 따라 높은 평지로 올라와서부터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유원은 천천히 폐업한 가게 앞을 맴돌더니 그 앞에 놓인 평상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때 누군가 유원에게 다가왔다. 태범도 아는 얼굴의 남자였다. 조금 전 유원을 따라 급히 언덕길을 내려오던 사람이었다.

“이게….”

“이름은 박현중, 나이는 32살로 박현중 씨 말로는 잠깐 길을 물어본 게 전부였다고 합니다.”

머뭇거리며 입을 뗀 준석은 당황한 듯 표정이 굳은 태범을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갑자기 형수님께서 깜짝 놀라시더니 몸부림을 치셨다고…. 박현중 씨 밑으로 천식을 앓고 있는 동생이 있어서 혹시 그건 아닐까 걱정되는 마음에 다가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근데 너무 경기를 일으키시고 무서워하시는 바람에 몸에서 손을 떼어냈는데도 누군가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언덕을 내려가셨다고 합니다.”

태범은 멀리서 지켜보았던 유원의 모습을 떠올렸다. 정말 누군가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두려워하는 얼굴로 달리고 있었다. 그 순간에도 배를 단단히 감싼 그의 팔에서 아이를 보호하고 싶다는 의지가 엿보이기까지 했다.

태범은 다시 영상을 재생하고 화면에 집중했다. 준석의 말처럼 남자는 유원을 향해 무어라 손짓했고, 유원은 갑자기 바닥에 넘어지면서 허공에 소리치고 있었다.

“환각…이라는 건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하아. 일단 나가 봐.”

태범은 태블릿을 준석에게 넘기고 잠든 유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요즘 몽유병 증상도 많이 없어졌고, 강릉에 온 이후로 잘 지내는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태범은 거스러미가 일어난 유원의 손을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작은 손을 감싸 쥔 커다란 손에는 상처가 더욱 많았다. 태범은 유원의 손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안 돼. 그때처럼은 안 돼, 차유원. 차라리 잊어. 다 잊어 유원아.”

고개를 든 태범의 얼굴에선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초조함과 유원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가득했다. 유원의 고요한 얼굴을 내려다보던 태범은 무언가 결심했다는 얼굴로 핸드폰을 들었다.

“권태범입니다. 유원이 일로 잠시 상의드릴 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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