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아저씨들, 오늘은 진짜 어제처럼 그러시면 안 돼요.”
어제와 같은 일이 발생할까 손가락까지 걸며 약속을 받아냈다. 내가 산 건 아니었지만, 랍스터를 먹인 보람이 있는 건가? 아저씨들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형수님, 여기 옷은 따뜻하게 입고가세요.”
“아, 감사합니다.”
어제와 다른 두툼한 재킷을 건네는 아저씨에 나도 순순히 재킷을 입었다.
“형수님! 이건 밖에 나가셔서 배고프실까 봐 준비했습니다.”
수제 과자라고 적혀 있는 포장지가 무척 고급스러웠다. 침을 꿀꺽 삼키는데 그 옆으로 빨간색 보온병이 튀어나왔다.
“형수님, 저도 혹시 목마르실까 봐 준비-”
“견과류가 몸에 좋다고 해서. 여기 있습니다!”
“형수님, 날씨도 추운데-”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아저씨들이 내미는 것들을 받아 들다 보니 벌써 짐이 한가득이었다.
“저… 소풍 가는 거 아닌데요….”
손에 잔뜩 들린 짐을 내려다보며 울상을 지었다. 이걸 전부 들고 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나를 못 가게 하려고 생각해낸 신종 방법인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다행히 내가 곤란해하자 아저씨들은 저들끼리 심각한 얼굴로 상의를 하더니 정말 꼭 필요한 물건이 아닌 것을 다시 가져갔다.
“그럼 저 다녀올게요! 이따 저녁에 봐요!”
다시 가벼워진 몸으로 아저씨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며칠 동안 같이 있었더니 어느새 정이 들어버린 것도 같고. 권태범이 아니었더라면 만났을 일이 없었겠지만, 그래도 소중한 인연이었다.
“다녀오십시오!”
“형수님, 화이팅하세요!”
그래서 손까지 흔들어주며 응원하는 아저씨들에 조금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아저씨들… 정말 미안해요.’
속으로 그들에게 사과하고 서둘러 호텔 로비를 빠져나왔다. 몇 걸음 걸어가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다행히 따라오는 사람은 없었다.
“다행히 따라오진 않는 거 같긴 한데….”
하지만 내내 찰거머리처럼 붙어 다니다가 이렇게 쉽게 포기할 아저씨들이 아니었다. 찝찝하면서도 속이 시원했고, 속이 시원하면서도 뭔가 불안했다.
“에이. 설마 오늘도 그러려고….”
그래도 아저씨들 배 속에 있는 랍스터가 소화될 때까지는 나와 한 약속을 지켜주겠지 싶은 마음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아저씨들….”
“하하… 아, 안녕하세요.”
어색한 얼굴로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는 아저씨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팔을 잡고 넘어질 뻔한 나를 일으켜주는 사람은 권태범의 부하 중 한 명인 태식 아저씨가 분명했다.
“아저씨… 저 안 따라오신다고 하셨잖아요.”
새까만 정장 대신 일반 옷으로 바꿔 입긴 했지만 저 눈가에 난 상처하며 단단한 근육질 몸은 일반인과는 많이 달랐다.
“……그게. 어…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은요….”
“지금 저 속인 거예요?”
사실은 아까 재킷을 벗어 던질 때부터 멀리서 움찔거리는 아저씨를 보긴 했었다. 그나마 말리지 않는 탓에 조용히 입 다물고 있었긴 했지만 한 번은 따돌려야 했다. 그래서 일부러 넘어지는 척 연기를 하자 허겁지겁 달려온 아저씨가 나를 잡아주었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는데 날 나쁘게 만드는 건 내가 아니라 아저씨들이야. 그렇지만….’
“하아….”
이 착한 아저씨들을 속여야 한다는 생각에 한숨이 나왔다. 나는 일부러 슬픈 생각을 떠올렸다.
슬픈 생각… 슬픈 생각….
15분이나 기다렸다가 산 붕어빵을 떨어뜨리는 상상… 맛없는 빵부터 먹고 소시지는 아껴먹으려다가 누가 뺏어먹는 상상… 5시간이나 웨이팅 기다렸는데 딱 내 앞에서 끊기는 상상…을 하자 눈물이 핑 돌았다.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아저씨를 바라보자 아저씨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너, 너무해요… 흑….”
“혀, 형수님…?”
“제가… 그렇게까지 부탁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무시할 수가 있어요?”
좋아. 일부러 코까지 훌쩍이자 당황한 아저씨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다들 너무 하세요. 진짜 여기서 한 번만 더 따라오면 다신 안 볼 거예요!”
비련의 남자주인공처럼 눈물 한 방울을 톡, 하고 흘려준 다음 몸을 돌렸다. 호빵이 때문에 뛰진 못했지만 빠른 걸음으로 도망치듯 골목 사이로 몸을 숨겼다. 뒤를 돌아보자 멀리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허둥지둥하는 아저씨들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입꼬리를 씨익 들어 올렸다.
“됐어.”
한참을 걸어간 끝에 드디어 아저씨들을 따돌리는 데 성공했다. 드디어 권태범의 손에서 벗어났다.
‘근데 왜 이렇게 마음 한구석이 허전한 거야…. 너 진짜 어쩌자는 거니.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도망갈 마음은 있어?’
“에휴….”
