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53)화 (53/136)

#53

“형님…. 그리고 이거….”

“왜, 또.”

준석이 불안한 얼굴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고작 삼십 분 동안 태범에게서 온 메시지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화질이 너무 별로야. 더 좋은 걸로 바꿔.]

[차유원 얼굴 가리지 마.]

[전체적으로 잘 찍어. 다리가 잘렸잖아.]

“…형님 진짜 왜 그러시냐. 이러다 영화제작사 하나 인수하시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준석은 태범에게서 온 문자를 확인하며 어제 오늘 있던 일을 떠올렸다. 007작전 남부럽지 않게 유원의 뒤를 쫓아다니며 유원이 바람에 날아갈까, 나뭇잎에 손이라도 베일까 모두가 전전긍긍했다. 뒤를 쫓을 거면 상대방이 알아채지 못하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기본이었다.

하지만 혹시 모를 위협에 유원에게서 50미터 이상 떨어지지 말라는 명령이 있어 그마저도 불가했다. 그래서 온갖 분장과 일반인 섭외를 통해 유원을 보호하며 따라다녔다.

그리고 조금 전에는 냉장고 박스까지. 준석은 매일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자신을 되돌아보며 뜨끈해진 뒷목을 잡았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후. 도끼야.”

“네, 형님.”

“우리 언제까지 이래야 하냐.”

“글쎄요. 그래도 오늘은 조금 낫지 않습니까. 형수님께서도 뭐… 이제 눈치를 채셨기도 하고.”

사실 처음에는 모두가 유원이 모르는 척을 하는 줄로 오해했었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인원이 그를 따라다니고, 아무리 호의라고 해도 계속해서 옷이며 과일이며 그에게 나눠주는데 모를 수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뒤를 쫓아다닌 지 만 38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자신들의 존재를 알아차린 유원의 눈치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어쨌든 점점 길어지는 미행을 빙자한 보호에 준석은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었다.

“하아…. 그래. 우리도 가자.”

준석은 점점 멀어지는 유원과 남자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냉장고 박스 아랫부분을 잡았다. 그때 남자 중 한 명이 감격한 얼굴로 준석에게 다가와 흥분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 형수님께서 드디어 영양가 있는 것을 찾으셨습니다! 무려 랍스터입니다!”

맨날 길거리 음식이나 싸구려 라면만 먹다가 제대로 된 음식을 찾았다는 말에 지쳐있던 준석의 얼굴도 밝아졌다.

“당장 모셔!”

“네, 형님!”

서둘러 냉장고 박스 안에 들어간 준석은 구멍에 다시 카메라를 연결하고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

혼자서 랍스터 두 마리를 해치운 뒤 만족해선 주변을 둘러보았다. 맞은편 테이블에 앉은 아저씨들도 맛있게 드셨는지 다들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밥 먹을 때는 올 줄 알았는데, 권태범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야, 내가 그놈을 왜 찾아? 권태범은 지금쯤 윤설아랑 잘 먹고 잘 자… 씨….’

윤설아와 함께 있을 권태범의 모습을 상상하니 갑자기 슬퍼졌다. 내가 코를 한번 훌쩍이자 내 옆을 지키고 있던 아저씨가 화들짝 놀라 물었다.

“혀, 형수님. 무슨 일 있으-”

“흐으…. 권태범 이 나쁜 새끼…!”

“헉.”

“씨이… 아저씨…. 솔직하게 말씀해 보세요…. 흑, 권태범이 윤설아 씨 집에 숨겨 둔 거 맞죠? 그런 거죠?”

눈물이 고인 채로 아저씨를 올려다보자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뚝 흘러내렸다. 당황한 얼굴로 눈동자를 또르르 굴려 내 시선을 피하는 모습을 보니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어떤 대답일지 예상되었다.

흑. 그럴 줄 알았어. 이럴 거면 아저씨들은 왜 내 옆에 두는 거야.

다 소용없었다. 나는 콧물을 훌쩍이며 눈가를 벅벅 닦았다. 그 순간, 머리가 차게 식으며 끔찍한 생각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설마…. 내가 임신한 걸 알고… 감시하러 온 거 아니야? 그래서 권태범은 없고 이 아저씨들만… 날 납치해서 우리 아기를 죽, 죽이려고….’

끔찍한 상상에 전신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숨도 가빠졌다. 내가 달달 떨자 아저씨가 당황한 얼굴로 나를 보며 무어라 말했지만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 근데.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는데…. 내가 임신한 걸 알고 있는 건 맞을까?’

아직 아무한테도 내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건 그냥 내 불안에 가까운 생각인데. 왜 자꾸 권태범이 이 사실을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들까.

그때 ‘혹시 아저씨들도 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저씨들이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걸 보면 권태범한테서 무언가 언질을 받았겠지. 하지만 대놓고 물어보는 건 아직 위험했다. 권태범의 의도를 파악하기 전까지는 나도 모르는 척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럼 어떻게 알아내지…….’

