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매의 눈으로 골목을 쓱 훑었다가 전봇대 뒤에 숨어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아저씨와 두 눈이 마주쳤다.
‘아니 진심으로 근육질의 거대한 저 몸이 전봇대 하나로 가려질 거라고 생각해서 저렇게 숨어있는 건가?’
“허….”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왜 여태 이걸 눈치채지 못했는지.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이상했던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내가 그동안 너무 순수했나 보다.
“이대론 안 되겠어.”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나 아저씨에게 다가갔다. 아저씨의 안색이 점점 파리해졌지만 내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아저씨와 내 사이에 전봇대 하나를 두고 걸음을 멈추었다.
“흡.”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흠칫, 몸을 떠는 아저씨가 조금 불쌍해 보였다.
‘아니야, 정신 차려. 지금 이 아저씨 걱정할 때야?’
그동안 지켜본 결과 아저씨들의 외모가 조금 무섭긴 했지만 다들 착한 사람이었다. 마음이 조금 약해지려고 했지만 일부러 목소리를 키웠다.
“아저씨. 권태범 씨 부하 맞죠?”
“……힉.”
급히 숨을 들이마신 아저씨는 당황한 얼굴로 눈을 깜빡거렸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는 행동이 몹시 부산스러웠다.
‘세상에, 진짜 한두 명이 아니었네?’
투명하디 투명한 아저씨의 시선 덕분에 전봇대뿐만 아니라 경차 뒤, 교통콘 사이, 일식집 수족관 뒤 등등 다양하게도 숨어있는 아저씨들이 내 눈에 들어왔다.
“오호. 저기, 저기, 그리고 저기 있는 아저씨들도 다 같이 오신 건가 봐요?”
아저씨들이 숨어있는 곳을 하나씩 가리키며 물었다. 입은 웃지 않고 눈만 접어 웃자 아저씨의 안색이 더 창백해졌다. 아저씨가 다른 아저씨들을 쳐다보는 바람에 긴가민가했던 부분들도 다 해소되었다. 자신감에 찬 얼굴로 팔짱을 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권태범 씨는 지금 어디에 있어요?”
이 주변에 있을 게 분명한데.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권태범이 있을 만한 곳을 찾아봤지만, 이미 아저씨들이 자리를 다 차지해서 딱히 숨어 있을 만한 곳이 없었다.
‘설마 저 냉장고 박스 안에 사람이 있겠어?’
어색하게 도로 한구석에 있는 냉장고 박스를 의심스럽게 봤다가 아저씨를 힐끔, 보았다. 그러자 아저씨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내 시선을 피했다. 말해줄 생각이 전혀 없는 모습에 피곤한 눈가를 쓸어내렸다.
“하아…. 그럼 아저씨가 저 대신 전해주세요. 저 서울 안 가요. 그리고 애초에 그 집에 들어간 이유도 싸움 배우려고 한 거였어요. 근데 그것도 이제 제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더 이상 저한테 신경 쓰지 말라고 전해주세요.”
“…….”
“아, 참. 그리고 권태범 씨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평~생 잘 먹고 잘살라는 말도 꼭꼭. 전해주시고요.”
속사포로 그동안 꾹 참았던 말을 와다다 내뱉자 아저씨가 화들짝 놀랐다.
“혀, 형수님…!”
아저씨는 그제야 솔직한 얼굴로 나를 붙잡기 급급했다. 씨이…. 형수님 아니라니까!
“저 ‘형수’ 아니고요, 유원이거든요? 그리고 저 팔 아파요. 이거 이제 다 가져가세요. 저 필요 없으니까.”
뾰족한 말투로 쏘아붙이며 들고 있던 물건을 내밀자 아저씨가 허둥지둥 그것들을 도로 가져갔다. 나는 입고 있던 재킷까지 벗어서 넘기며 경고하듯 말했다.
“저 따라오지 마세요. 분명히 말씀드렸어요.”
누가 찾으러 오면 얌전히 따라갈 줄 알고? 그리고 우리 할머니가 한 번 바람 피운 놈은 또 바람피운다고 그랬어. 이젠 나도 흥이다!
억지로 끌고 가려고 해봐, 후추를 눈에 잔뜩 뿌려 줄 거야.
잔인한 상황을 시뮬레이션 하며 흥, 하고 콧바람을 내뿜었다. 자신감에 찬 얼굴로 아저씨를 지나치는 내 모습이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멋져 보였다. 푸흐- 허물어진 입술로 빙구 웃음을 지으며 씩씩하게 걸었다.
그러나 진짜 자유를 쟁취했다고 생각하며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던 것도 잠시였다.
“미, 미안해요. 다, 다른 가서 알아봐요, 청년!”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바로 내 등 뒤에 주렁주렁 달려있었고. 겁에 질린 사장님의 시선이 내 등 뒤에 닿았다. 싸한 느낌에 휙, 돌아보자 이번에도 까만색 정장을 입은 아저씨들이 내 뒤에 바짝 서 있었다.
“으즈씨드을….”
“흡-”
이를 갈고 노려보자 아저씨들은 내 눈치를 보며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아니, 얼른 일자리를 구해야 월세든 고시원이든 집을 구할 수 있는데!’
어제 일을 겪고 나니 안정적으로 머물 수 있는 곳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들었다. 하지만 수중에는 50만 원이 채 안 되는 돈이 전부였고, 이 돈으로 월세를 구하는 건 턱도 없었다.
보증금은 최소 몇백부터 시작이니…. 그나마 근처에 몇몇 고시원이 있는 게 다행이었다. 고시원에 머물며 몇 달 정도 보증금을 모아 월세를 구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도 안정된 일자리를 구하고 나서의 일이지. 하아….
