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54)화 (54/136)

#54

태범은 실시간으로 전송되는 유원의 영상을 주시한 채 넥타이를 느슨하게 잡아당겼다. 며칠 자리를 비웠다고 책상 위에 한 뼘 높이만큼의 결재 서류가 쌓여있었다.

“일단 급한 대로 이 정도만 확인해주시면 됩니다.”

준석을 대신해서 온 황 비서가 사무적인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태범은 오랜만에 보는 황 비서에게 아버지의 안부를 물었다.

“회장님 상태는 좀 어때.”

“지금은 많이 회복하셨습니다. 다만 조금 더 안정을 취하셔야 하는데 가현동 자택으로 가시겠다고 하는 탓에 의료진이 곤란해 하는 것 같습니다.”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퇴원 못 하게 해. 그리고.”

“유원 님에 대해서는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만, 언제 알아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입니다.”

이성적으로 상황을 분석하고 내린 판단에 태범도 그의 말을 인정했다. 처음에야 제집 안에 꼭꼭 숨겨두고 조심했으니 본가에 소식이 들어가지 않았겠지만 제가 매일 강릉에서 출퇴근을 한다면 상황은 달라질 거였다.

“최대한 이쪽 소식 안 들어가게 막아. 아버지가 알게 되면 귀찮아지니까.”

“네, 알겠습니다.”

인사를 한 황 비서가 방을 나갔고 태범은 한가득 쌓인 서류를 집어 들었다. 오늘 안에 끝낼 수는 있을까 의심되는 양이었다.

“후우….”

창으로 들이닥친 뜨거운 햇살이 태범의 눈가에 길게 이어졌다. 눈앞이 거슬려 고개를 든 태범은 버튼을 눌러 블라인드를 쳤다. 화면을 바라보자 두 볼을 부풀리며 인상을 쓰고 있는 유원의 모습이 들어왔다.

“화가 많이 났나.”

아침에 애들한테 듣기론 곁에 사람을 붙였다는 걸 유원이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새침한 얼굴과 뾰족한 눈을 하곤 쫑알쫑알 말하는 유원의 입술을 바라보는 태범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한참 동안 유원의 모습을 지켜보던 태범은 준석에게 메시지를 보낸 뒤 화면에서 어렵게 눈을 떼어냈다. 담배를 찾기 위해 익숙한 방향으로 손을 뻗은 태범은 평소와는 다른 바스락거리는 촉감에 고개를 돌렸다.

“아.”

준석이 황 비서에게 미리 말해두었는지 늘 담배와 재떨이가 놓여 있던 공간에 금연껌과 사탕이 놓여있었다.

“그래, 집에 애가 둘씩이나 있는데.”

남은 서류를 모두 볼 때까지 절대 보지 말자고 다짐했던 것도 잠시, 사탕을 집은 태범은 화면을 바라보았다. 피곤한 얼굴로 놀이터에 앉아 두 다리를 두드리는 유원의 모습에 그와 닮은 아이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예쁘게 웃는 유원과 그런 유원을 쏙 빼닮은 조그만 아이를 떠올리니 태범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그러다 어색한 얼굴로 제 입가를 문지르고 사탕을 입에 넣었다.

“하.”

혀끝이 아릴 정도로 매운맛이 입 안에 퍼져 태범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유원이 아니었더라면 경험할 일이 없었을 어이없는 상황이었지만, 싫지 않았다. 그는 입 안에서 사탕을 굴렸다.

빈 사탕 봉지가 굴러다니는 책상에서 음각으로 새겨진 만년필을 들고 서류를 보고 있을 때였다.

“전무님, 다원에서 윤 상무님 오셨습니다.”

스피커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태범의 고개가 문으로 향했다. 예고 없이 찾아온 윤 상무였지만 태범은 태연한 얼굴을 하며 입을 열었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태범은 유원이 담긴 모니터 화면을 잠시 껐다. 문이 열리고 윤 상무가 안으로 들어오자 태범도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로 향했다.

“여기까진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권 전무님. 이제 그만 우리 설아 보내주시죠.”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갑자기 불쑥 찾아와서.”

태범은 윤 상무를 한 번 쳐다보곤 상석에 앉아 등을 기댔다.

“이미 다 알고 왔습니다. 권 전무님께서 저희 설아 운언동으로 데려가신 거요.”

태범은 짜증나는 상황에 습관처럼 담배를 찾다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담배 대신 황 비서가 내온 차를 마시며 윤 상무를 바라보았다. 태범과 눈이 마주친 윤 상무는 도무지 태범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약혼식을 앞두고 갑자기 홍콩으로 도망간 제 여동생이 왜 권태범의 집에 있는 거고, 권태범이 어째서 설아를 숨겨주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상황이 화가 나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했다. 답답한 제 속과는 달리 고고한 얼굴로 차를 음미하는 태범의 모습에 화가 난 윤 상무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미 운언동에 설아가 있다는 거 확인했습니다. 혹시 저희 설아를 감금하신-”

“윤연호.”

갑자기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윤 상무는 입을 다물었다.

“상무님. 이만 돌아가시죠. 윤설아 씨에 대해선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딱 잘라 말하며 모르는 척 대화를 끝낸 그의 태도에 윤 상무가 입술을 짓이겼다.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는 상황이라 반박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심기가 불편한 듯 권태범의 주변에서 느껴지는 우성 알파의 페로몬이 위협적이었다.

“전무님!”

“이만 돌아가라고 말했을 텐데.”