스스로에게 말을 걸며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힘없이 꼬깃꼬깃한 메모지를 꺼내 든 나는 메모지에 적힌 주소를 확인했다.
“여기를 내가 찾아가는 건 무리야. 그냥 택시 타야겠다.”
그러려면 우선 아저씨들을 확실하게 따돌리는 게 먼저였다. 지금 대충 따돌려놓긴 했지만 아저씨들이 나를 찾는 건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다.
그러기 위해 나는 이미 한 번 가본 적이 있던 시장으로 향했다. 한 번 와봤다고 눈에 익은 길을 따라 걸음을 옮기며 옷가게들이 즐비한 골목으로 향했다.
‘라스트 세일!’이라고 붉은 글씨로 적혀 있는 옷가게에는 수많은 옷이 바닥에 가득 쌓여있었다.
옷…이라도 바꿔 입으면 더 찾기 어려우려나…?
옷가게 앞을 서성이자 사장님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세일! 세일! 진짜 마지막 세일! 티셔츠가 오천 원~ 바지가 오천 원~ 골라 골라 싹 골라!”
사이즈가 맞을 것 같은 옷을 대충 골라 사장님께 내밀었다.
“사장님 이거 두 개 주세요.”
“자자 보자~ 오천 원짜리가 두 개. 만 원입니다~”
“여기요,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며 저렴하게 산 옷을 품에 안고 배시시 웃었다. 이렇게 옷까지 바꿔 입으면 찾기 어려울 거였다. 차유원이 일기장에 남긴 장소에 들렀다가 할머니 집으로 내려가서 숨어 지내다 호빵이를 낳으면 딱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미래 계획을 끝내고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손에 쥔 검은 봉지를 들고 얼마 걸어가지 않았을 때,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저것도 있으면 좋을 거 같은데….”
머뭇거리다 낡은 가게로 들어가 사장님께 물었다.
“사, 사장님! 혹시 저건 얼만가요…?”
“이잉? 저거 말하는 겨?”
아, 창피해.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장님이 천장에 매달린 치렁치렁한 가발을 내렸다.
“이거 쪼까 상태가 별로라. 한 오만 원만 줘!”
잠시 고민을 하다가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노란색 지폐를 꺼냈다.
‘생각보다 비싼데….’
가발을 한 번도 사본 적이 없어서 가격대를 모르는 게 문제였다. 꼬깃꼬깃한 지폐를 만지작거리자 사장님이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나를 재촉했다.
‘그래 이번에는 정말 확실하게 도망가야 해. 그러니까 오만 원쯤이야….’
거금을 써야 한다는 생각에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지폐를 내밀었다. 두툼한 손에 오만 원이 들어오자 사장님은 싱글벙글한 얼굴로 까만 비닐봉지에 가발을 넣어 내게 건넸다.
“그럼 잘 써요?”
“저기 사장님 여기 화장실은….”
“아아~ 밖으로 나가서 왼쪽으로 쪼까 걸으면 2층에 있어.”
“감사합니다.”
“그려. 잘 가요~”
서둘러 가게를 나와 화장실로 향했다. 날씨가 흐려서 그런지 깜빡깜빡, 형광등이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아, 흣.”
좁은 화장실에서 옷을 겨우 갈아입고 나왔을 때였다. 아랫배가 따끔거리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너무 긴장해서 그런지 아랫배가 조금 뭉친 것 같았다. 왈칵 걱정되는 마음에 아랫배를 문지르며 호빵이에게 속삭였다.
“호빵아… 걱정하지 마. 아빠가 지켜준다고 했잖아.”
애써 태연한 척해도 마음속에 자리 잡은 불안을 호빵이도 느낀 것일까. 자꾸만 아랫배가 아팠다.
“흐으… 아파….”
세면대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고 거울 속 차유원의 얼굴은 몹시 창백했다. 일단, 이곳을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가발을 푹 눌러쓰고 건물을 빠져나왔다.
저릿한 배를 붙잡고 혹시 아저씨들이 뒤쫓아 온 건 아닌지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일부러 골목을 이리저리 어지럽게 돌아서 시장을 빠져나와 택시에 탔다.
“어서 오세요. 어디로 가드릴까요-”
“여, 여기로 가주세요.”
주소가 적힌 메모지를 기사님께 보여드린 후 시트에 기대 가쁜 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혼자 남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아랫배에서 느껴지던 통증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젖은 이마를 닦으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복잡한 시내를 빠져나온 택시가 해안가를 달려 푸른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거기도 바다…라고 하던데.’
어젯밤 호텔에 있던 컴퓨터로 찾아보았던 장소가 떠올랐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본능적으로 일기장에 적혀 있던 그 장소에 가야 할 것 같다는 기분이 강하게 들었다. 그러면 차유원에 대해서 뭔가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겠지.
창문을 살짝 내려 살랑거리는 봄바람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
평소보다 조금 일찍 강릉에 도착한 태범은 어수선한 분위기에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야.”
“형님…. 오셨습니까.”
“말해.”
“저 그게 연락 못 보셨습니까….”
준석의 말에 태범의 미간은 한 층 더 찌푸려졌다. 무슨 일에서인지 헬기에 탑승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핸드폰 전원이 켜지지 않았다. 같이 탄 헬기 조종사도 마찬가지였고.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불안하더니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태범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준석과 남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차유원, 지금 어딨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