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흐… 기, 기다리고 이, 있으면, 오, 오, 올 줄 알았, 어…. 흐흐.”
남자의 말에 본능적으로 무언가 위험하다는 느낌이 온몸을 덮쳐왔다. 손에 꽉 쥔 생수를 평상 위에 내려놓고 두 손으로 배를 감싸 안았다. 내가 불안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자 남자의 입에서 이상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여, 여기, 아무도 흐, 없는, 데…. 크흑, 끅, 큭…. 우, 우리, 둘 뿐이야. 흐….”
남자의 말에 급히 가게 문을 바라보니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는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환하게 켜져 있던 불이 꺼져있었다. 아무래도 이러다 무슨 일이 생길 것 같다는 생각에 서둘러 평상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죄송한데, 사람을 잘못 보신 것-”
“차, 차유원… 흐, 내가 기다렸, 어. 언젠간, 네가 여기 올 줄, 알았거든, 흐흐으….”
차유원…? 분명 저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이름은 차유원이 맞았다. 역시 차유원이 아는 사람인가…? 근데 서울도 아니고 강릉에서 어떻게….
“누… 누구신데 저한테 그러세요….”
혹시 차유원의 일기장에 적혀 있었던 남자 중 한 명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려운 마음에 배를 꽉 잡고 묻자 남자가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 손을 뻗었다.
“유원아, 이리 와, 너…가 좋아하는, 바다 보러 가자.”
‘유원아. 우리 아기. 엄마 아빠가 XXXXX 미안해.’
‘우리 아들, 유원아. XXXXXX. XXXX.’
“으, 윽… 아, 흑. 이게 무슨… 흣..”
남자의 말에 잠잠했던 두통이 몰려왔다. 누군가 머리를 망치로 내려친 듯 깨질 것 같았다. 머릿속을 비집고 억지로 밀려드는 기억과 계속해서 차유원을 부르는 목소리에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아, 아파, 흐… 윽, 아…!”
다리가 불안정하게 휘청거려 평상 끝을 붙잡고 주저앉았다. 뿌옇게 흐려진 시야 사이로 남자의 붉은 눈과 마주쳤다. 이건 위험했다.
머릿속에서 빨간 경고등이 깜빡거렸다. 본능적으로 더 이상 이곳에 있으면 안 된다는 게 느껴졌다. 뒤로 조금씩 물러나자 남자가 입이 찢어져라 웃기 시작했다.
“크, 큭, 크크… 가, 가자…. 흐, 나랑 가자, 차, 차유원.”
“하지, 하지 마세요, 흐으, 태, 태범 씨…. 흡….”
저 남자가 나를 해치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남자의 새까맣게 그을린 손이 내 배를 내려치고 목을 조를 것 같았다. 두려운 마음에 권태범을 부르며 고인 눈물을 뻑뻑 닦아냈다.
“흐으, 태범 씨이… 흣 제발, 태, 태범….”
그냥 아저씨들 옆에 있을걸. 무작정 도망치지 말고 권태범과 대화라도 해볼걸.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도움을 청할 만한 사람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태, 태범? 시, 시이발, 너, 지금, 궈, 권, 태, 태범 마, 말하는 거야?”
내 입에서 나온 권태범의 이름에 남자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화가 난 듯 얼굴이 붉어진 남자가 성큼성큼 내게 다가왔다.
“아윽…!”
또다시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왔다. 한 손으로 머리를 붙잡고 남자를 피해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남자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안 돼. 우리 아기는 안 돼….’
내가 최대한 몸을 둥글게 말고 숨을 죽이자 남자가 거센 악력으로 내 머리를 들어 올렸다.
“윽… 흣.”
“자, 잡았다….”
결국 고개가 들린 채 남자의 얼굴과 마주했다. 남자의 입에선 썩은 냄새가 났고 그와 함께 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이상한 페로몬 냄새가 바람을 타고 느껴졌다.
“우욱, 하, 지 마세요.”
“유원, 아, 그, 그러니까 이리 오라고, 했잖아. 왜, 맨날, 말을 안, 들어….”
남자는 일그러진 내 얼굴을 보곤 우악스럽게 잡은 머리를 놓아주며 안쓰럽다는 듯 눈물을 닦아주었다.
“흣.”
내가 고개를 돌리며 눈을 질끈 감자 남자가 내 뺨을 쓰다듬었다.
“이, 이제, 걱정하지, 마. 다시 도, 돌아가자…. 예, 예전처럼 다시 해, 행복하게, 해줄게, 유원아.”
***
유원이 시장 입구까지 들어간 것을 확인한 태범은 작정하고 숨어버린 작은 머리에 이를 악물었다. 노후화된 곳이 많은 시장은 고장 나거나 허울뿐인 CCTV가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유원이 추적을 피하기 위해 골목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숨어버려 그를 찾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졌다.
“하아…. 그래서 지금 겨우 애 하나 제대로…. 하, 시팔, 진짜.”
태범은 흐트러진 넥타이를 아예 벗어 던지고 피곤한 눈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태범은 유원이 남기고 간 편지를 다시 읽으며 이를 악물었다.
