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조심히 가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목적지에 도착해 택시에서 내려 주변을 살폈다. 승용차는커녕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로 아저씨들을 따돌린 거다.
“많이 혼나지 말아야 할 텐데….”
막상 아저씨들을 따돌리고 도망치니 그제야 권태범에게 혼날 아저씨들이 걱정되었다.
‘아니야…. 이제 다시 볼 사람들도 아닌데.’
아까부터 콕콕 아파오는 아랫배를 문지르며 우리 호빵이만 생각하자고 다짐했다. 그나저나 생각보다 꽤 많이 나온 택시비를 생각하니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동안 숙소비, 식비가 굳었으니 다행이지 하마터면 노숙을 할 뻔했다. 몇 장 안 남은 지폐를 꼬깃꼬깃 주머니에 넣으며 넓게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았다.
“아…. 시원하다.”
고생 끝에 도착한 삼척은 강릉처럼 바다가 무척이나 예뻤다. 강릉과 또 다른 아름다움에 넋을 놓고 바다를 바라보며 손바닥을 활짝 펼쳤다. 손가락 사이로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기분이 좋았다. 아랫배가 저릿했던 것도 조금씩 나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럼 이제 가볼까.”
***
태범은 금연을 시작한 지 10일이 채 지나지 않아 흡연 욕구가 들끓었다. 쓰린 입 안을 짓이기며 유원의 곁에 붙여놓은 제 부하에게 물었다.
“그래서.”
싸늘한 얼굴로 남자들의 보고를 듣고만 있던 태범은 소매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차유원을 놓쳤다. 이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숨쉬기도 어려울 만큼 강압적인 분위기에 너도나도 태범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내가 많은 걸 요구했나.”
“죄송합니다, 형님.”
반복되는 남자들의 죄송하다는 말에 태범의 입매가 싸늘하게 굳었다.
“할 말이 죄송하다는 것밖에 없어?”
“…….”
“차유원 곁에서 그 애 하나만 지켜보라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냐고 물었어.”
태범은 계속해서 묵묵부답인 남자들을 쓱 훑어보며 짜증난다는 듯 혀를 찼다.
“마지막으로 확인된 곳이 어디야.”
“그게….”
“어디냐고!”
어떠한 일이 생겨도 단 한 번 언성을 높이지 않았던 태범이었다. 성난 알파의 페로몬에 몇몇은 정말 차라리 여기서 기절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며 숨을 죽였다.
“중앙시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후…. 시발.”
태범은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이를 악물었다.
“당장 주변 CCTV, 차량 블랙박스 확보해서 차유원 이동 경로 파악해. 2시간 주지.”
“혀, 형님.”
“남은 인내심이 그렇게 많지는 않아.”
이를 악물고 부하들에게 경고하는 태범의 눈빛은 서늘했다. 그와 눈이 마주친 남자들은 퍼득, 고개를 숙였다.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차유원 내 앞에 가져다 놓는 게 좋을 거야.”
“네, 형님!”
남자들은 우르르 호텔을 빠져나갔다. 남은 시간은 겨우 2시간이었다. 그 안에 형수님을 찾지 못한다면 이건 정말 비상이었다.
부하들을 내보낸 태범은 담배를 찾았다. 그러다 곧 포기하고는 속이 쓰릴 정도로 매운 사탕을 입에 넣었다.
“일어나, 박준석.”
태범은 바닥에 꿇어앉아 머리를 숙이고 있는 준석에게 다가가 물었다.
“내가 너한테 차유원을 맡긴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한쪽 뺨이 붉어진 채 고개를 든 준석의 얼굴엔 죄책감이 묻어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를… 믿어 주셔서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겨우 이건가?”
“면목 없습니다.”
저만큼이나 어두운 얼굴을 한 준석을 바라보던 태범은 최후의 인내를 발휘했다.
“마지막 기회야. 책임지고 차유원 찾아와.”
“감사합니다.”
“이만 나가 봐.”
“네, 형님.”
태범도 그가 노력하지 않아 유원이 사라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저만큼이나 유원을 걱정하고 있을 거라는 것 또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유원이니 아무리 그의 곁에 사람을 붙여놔도 언젠간 또 이렇게 도망갈 거라 예상은 했었다. 하지만 막상 제 손을 벗어난 유원을 떠올리니 가슴이 답답하고 초조해졌다.
그렇게 방 안에 혼자 남은 태범은 유원의 흔적을 살피며 작아진 사탕을 깨물었다. 씁쓸한 박하 향이 입 안에 가득 찼다. 태범은 쓰린 얼굴로 유원의 마지막 모습이 담긴 영상을 재생시켰다.
***
“어…. 순이네 가게에서 꺾으면 되나?”
손바닥만 한 메모장에 직접 그린 지도를 따라 장소를 찾아가려니 조금 어려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자세하게, 더 크게 그릴걸. 시간이 없어서 대충 그렸던 행동의 결과가 이렇게 후회될 줄이야.
“이 골목에서 꺾으면 된다고 했는데….”
작은 구멍가게를 지나쳐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걸으니 탁 트인 공간이 나왔다.
“와….”
