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쾅쾅-
헉. 그새 잠이 들었나 보다. 갑자기 방문을 부술 듯 두들기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취객인가? 권태범은 아니겠지?
걱정되는 마음에 콩닥콩닥 뛰기 시작하는 심장을 붙잡고 방문을 걸어 잠갔다. 녹슬어서 색이 바랜 문고리가 어설프긴 했지만 없는 것보단 낫겠지….…. 문고리를 걸어 잠그고 한 걸음 물러서는데 또다시 누군가 현관문이 부서져라 쾅쾅 두들겼다.
“누, 누구세요?”
“하, 학생. 잠깐 문 좀 열어줄 수 이, 있어요?”
떨리는 음성으로 묻자 문밖에서 사장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시지…?
고장 난 보일러가 생각나셨나?
의아한 마음으로 꽉 걸어 잠갔던 문고리를 걸어둔 채 문을 열었다. 좁게 열린 문틈으로 하얗게 얼굴이 질린 사장님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확인해보니까 이 방 보, 보일러 고장 난 게 맞더라고, 아니 맞았스, 습니다.”
역시 보일러가 고장 난 게 맞았구나. 어쩐지 따뜻해질 기미가 안 보이더라. 아직도 방 내부가 너무 추웠다. 심지어는 복도와 별반 차이가 나지 않아 안 그래도 찬물로 샤워한 몸이 으슬으슬 떨려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말인데, 방 바꿔줄게. 제, 제일 좋은 방으로 응?”
“괜찮아요. 이미 다 씻었어요.”
이 늦은 시간에 갑자기 방을 바꿔주겠다고 하는 게 이상했다. 돈을 더 내라는 건 아니겠지? 나는 바짝 긴장해서 문고리를 꽉 잡고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자 사장님이 불쑥 문틈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내 손을 잡았다.
“허, 왜, 왜 이러-”
“응? 내 성의를 봐서라도. 여긴 너무 춥고, 방도 조금 그, 그렇잖아. 학생, 제발….”
거의 울먹이는 사장님의 모습에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하지…. 하지만 갑자기 저러시는 게 뭔가 찝찝한데….
내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사장님이 서둘러 내 손에 다른 열쇠를 쥐여주었다.
“자, 여기 키 줄 테니까 여기 가서 자면 돼요. 체, 체크아웃도 그냥 학생이 원할 때 나가면 되고. 내, 내 집이다 생각하고 편하게 자요. 내가 정말 미안해서 그러는 거니까. 아, 알겠죠, 학생?”
손까지 벌벌 떠는 사장님의 얼굴엔 간절함이 가득했다. 정말 미안해서 그러시는 건가…?
“그럼 난 방 바꿔 준 거예요?”
아저씨는 확답을 듣고 싶은 듯 나를 간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아저씨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래층으로 사라졌다.
“이제 어떡하지.”
혼자 남은 방에 우뚝 서서 방을 한 번 쭉 둘러보았다.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침대와 흉물스럽게 널려있는 커튼, 곳곳에 길게 늘어진 거미줄, 제집인 듯 방바닥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바퀴벌레까지.
모텔 사장님의 태도가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이런 곳보다는 더 좋은 방이 나에게도, 아기한테도 나을 것 같았다. 결국 옮기기로 마음먹고 방을 나섰다.
“응…? 2001호?”
열쇠에 달린 고리에는 ‘2001호’라는 글자가 쓰여있었다. 게다가 마치 새것처럼 201호 열쇠와는 달리 2001호의 열쇠는 흠집 하나 나지 않은 모습이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여기 건물이 그렇게 높지는 않았던 거 같은데…? 혹시 201호를 잘못, 아니 여기가 201호잖아.’
당황스러움에 눈을 깜빡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 내 눈에 현관문 바로 맞은편 벽에 붙어 있는 A4용지, 아니 A2용지가 들어왔다.
[2001호로 가는 방법.]
“…뭐야 방을 바꿔 준다면서…. 거, 건물을 바꿔주시면 어떡해요…?”
2001호로 가는 방법이라고 크게 쓰여있는 안내문에는 현재 머물고 있는 바다모텔에서 약 6분 정도 걸어가면 나오는 호텔이 최종 목적지로 적혀있었다.
갑자기 방을 바꿔준다고 할 때부터 이상했다. 사장님의 수상한 태도에 누가 봐도 급조한 이 안내문까지. 이건 역시나 함정이 맞았다. 방을 바꿔준다는 핑계로 엄청나게 많은 추가 요금을 요구할 게 분명했다. 이상해도 너무 이상한 상황에 급히 계단을 내려와 카운터로 향했다.
“저기 사, 사장님-”
작게 난 창문을 두드리려 손을 뻗었을 때, 창문 안쪽에 급하게 날려 쓴 쪽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당분간 자리 비웁니다.]
“뭐, 뭐야 진짜…?”
추가 비용에 이어 혹시 사장님이 이상한 짓을 하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그냥 원래 방에 있는 게 낫겠다. 찝찝한 마음에 서둘러 2층으로 올라왔다. 하지만 그 잠깐 사이에 무슨 짓을 한 건지, 아무리 열쇠를 밀어 넣어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하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더니. 이제는 비까지 한 방울씩 내리는 바람에 기분이 더더욱 울적해졌다. 갈 곳이 없이 한참을 불안정하게 꺼졌다, 켜졌다 반복하는 형광등 아래에 쭈그려 앉았다.
“아냐, 내일을 위해서 얼른 자야지.”