[걱정 마세요, 양육비 달라고 안 할게요. 그리고 윤설아 씨도 찾아가지 않을 테니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태범 씨가 걱정할만한 짓도 안 할게요. 그냥 우리 아가랑 조용히 잘 살겠습니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어요. 저번에 욕한 건 죄송합니다….]
유원에게 윤설아를 소개하지 않은 건 별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유원이 윤설아를 기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혹시라도 윤설아를 보고 기억이 떠오를까 불안한 마음에서 그랬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만나게 하고 싶지 않다는 작은 질투심도 있었다.
근데 어쩌다 일이 이렇게 꼬이게 된 거지….
뒤늦게 유원에게 붙여놓은 애들에게 들은 바로는 유원이 자신과 윤설아와의 관계를 오해하는 것 같았다. 아니, 오해하고 있었다.
자신과 윤설아가?
처음엔 그 얘기를 듣고 어이가 없었다. 윤설아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제 밑에 있는 한기찬과의 사랑을 위해 홍콩으로 도망친 여자였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윤설아를 그녀의 집안으로부터 보호해주겠다는 조건으로 한국으로 데려온 것이었고.
다름 아닌 유원을 위해서.
그런데 정작 유원이 윤설아와 자신의 관계를 오해하고 있었다니.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전개에 어이가 없다가도 차유원다운 오해라 웃음이 나왔다. 그러다가도 겨우 그런 것 때문에 꼭꼭 숨어버렸다고 생각하면 미칠 것 같았다. 아이를 가진 몸으로, 그것도 제 아이를 품은 몸으로 저에게서 도망쳐버린 유원에 태범은 잠시 접어두었던 상상을 떠올렸다.
지하실은 추위를 많이 타는 유원에겐 좋지 않을 테니 안쪽의 가장 넓은 방에 그를 위한 장소를 꾸며놓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가녀린 손목과 발목을 위해 작은 수갑을 준비하고, 단 음식을 좋아하니 항상 제철 과일을 두며, 유원이 좋아할 만한 것을 잔뜩 넣어 절대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면….
돌아가기만 한다면, 유원을 다시 제 손에 쥐기만 한다면 그를 제집에 가두어, 제 허락 없이 아무 데도 가지 못하게 하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거렸다.
지잉-
갑자기 정신을 일깨우는 진동 소리에 정신을 차리자 핸드폰 화면 위로 [윤설아]의 이름이 떠있었다.
“여보세요.”
-아, 태범 씨 저 기찬 씨한테 얘기 들었어요. 그… 유원이가 사라졌다고.
벌써 홍콩까지 한국 소식이 전해진 건지 기찬에게 얘기를 들었다는 윤설아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저, 그래서 말인데요. 마침 제가 지금 저번에 말씀드렸던 장소가 떠올라서요….
차유원이 답답할 때마다 갔다던 그 장소. 태범은 왜인지 모르게 유원이 그 장소에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급해진 태범은 어딘지 듣지도 않고 밖으로 향하면서 설아에게 물었다.
“거기가 어딥니까.”
-삼척항 근처에 있는 작은 해변가라고 적혀 있어요. 정확한 장소는 모르겠지만 순이네 가게라는 곳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는 얘기가 적혀 있고, 또 인적이 드물고 입구가 나무로 숨겨져 있는 곳이라고…. 죄송해요, 여기까지밖에 생각이 잘 안 나네요.
설아는 유원의 상담일지 구석에 적혀 있는 삼척항을 바라보며 드문드문 생각난 기억을 덧붙여 말했다.
“감사합니다. 더 생각나는 게 있으면 다시 연락 주세요.”
전화를 끊고 서둘러 밖으로 나서는 태범에 준석도 그 뒤를 쫓아 나왔다.
“삼척항 근처에 애들 풀어. 그 근처 바닷가든 무인도든 사람이 갈 수 있는 곳이면 싹 다 뒤지라고 해.”
“네, 형님!”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상황에 새로 피어난 희망을 발견한 사람처럼 준석의 얼굴이 밝아졌다. 서둘러 필요 인력을 삼척항 근처로 배치한 준석은 태범과 같이 차에 올랐다.
***
“이, 이제, 걱정하지, 마. 다시 예전으로, 도, 돌아가자….”
유원은 제게 손을 내미는 남자를 보자 번쩍 정신이 들었다. 내가 왜 이 남자를 따라가. 엄청 잘생기고 돈도 많은 권태범한테서 도망까지 쳤는데 겨우 이놈을 만나려고 그런 건 아니잖아!
갑자기 턱에 힘이 들어가며 권태범에게서 배운 호신술이 떠올랐다. 어, 어디라고 했지. 급소를 먼저….
최고의 공격은 선제공격이라고 했었다. 귀가 닳도록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팔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있는 힘껏 남자의 명치를 팔꿈치로 세게 내리쳤다.
“윽, 너, 너 이, 이리 와…! 흐윽….”
갑자기 명치를 맞은 남자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으며 중심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때다 싶어 남자를 밀치고 도망쳤다. 힘겹게 올라왔던 언덕길을 허겁지겁 내려가자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초기에는 항상 조심해야 한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이 생각났다. 하지만 맨날 도망치고, 제대로 된 음식도 먹지 않고. 못난 아빠 때문에 너무 고생만 하는 아가에게 미안해서 죽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