처음엔 긴가민가했지만, 작은 길을 따라 아래로 쭉 내려오니 인적이 드문 해변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작은 해변을 찾아오는 사람은 몇 없는 듯 자연 그대로 보존된 해변이 너무 아름다웠다.
“좋다…. 이래서 차유원이 힘들 때마다 여기에 온다고 했던 거구나.”
철썩철썩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와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들을 보니 힘들고 답답했던 마음이 깨끗하게 씻겨나가는 것 같았다. 부드러운 모래 위에 쭈그리고 앉아 평화로운 풍경을 천천히 눈에 담고 있을 때, 갑자기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톡 흘러내렸다.
“뭐야, 갑자기 왜 이래….”
당황스러움에 눈을 한 번 더 깜빡이자 고여 있던 눈물이 후두둑 볼 아래로 떨어졌다. 눈물을 소매로 거칠게 닦아내며 당황한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지만 이미 조금씩 새어 나오기 시작한 눈물은 걷잡을 수 없이 얼굴을 적시기 시작했다.
“나 왜 이래…. 흐윽, 왜, 왜 울어….”
서둘러 눈물을 닦았지만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울고 말았다.
낯선 세계에 떨어지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권태범을 많이 의지했다. 그가 여주인공인 윤설아와 이어질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그에게 마음을 주어서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결국 그에게 마음을 줬나 보다.
“흐으…. 나쁘은 놈아… 흑….”
이럴 줄 알았다,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는데. 그의 따뜻한 미소에, 다정한 숨결에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아무도 없는 해변가에서 목 놓아 울음을 터뜨리며 그동안 혼자서 꾹꾹 눌러 담았던 감정을 바닷물에 흘려보냈다.
“호빵아….”
너무 울어서 그런지 배가 고팠다. ‘그러고 보니 오늘 점심도 안 먹었네.’라고 혼잣말을 하며 조금 부푼 배를 쓰다듬었다. 앞으로 좋은 것만 먹겠다고 약속해놓고선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 호빵이가 거짓말쟁이 아빠라고 욕해도 할 말이 없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얼마 남지 않은 돈을 세어보니 겨우 20만 원 조금 넘게 남아있었다.
“할머니 돈은 진짜 안 쓰고 싶은데….”
이러다간 할머니가 진짜 차유원에게 남긴 돈을 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내일부터는 정말, 정말 일자리를 찾아봐야지.
“배라도 타야 하나….”
아까 지나가다가 보니까 선원 구하는 현수막이 종종 붙어있었다. 하지만 호빵이를 위해서라도 몸 쓰는 일은 되도록이면 피하고 싶었다. 경험을 살려 과외 같은 걸 하면 좋겠지만 여기서의 차유원은 대학도 나오지 않았으니 그것도 어렵고.
착잡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 쭉 내려왔던 계단을 다시 오르는데 점점 숨이 가빠왔다.
“하아. 헉…. 운동도, 좀 해야겠다…. 후우….”
진짜 차유원 몸은 어떻게 된 건지. 시간이 지날수록 체력이 점점 엉망이 되는 것 같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마침내 마지막 계단 위로 발을 올렸다.
“하아…. 죽을 뻔했네.”
정상까지 오르자 다리가 저절로 후들후들 떨렸다. 가까스로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순이네 가게 앞으로 향했다.
“아주머니. 이거 하나요.”
시원한 냉수 하나를 꺼내와 아주머니께 내밀었다. 그러다 문뜩 계산대 밑에 있는 불량 식품이 눈에 들어왔다.
“어? 이거 아직도 나오나? 단종됐던 걸로 기억하는데.”
유통 기한을 보니 그것도 아닌 거 같았다. 잘못 알았나…. 어쨌든 추억의 불량 식품 하나를 골라 생수와 함께 계산했다.
“천 원.”
작은 브라운관 티브이에 시선을 고정한 아주머니가 앞에 놓인 돈 통을 가리키며 말했다.
돈 통 안에 오백 원짜리 동전 두 개를 집어넣은 다음 미닫이문을 열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하아…. 이제 좀 살겠다.”
갑갑했던 가발을 벗어 쓰레기통에 버리고 가게 앞 평상에 앉았다. 시원한 생수를 꼴깍꼴깍 삼키니 제멋대로 뛰던 심장도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파고들었다. 곧 해가 지려고 하는 듯 불그스름해진 하늘 아래서 시원한 바람을 만끽할 때였다.
“차, 차, 유원….”
뒤에서 누군가 차유원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들킨 건가? 옷까지 갈아입고 가발까지 썼는데 어떻게 찾은 거지?
손을 꽉 잡고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모르는 얼굴의 남자가 나를 보며 씨익 웃고 있었다.
‘어? 누구지?’
예상했던 사람이 아니라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차유원의 이름을 알고 있기에 권태범이나 그의 부하 중 한 명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이 매일 입고 다니는 검은색 정장이 아닌 추레한 옷에 의문이 들었다.
진짜 이 사람은 누구지? 처음 보는 얼굴의 남자는 약에 취하기라도 한 듯 초점이 맞지 않는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혹시 이전에 차유원이 알던 사람일까 싶어 조심히 입을 뗐다.
“…누구세요? 혹시 저 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