그때 내 눈에 무언가 들어오며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테이블 한쪽에 있는 동그란 벨을 누르자 얼마 지나지 않아 고급 양복을 차려입은 남자가 다가와 필요한 게 있냐고 물었다.

“소주 한 병만 가져다주세요.”

일부러 다른 메뉴를 구경하는 척 고개를 돌리며 아저씨들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자 지금껏 조용히 내 옆을 지키던 아저씨가 내 주문을 막았다.

“술은 안 됩니다, 형수님.”

“왜요?”

“……말씀드릴 순 없지만, 안 됩니다.”

답을 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아저씨를 향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그러면 담배 하나만 빌려주세요.”

“……그것도 안 됩니다.”

곤란한 얼굴을 하는 아저씨의 시선이 순간 내 배에 닿았다 떨어졌다. 그런 아저씨의 행동을 보며 확신했다.

‘내가… 임신한 걸 권태범이 알고 있어.’

그렇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망가야 했다. 권태범이 모든 사실을 안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쿵쾅거리며 마음이 급해졌다. 아까 식당에 들어오면서 봐두었던 뒷문이 떠올랐다. 그거다. 간장이 담긴 소스를 자연스럽게 툭, 하고 건드렸다.

“괜찮으십니까.”

“어, 어떡해, 괜찮으세요?”

진짜 자연스럽게 친 건데 아저씨의 눈은 빛보다 빨랐다. 순간 손을 뻗어 맨손으로 소스 통을 잡은 아저씨의 소매가 축축하게 젖어버렸다.

“괜찮습니다. 간장 다시 가져다 드릴까요?”

“아, 아니요 괜찮아요.”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요…. 결국 ‘화장실을 가는 척 뒷문으로 몰래 도망치기 작전’은 장렬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도 아직 괜찮아. 남은 작전이 마, 많으니까.

침을 꿀꺽 삼키며 아저씨의 눈치를 보곤 배를 부여잡았다.

***

“어떡해….”

거울 속 차유원의 안색이 창백했다. 그도 그런 게 아까부터 작은 틈만 생기면 도망가려고 했는데 그 작은 틈은 절대 생기지 않았다. 일부러 배가 아프다며 화장실도 몇 번이나 오가고,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며 편의점도 갔다. 심지어는 일부러 식당에 카드까지 두고 왔는데 전부 다 실패하고 말았다.

어찌나 팀워크가 그렇게 좋은지…. 창식 아저씨가 내 옷을 사러 나가면 동준 아저씨가 내 옆에 딱 붙어있었고, 동준 아저씨가 계산을 하는 동안 나와 잠시 떨어져 있으면 빈자리를 채우려는 듯 명훈 아저씨가 내 옆에 달라붙었다.

마지막으로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골목으로 도망치려고 했지만, 양옆 앞뒤로 감시하는 눈이 너무 많아서 결국 그것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아…. 미치겠네, 진짜.”

허탈했다. 그래도 이러고 있을 순 없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넓은 방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갑자기 든 생각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 그 생각을 못 했네. 저번처럼 카트에 숨어서 가면 되지 않을까?”

그럼 팁은 얼마나 줘야 하지? 수중에 있는 돈을 정리해 놓고 급히 전화기를 들어 룸서비스를 주문했다. 식사류는 조금 비싸서 콜라 하나를 시켰다. 콜라 하나에 만 원이나 하는 게 너무 아까워서 눈물이 찔끔 나올 뻔했다.

초조한 마음으로 호텔 직원을 기다리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띵동-

방 안을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튕겨져 나가듯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현관문으로 달려갔다. 수동으로 잠근 문을 활짝 열자 까만색 정장을 입은 단단한 몸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형수님, 주문하신 콜라입니다.”

“…동준 아저씨가 왜….”

“혹시 이상한 사람이라도 접근하면 어떡합니까. 이 늦은 시간에.”

그러게요… 이 늦은 시간에 아저씨들이 왜… 지금까지 쉬지도 않고 문 앞을 지키고 있었는지 궁금하다고요…. 익숙한 얼굴의 아저씨들이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그럼 맛있게 드십시오. 아, 양치는 꼭 하고 주무셔야 합니다.”

“네… 가, 감사합니다….”

손에 쥔 신사임당 지폐 몇 장을 뒤로 숨기고 콜라를 받아 들었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콜라는 냉장고에 넣어두고 터덜터덜 침대로 향했다. 침대에 누워 고급스러운 객실 인테리어를 바라보았다. 이게 도대체 도망인 건지, 감시인 건지, 여행인 건지. 권태범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선 다시 서울로 가서 권태범을 붙잡고 뭐하는 짓이냐며 따지고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되면 나는 제 명에 못 살겠지…. 하아… 일단 내일 다시 도전해보자.”

내일은 꼭 도주에 성공하리라. 그렇게 다짐한 나는 밀려오는 졸음에 몸을 둥글게 말아 넣고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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