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55)화 (55/136)

#55

원래 생에서는 부모님과 그리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고 부모님은 늘 바쁘셨다. 또 소심한 성격에 친구도 없고 애인을 사귀는 건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하지만 차유원의 옆에는 조금 무섭지만 인정 많고 따뜻한 차유원의 할머니가 있었다.

또 이제는 항상 내 옆을 지켜주는 아저씨들과, 앞으론 만날 일이 없겠지만 권태범…까지 많은 사람이 늘 곁에 있었다.

과일도 씻어주고, 맛있는 것도 사주던 권태범과의 과거가 떠올라 다시금 기분이 울적해졌다.

내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입술을 깨물자 호빵이가 내가 걱정스럽다는 듯 낑낑거렸다.

“미안해. 좋은 것만 생각해야 하는데.”

붉어진 눈가를 문지르자 호빵이가 바닥으로 폴짝 뛰어내리더니 내 바지 끝자락을 끌어당겼다.

“어, 어디 가는 거야?”

혹시라도 발을 잘못 디뎌 호빵이가 다칠까 천천히 발걸음을 맞춰 따라갔다. 짧은 다리로 꽤 먼 길을 가고 나서야 호빵이가 내 옷을 놓아주고 앞으로 뛰어갔다.

“어…?”

“뀨흥!”

호빵이는 폴짝폴짝 동그란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큰 백호의 꼬리를 깨물고 장난쳤다.

“어… 안녕?”

뭔가 백호의 눈과 마주치자 뒷골이 서늘해졌다. 옛날에는 안 그랬던 거 같은데. 내가 백호의 눈치를 보며 눈을 또르르 굴리자 백호가 한 걸음씩 다가왔다. 나를 바라보는 큰 백호의 안광이 금빛이었다. 금방이라도 잡아먹힐 것만 같은 모습에 숨을 죽이며 뒷걸음질을 쳤다.

“뀨으…?”

하지만 어느새 내 곁으로 돌아온 호빵이가 뒤에서 떡하고 자리를 잡고 있어 더 이상 물러날 수가 없었다.

“으핫…!”

결국 내 코앞까지 다가온 백호에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백호는 내 어깨를 누르고 훤히 드러난 목덜미를 향해 입을 크게 벌렸다.

“나, 나 죽어…!”

***

“흐악! 허, 헉…. 꾸, 꿈이다….”

눈을 번쩍 뜨자 익숙한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꿈이란 걸 알지만, 백호의 날카로운 이빨이 현실에서까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땀에 젖은 손으로 목을 쓸었다. 다행히 다 잘 붙어있다. 그런데 어딘가 따끔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앗…!”

진짜 따끔했다. 따끔거리는 곳을 확인하려 했지만 잘 보이지 않았다. 결국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욕실로 들어와 옷을 벗어 던졌다. 목덜미에 못 보던 상처가 하나 있었다.

“모기 물렸나…?”

그러기엔 봄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날씨가 쌀쌀했다. 아직 모기 입이 삐뚤어져서 못 나올 텐데…. 뭐, 자다가 긁은 거겠지. 이왕 욕실까지 온 김에 바지와 속옷을 훌렁훌렁 벗고 샤워실로 들어갔다.

비싼 호텔이라 그런지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샤워기를 틀자마자 따뜻한 물이 나왔다.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을 거라는 묘한 자신감에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

태범은 제 입술에 남은 감각을 떠올리며 입꼬리를 슬쩍 들어 올렸다. 오늘 아침에도 깊이 잠이 든 유원을 품에 안고 페로몬을 흘려주던 때였다. 잠결에 새하얀 목덜미를 드러낸 유원의 모습에 태범은 참을 수 없는 충동이 일었다.

그대로 유원의 목에 입술을 파묻곤 그의 몸에 제 흔적을 남긴 후에야 입을 떼어낼 수 있었다. 만족스럽게 남은 자국을 문지른 태범은 자리에서 일어나 유원의 동그란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형님, 도착했습니다.”

태범은 저를 일깨우는 소리에 감은 눈을 떴다. 두고 온 유원을 떠올리니 마음이 급했다. 태범은 차에서 내려 계단을 올랐다.

“윤설아는.”

“별채에 계십니다.”

봄을 맞아 한층 더 푸릇해진 잔디 위를 걷는 태범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여깁니다, 형님.”

“그래, 넌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넵!”

똑똑-

“권태범입니다.”

“네, 들어오세요!”

설아의 대답에 태범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부산스럽게 거실을 정리하고 있던 설아가 머쓱한 얼굴로 태범에게 말했다.

“일찍 오셨네요?”

“그렇게 됐습니다.”

“어… 자리가 좀 그런데 일단 앉으세요.”

힐끔 자리를 살펴본 설아는 테이블 위에 널브러져 있는 서류를 급하게 정리하며 민망한 얼굴로 빈자리를 가리켰다.

“윤 상무가 찾아왔습니다.”

시간을 낭비할 것 없이 태범은 앉자마자 본론을 늘어놓았다. 차를 준비하던 설아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오빠가요?”

“네.”

“…저희 오빠가 뭐라고 하던가요.”

잠시 말이 없던 설아가 태범의 앞에 차를 내려놓았다. 초조한 얼굴로 찻잔을 들어 올리는 설아의 손끝이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윤설아 씨가 제 집에 있는 걸 윤상무가 알게된 모양입니다.”