마지막 경고라는 듯 태범의 말이 짧아졌다.

“이대로 포기하진 않을 겁니다. 확실한 물증을 갖고 오면 권 전무님도 지금 이 행동에 마땅한 책임을 지셔야 할 겁니다.”

윤 상무는 이를 악물고 태범을 바라보았다. 확연한 힘의 차이를 알기에 이대로 물러가지만, 확실한 물증을 가져오면 권태범도 어쩌지 못할 거였다. 추후 계획을 위해 윤 상무는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꽉 닫힌 문을 바라보던 태범은 운언동 본가 경호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윤설아 경호 인력 더 늘려.”

-네, 형님.

뚝 끊어진 핸드폰을 아무렇게나 던진 태범이 머리를 길게 쓸어 올렸다. 유원을 위해 제가 선택한 일이었지만, 생각보다 피곤한 일의 연속이었다. 태범은 아직도 김이 나는 찻잔을 뒤로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늦은 밤까지 급한 일은 모두 끝낸 태범이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2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조금 전, 준석이 유원과 함께 호텔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옥상으로 향하며 핸드폰으로 유원을 확인하니 그는 벌써 침대에 누워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었다.

뒤척이다가 발로 찬 듯 이불을 덮지 않고 웅크린 채 자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태범은 곧장 준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최근 들어 수면량이 꽤 많아진 유원이었다. 시간을 확인한 태범은 서둘러 보폭을 늘렸다. 유원의 달큼한 체향을 떠올리니 벌써부터 아래가 뻐근해지며 뜨거운 숨이 흘러나왔다. 순식간에 옥상에 도착한 태범은 준비된 헬기에 올랐다.

“가시죠.”

“네, 전무님.”

익숙하게 자리를 잡은 태범은 눈을 감고 자신이 떨어진 거리를 계산했다. 200km. 그게 유원과 자신의 현재 거리였다.

200km 라니. 단 1cm 도 떨어질 수 없다. 태범의 까만 눈이 위험하리만치 빛나고 있었다.

***

“아가!!”

오랜만에 꿈에 나타난 아기 백호를 품에 꽉 끌어안고 복슬복슬한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끼흥!”

그새 조금 자랐는지 오동통해진 백호가 내 품을 파고들더니 기분 좋은 소리를 내었다.

“헤헤, 귀여워 우리 백호. 아! 그나저나 태명을 지어주기로 했는데 깜빡했네.”

고개를 갸웃거리는 백호에게 ‘오늘 너무 정신없어서 깜빡했어, 미안해.’라고 사과했다.

“끄으, 끄항!”

아기 백호는 괜찮다는 듯 내 볼을 할짝거리더니 품에서 깡충 내려가 주변을 뱅글뱅글 돌아다녔다.

“헤엑, 헤에….”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뛰어다니던 백호가 지친 얼굴로 배를 드러내고는 벌러덩 누웠다. 그런 아기 백호의 볼을 톡톡 두드리며 눈을 반으로 접어 웃자 백호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잘 놀았어?”

“끼흥!”

“있잖아. 내가 생각해봤는데 너는 호랑이니까 태명에 호가 들어갔으면 좋겠어.”

호…. 음… 호야? 호돌이? 호돌이는 조금 유치하고.

좋은 이름이 없을까 고민하는 머릿속이 바빴다. 그러던 중 어디에서 태명을 음식 이름으로 지으면 잘 산다는 얘기가 떠올랐다.

“호가 들어가 있진 않지만 샤인 머스캣은 어때?”

무작정 좋아하는 과일을 내뱉자 태명이 너무 긴 것도 같았다. 그럼 줄여서 샤인이…? ‘빛나다, 반짝이다.’라는 뜻도 너무 좋고!

내가 슬쩍 아기 백호를 샤인아-. 하고 작게 부르자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지 녀석이 고개를 휙, 돌렸다.

“…치이… 알겠어…. 그럼 샤인이는 패스.”

저번에 샤인 머스캣을 주니 잘도 먹더니 막상 이름으로는 별로였나 보았다. ‘샤인이 귀여운데.’ 하고 입술을 내밀며 다시 아기한테 좋을 만한 이름을 떠올렸다.

“역시 호랑이니까 ‘호’가 들어가는 태명이 좋겠어.”

호떡이… 호떠기…. 음. 이건 너무 개떡이 같아서 별로…. 호박…? 이것도 아닌데.

고민을 거듭하는 찰나 하얗고 말랑말랑한 백호의 엉덩이가 눈에 들어왔다. 푹신푹신하고 따끈한 엉덩이를 만지니 자연스럽게 호빵이 떠올랐다.

“그래! 호빵이는 어때? 빵이! 귀여운데.”

이번에도 거절당할까 조심스럽게 묻자 아기 백- 아니, 호빵이는 새로운 태명이 마음에 들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 품에 뛰어들었다.

“꺄흥!”

“호빵이라는 태명이 마음에 들어?”

“크흥! 크하응!”

“다행이다. 헤헤.”

호빵이는 동그란 앞발로 내 뺨을 짚고는 열심히 내 얼굴을 핥았다.

“간지러워! 이 장난꾸러기!”

호빵이를 번쩍 안아 조그만 배에 얼굴을 문질렀다. 그러자 호빵이는 그르릉, 하고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바스락거렸다.

“아, 너무 귀엽다. 호빵아, 내 꿈에 이제 자주 나와 줘. 나, 사실은 조금 외로웠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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