“왜 자꾸 방해하세요! 그렇게 딱 버티고 계시니까 사장님들이 겁먹으시잖아요.”
벌써 8번째나 반복되는 상황에 꾹꾹 눌러 담았던 인내심이 팡, 하고 폭발했다. 진짜 왜 이렇게 방해를 하는 거야. 가뜩이나 일자리 구하는 것도 생각보다 어려워서 힘들어 죽겠고만.
아르바이트 공고가 붙어있는 가게에 들어갈 때마다 아저씨들은 사장님들께 무언의 압박으로 번번이 나를 방해하기 일쑤였다. 이제는 너무 화가 나다 못해 눈물까지 핑 돌았다. 아저씨들을 원망스럽게 보자 그들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고개를 떨궜다.
“죄, 죄송합니다, 형수님….”
“혀, 형수님. 죽여주십시오!”
“목숨으로 죄를 용서받겠습니다.”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머리를 박으려는 아저씨와 재킷 안쪽에서 칼을 빼 드는 아저씨들을 겨우겨우 말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야 원망할 수도 없고…. 그래, 이 아저씨들이 무슨 죄가 있겠어. 이게 다 그 나쁜 권태범 때문이지.
배 속에 있는 아가를 생각해서 좋은 말만 하려고 했는데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하아…. 미치겠네.”
해가 점점 내려앉을수록 마음이 조급해졌다. 나는 제발 부탁한다며 두 손을 모았다.
“제발 저 좀 방해하지 마세요. 네?”
“형수님….”
“저 일자리 구해야 해요.”
아저씨들의 형수님이 아니라고 말하기엔 내 입이 더 아팠다. 나를 애처롭게 바라보는 아저씨들을 노려보며 답답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저씨들이 돈 줄 거-”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저씨들 중 한 명이 노란색 현금다발을 불쑥 내밀었다. 저게 다 얼마야…. 한눈에 봐도 내 수중에 있는 돈보다 훨씬 많은 것 같았다.
“…거 라 해도! 저는 절대 안 받을 거예요.”
진짜 돈을 준다고 할 줄이야.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당장 잘 곳-”
그러자 이번에는 다른 아저씨가 내게 2001호의 카드키를 건네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곳이! 있으니까 그나마 다행이긴 한데!”
하아… 내가 무슨 사춘기 어린애도 아니고…. 누가 보면 철부지 재벌 3세 도련님이 도망이라도 온 줄 알겠네. 권태범 이 새끼는 코빼기도 안 보이고, 이 아저씨들만 잔뜩 있고!!
짜증이 폭발해 발을 동동 구르자 아저씨들이 아연실색해선 내 발밑에 쿠션을 밀어 넣었다.
…이건 또 뭐야? 웬 쿠션? 이런 걸 왜 들고 다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황당한 얼굴로 아저씨를 바라보니 그가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다…. 다치십니다.”
도대체 왜 수줍어하는 건데요…?
묘하게 붉어진 얼굴에 한숨을 푹 내쉬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황제 감금 대신 황제 마실이었구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랬구나….
씁쓸한 입안을 굴리며 센치한 얼굴로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래요, 아저씨들. 오늘은 이만하고 일단 가요…. 저 배고파요….”
그래. 어차피 들킨 거, 이 아저씨들이 쉽게 물러날 거 같지도 않고. 때를 봐서 할머니 집으로 도망가자. 지금 42만 8천 3백 50원밖에 안 남았으니까 그동안은 권태범 돈을 펑펑 쓰면서!
이렇게 간단하게 상황을 정리하니 갑자기 식욕이 솟아올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그 음식도 그냥 다 먹을걸.
머릿속에 어제 먹지 못한 호화 음식이 떠오르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장 비싼 메뉴로는 뭐가 있을까. 이왕 이렇게 된 거 권태범이 깜짝 놀랄 정도로 비싼 거 먹어야지.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져 볼이 하늘로 치솟는 게 느껴졌다. 아저씨들도 어쨌든 나 때문에 고생이시니 함께 먹을 만한 메뉴를 생각하다 랍스터를 떠올렸다.
“아저씨들. 저희 파티하러 가요, 랍스터 파티!”
권태범의 돈으로 생색내는 게 좀 뻔뻔하긴 했지만 뭐 어떡해. 싫으면 지금이라도 그냥 가든가. 내가 고개를 치켜들고 당당하게 블랙카드를 내밀자 아저씨들이 활짝 웃으며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
그 시각, 준석은 냉장고 박스에 숨어 작은 구멍에 끼워 넣었던 카메라를 뺐다. 벽을 툭툭 치자 주변에 있던 도끼가 쪼르르 달려와 냉장고 박스를 번쩍 들어 준석을 꺼내주었다.
한 시간 만에 다시 햇빛을 본 준석은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비볐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준석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았다.
“아니. 형님은 형수님이 왜 도망가신지 정말 모르시는 거야?”
카메라가 꺼진 것을 확인한 준석이 고개를 돌려 도끼에게 말했다. 준석에게 차가운 냉수를 건넨 도끼가 반들반들한 제 머리를 뻑뻑 문질렀다.
“그런 거 같습니다….”
“하아… 이해가 안 간다, 나는. 다른 때는 눈치도 빠르신 분이.”
안 보는 데선 나라님도 욕한다더니, 준석은 태범이 이해가 안 된다며 혀를 찼다. 그런 준석을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던 도끼는 천천히 핸드폰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