그러다 문뜩 이렇게 낭비하는 시간이 아까워졌다. 내일은 일자리도 구하고, 차유원의 일기장에 적혀있던 장소도 가야 한다. 할 일이 태산이었다.
“씨이…. 그래. 어떻게든 되겠지.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갑자기 솟아난 자신감에 결의에 차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괜찮아 아가야. 권태- 아니. 음… 너네 아버지…? 아무튼 그 사람한테 배운 게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무슨 일 생기면 급소를 콱 찔러버리지 뭐.”
점점 떨어지는 체온에 양손으로 몸을 감싸 안으며 아기를 안심시키려는 건지 스스로를 안심시키려는 건지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벽에 붙어 있던 안내문을 뜯어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아이고, 나도 모르게 우산을 두 개나 사버렸네. 하는 수 없이 하나는 버, 버려야겠다. 누구 필요한 사람이 나 대신 꼭 좀 써줬으면 좋겠다.”
모텔 입구에서 누군가 우산 하나를 바닥에 내려놓고 가버렸다. 우산 하나가 남는다고? 안 그래도 빗방울이 하나씩 내려 옷을 뒤집어쓰고 가야 하나 걱정했는데 잘됐다.
뒷모습밖에 보지 못한 남자가 두고 간 우산을 집어 들며 헤헤, 하고 웃었다. 꼭 나쁜 일만 일어나라는 법은 없나 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샛노란 색의 우산을 쓰고 안내문을 따라 길을 걸었다. 멀리서도 삐까뻔쩍 화려한 외관에 어렵지 않게 길을 찾을 수 있었다.
호텔에 들어가기 직전 근처 편의점에 들러 후추를 구매했다. 이건 정말 혹시 모를 일을 위한 대비였다. 아무 일 없으면 식재료로 쓰면 되니까. 후추를 손에 꽉 쥐고 심호흡을 마친 후 호텔로 들어갔다.
“진짜 사기는 아니겠지?”
이제 남은 돈이 42만… 5천…. 여기 하루 숙박비는 얼마나 하려나….
호텔 라운지 앞에서 수중에 남은 돈을 떠올리고 있을 때, 사람 좋은 얼굴을 한 남자가 내게 다가왔다.
“바다모텔에서 오신 분 맞으십니까?”
“마, 맞아요….”
남자의 가슴팍에 달린 명찰을 보니 이 남자는 무려 호텔 지배인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이런 분이 나를…? 어리둥절한 상태로 지배인을 따라갔다. 긴장한 마음에 재킷 끝을 말아 쥐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수상한 사람은 없는 것 같은데….
띵-
좋은 호텔이라 그런지 엘리베이터도 급속이었다. 눈을 몇 번 깜빡이자 벌써 20층이었다.
“저… 근데 호, 혹시 안에 누가 저를 기다리고… 그런 건 아니죠?”
내가 긴장한 얼굴로 묻자 남자는 안심하라는 듯 부드러운 얼굴로 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 2001호에는 한 분만 묵으신다는 말씀을 미리 전달받았습니다.”
“그런가요….”
자세한 설명에도 내가 탐탁지 않게 말끝을 얼버무리자 남자가 덧붙였다.
“혹시 그래도 걱정되신다면 현관문 잠금 설정을 수동으로 해드리겠습니다. 그럼 밖에서는 절대 안으로 들어올 수 없거든요.”
“아…! 그럼 그렇게 해주세요. 감사합니다.”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잠금 설정을 수동으로 바꿔준 지배인은 허리를 90도로 숙이고 방을 빠져나갔다. 그래도 의심이 들어 손수 몇 번 두드려 본 현관문은 아주 단단해 보였다.
꽉 잠긴 문을 몇 번 잡아당기고 이런저런 확인을 마치고 나서야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았던 걱정이 싹 사라졌다. 이제야 안심되는 마음에 긴장이 풀어졌다. 신나서 넓은 방을 빙그르르 돌며 행복한 외침을 내뱉었다.
“짱 좋아!!”
그나저나 사장님. 나한테 정말 미안하셨나본데…?
이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됐는데. 첫인상과 달리 마음씨가 아주 좋은 사장님을 떠올리며 창밖을 구경했다. 해수욕장이 바로 앞이라 그런지 어둡지만 희미한 빛 사이로 바다가 보였다. 너무 예쁜 풍경에 넋을 놓고 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호텔 방을 구경했다.
“와- 좋긴 너무 좋다….”
방이 어찌나 넓은지 혼자 잔다는 게 아쉬워질 정도였다. 한바탕 구경을 마치고 거실 소파에 지친 몸을 누였다. 한눈에 들어오는 넓은 거실과 셋이 자도 넉넉한 침대가 마음에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좋은 방이다.
긴장감도 사라지고 잔뜩 얼었던 몸도 따뜻한 온기에 눈 녹듯이 녹기 시작하자, 그다음엔 허기가 찾아왔다.
“어, 어디서 맛있는 냄새가.”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폴폴 나는 탓에 코를 킁킁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방이 어찌나 넓은지, 침실과 작은 주방, 거실까지 다 나뉘어 있었다.
“…이거 나 먹으라고 준비한 건가?”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음식 옆에 [웰컴 푸드]라는 메모가 눈에 띄었다.
웰컴 푸드라고 하기엔 너무 과한데. 무슨 웰컴 푸드가 바닷가재에 스테이크에…. 샤인 머스캣까지? 심지어 샤인 머스캣은 드라이아이스 위에 올려져 있었다.
“이거 설마…!”
수상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 미간을 좁힌 나는 숨을 죽이곤 방 안을 꼼꼼히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