“네? 그걸 오빠가 어떻게.”

“글쎄…. 집에 쥐새끼라도 있는 모양이죠.”

조금 당황한 얼굴로 눈매가 살짝 올라간 설아와 달리 태범의 표정은 무미건조했다. 목 안으로 뜨거운 녹차를 넘긴 태범이 먼저 입을 열었다.

“준비는 잘되어 가고 있습니까.”

태범은 방 안 곳곳에 흩어져 있는 서류들을 쓱 훑어보았다. 요즘 유원의 상태가 괜찮아지고 있지만, 언제 다시 안 좋아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네. 다행히 자료를 다 찾아서요. 보관 상태도 꽤 괜찮고요. 상담은 오늘이라도 당장 시작할 수 있어요.”

언제 초조한 얼굴을 했냐는 듯 설아는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나저나 유원이는 언제 돌아오죠?”

“곧 돌아올 겁니다. 다음 주면 서울에 있을 거 같네요.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태범은 아래턱을 문지르며 유원을 떠올렸다. 언제나 돌발 행위를 하는 유원은 잠시라도 한눈을 팔 수 없게 만들었다. 유원을 떠올린 태범은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설아도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좋아요. 그럼 유원이가 돌아오는 대로 상담 시작할게요. 필요하다면 약물 치료도 병행할 예정이고요.”

“그 약물이란 거.”

태범은 그답지 않게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임신 여부와 상관이 없겠습니까?”

“…어머.”

태범의 말에 설아의 눈빛이 반짝였다. 깜짝 놀랐던 그녀는 크게 뜬 눈을 반으로 접어 사르르 웃었다.

“유원이 임신했어요?”

태범은 크흠, 하고 목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잘됐어요. 축하해요, 태범 씨. 아, 그러면. 음….”

설아는 잘됐다는 얼굴로 박수를 치다 생각에 잠겼다. 설아의 대답이 느려질수록 불안해진 태범은 넥타이를 길게 잡아당겼다.

“음…. 그렇다면 약물 치료는 조금 더 시간을 두고 해야겠네요.”

임신 중에는 약물 사용에 신중한 게 좋았다. 지난번에 잠깐 마주했던 유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얼굴도 좋아 보였고 잘 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 굳이 약물치료까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말한 설아는 태범이 걱정하는 부분이 뭔지 알고 있다는 얼굴로 천천히 설명을 이어나갔다.

“태범 씨 말을 들어보면 유원이는 기억이 전혀 없는 거 같은데, 사실 그게 좋은 기억도 아니잖아요.”

“…….”

“일부러 기억을 끄집어낼 필요도 없고요. 우선 저희의 궁극적인 치료 목표는 몽유병이니 약물치료까진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거 같아요. 사실 그쪽으로 생각도 해봤지만 지금 상황으로는 안 하는 편이 좋겠네요. 다만 한 가지 걱정되는 건….”

유원의 오랜 주치의였던 설아의 설명에 조금은 안심이 된 듯 표정을 푼 태범은 이어지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만약 치료 도중에 기억을 되찾을 경우, 유원이가 겪게 될 충격이 마음에 좀 걸려요.”

태범은 과거의 유원을 떠올리며 입술을 짓이겼다. 유원이 모든 희망과 빛을 잃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까.

‘죽고 싶어….’

여전히 잠이 든 유원의 입에서 종종 나오는 말이었다. 얼마나 고통스럽고, 얼마나 많이 그 생각을 곱씹었으면 아무것도 모르는 지금의 유원에게서 그런 말이 나올까 하는 생각과 함께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엄마아…. 아빠….’

태범은 잠이 든 유원의 입에서 나온 말에 얼굴을 쓸어내렸다. 금방이라도 유원이 그들을 따라 영영 사라질 것만 같은 불안감이 느껴졌다.

“그럼 일단 심리 상담 먼저 부탁드리겠습니다. 치료는 상황 보고 진행하는 걸로 합시다.”

유원의 임신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태범은 곧장 공부를 시작했다. 바쁜 스케줄 와중에도 틈틈이 공부를 이어나간 태범은 임신 우울증이라는 병명을 알게 된 이후부터 유원이 걱정되었다.

보통 임신 우울증은 임신 6개월 차부터 생긴다고는 하지만 걱정되는 건 걱정되는 거였다. 더군다나 유원의 마음속 깊은 곳엔 아직 그때의 감정이 남아있었다. 본인 스스로는 모를지 몰라도.

‘이제 그만 죽여줘.’

다시금 죽고 싶다는 유원의 말을 떠올린 태범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오늘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집 안은 안전하니 되도록이면 밖으로 나가진 마시고 필요한 게 있다면 애들한테 말씀하시면 됩니다.”

“네, 그럴게요.”

짧은 대화를 마친 태범은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그때 설아가 머뭇거리며 태범을 불렀다.

“아, 저…기 태범 씨.”

“…….”

“그게 혹시 기찬 씨는… 언제쯤….”

두 손을 모으며 우물쭈물 말하는 설아의 두 뺨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일모레 입국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태범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후 별채를 빠져나와 유원의 영상을 재생시켰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4일. 그게 자신이 유원에게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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