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49)화 (49/136)

#49

바삭한 튀김옷 위에 설탕이 솔솔 뿌려진 핫도그를 보물단지처럼 품에 안은 채 머쓱한 얼굴로 웃음을 터뜨렸다. 도망친 첫날부터 입맛이 돌아 돈을 많이 쓰긴 했지만, 돈이야 금방 벌면 되니까. 그동안 계속 굶었던 기억이 있어서인지 입맛이 돌 때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아직 건강하고 어리니까 일자리쯤이야 금방 구해지겠지. 그나저나 식기 전에 얼른 먹어야 되는데.’

강릉까지 왔으니 바다가 보고 싶었다. 늦은 밤이어서 바닷물에 발도 담그지 못하겠지만, 멀리서 보기라도 하고 싶었다. 그렇게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 강릉 송정 해수욕장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사람이 많은 시장을 지나 인적이 드문 길에 들어선 버스에 잘못 내릴까 방송에 귀를 쫑긋 세웠다.

[이번 정류장은 강릉 송정 해수욕장입니다. 버스가 정차한 후 하차하세요.]

“우앗, 다 왔다.”

다행히 길을 잃어버리지 않고 정류장에 무사히 내릴 수 있었다. 맞은편에 바다가 보이는 신호등을 기다리며 핫도그를 꼭 껴안았다. 아직 식지 않은 핫도그를 냄새를 맡으며 침을 꼴깍 삼켰다. 다리를 동동 굴리고 바뀐 신호등에 걸음을 옮기려는데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불러 세웠다.

“잠깐만, 학생.”

바닷가여서 그런지 해가 지니 봄바람도 꽤나 매서웠다. 예상하지 못한 추위에 손에 입김을 불며 고개를 돌렸다.

‘응? 누구지?’

“어… 안녕하세…요?”

한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쳐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아주머니가 갑자기 내게 두꺼운 재킷을 건넸다.

“학생. 추운데 얼른 이거 입어.”

“네?”

저…요? 당황해서 눈만 깜빡거리자 아주머니가 조금 인상을 쓰더니 내 손에 들린 핫도그를 가져갔다.

아, 안 돼, 내 핫도그…!

“내가 우리 아들 생각나서 그러는 거니까 얼른.”

“하, 핫도그…! 아, 근데 갑자기 옷은 왜… 저 괜찮아요!”

살짝 추워서 콧물을 훌쩍거리긴 했지만, 그렇게 추운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주머니의 눈에는 어림도 없었나 보다. 아주머니는 핫도그를 담보로 내 손을 잡아 재킷을 입혀 주었다.

“그럼, 따뜻하게 잘 입고 다녀요~”

정신을 차리고 나니 지퍼가 목 끝까지 채워져 있는 상태였다. 핫도그도 그대로 내 품에 돌아왔고.

“감사합니다….”

입을 떼기도 전에 훌쩍 멀리 가버린 아주머니를 향해 웅얼거리듯 감사 인사를 했다. 조금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덕분에 몸은 따뜻했다. 강릉 사람들은 참 인심이 좋은 것 같다.

“안녕하세요, 그…. 오늘 하루 숙박하려고 하는데요.”

바닷가에서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운 좋게 평일 숙박 만 원이라는 모텔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혼자 왔어요?”

짐도 없이 몸만 달랑 온 내가 이상했는지 사장님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물었다.

“네.”

사실 혼자는 아니고 우리 아가까지 해서 두 명이지만, 얼른 쉬고 싶어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마음속으로 아가한테 사과를 했다.

‘아가야 미안, 그래도 우리는 한 몸이니까.’

내가 배를 문지르며 고개를 숙이자 사장님의 눈빛이 조금 더 가늘어졌다.

“흠…. 혹시 이상한 짓하고 그러는 거 아니죠?”

이상한 짓?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서 대답을 못 했는데, 아저씨는 생각만 해도 기분 나쁘다는 듯 혀를 찼다.

“여기까지 와서 혼자 죽으려는 사람들이 있어서 하는 말이에요, 쯧쯧- 남의 영업장에서 무슨 그런 민폐인지.”

아…. 내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젓자 아저씨가 두툼한 손을 내밀었다.

“그럼 학생만 믿고 빌려줄게요. 얼굴이 그럴 거 같이 생기지는 않아 보이네.”

아저씨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떡였다.

‘그럴 거 같이 생기지 않았다는 말은 무슨 뜻이지?’

나는 노골적인 시선에 흠칫 고개를 숙이며 차유원의 얼굴을 슬쩍 문질렀다.

“사장님… 그…. 저기 앞에 만 원이라고 쓰여 있던데…. 맞나요?”

모텔 안으로 들어오기 전, 미리 꺼내놓은 꼬깃꼬깃한 만 원짜리 지폐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아, 만 원짜리?”

사장님은 내가 손에 쥔 만 원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 방은 좀 허술한데. 괜찮아요?”

“아, 괜찮아요. 그걸로 주세요.”

먹을 거에 눈이 조금 돌아가긴 했지만, 이젠 지출을 아낄 때였다. 상황이 언제 어떻게 될지 확실하지 않았고, 아가가 태어나면 기저귀값부터 분유값까지 돈이 들어갈 곳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늘 하루에 쓴 돈이 너무 아까워 후회가 밀려왔다.

“방은 201호고 체크아웃은 11시니까 시간 맞춰서 내려와요.”

“네, 감사합니다.”

낡은 열쇠를 받아 들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러자 아저씨는 손을 휘휘 젓더니 다시 낡은 브라운관 텔레비전에 시선을 돌렸다. 어두컴컴한 복도를 지나 거미줄이 잔뜩 쳐진 계단을 올라오니 201호가 보였다. 문이 제대로 잠기기나 할까 싶을 정도로 낡은 문고리에 열쇠를 밀어 넣고 문을 열었다.

“…싼 게 비지떡이라더니.”

허술하다고 하더니 각오했던 것보다 방 상태가 좋지 않았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파스슥 소리와 함께 재빨리 도망가는 것들이 있었다. 으윽.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오늘 잠은 다 잤네….”

한숨을 푹 내쉬며 터덜터덜 방 안으로 걸어갔다. 구석에 자리 잡은 침대 시트에는 이것저것 정체 모를 자국이 있었다. 찝찝함에 결국 재킷을 입은 그대로 몸을 최대한 둥글게 말아 누웠다.

“태범 씨 집에서는 이런 건 상상도 못 했는데….”

몸이 고생이니 호화롭게 살던 시절이 떠올랐다.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맛있는 저녁을 먹고 권태범이 주는 과일을 받아먹고 있을 시간이었다.

나도 모르게 권태범을 떠올리니 마음이 울적해졌다. 그냥 돌아갈까…? 잘못했다고 빌면 용서해주지 않을까?

마음이 괜히 약해지며 손에 얼굴을 묻고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갑자기 환하게 웃는 윤설아와 다정하게 서 있던 두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누가 봐도 잘 어울리는 선남선녀였다.

“차유원, 정신 차려. 너 도망친 지 몇 시간이나 됐다고. 게다가 그 나쁜 놈은….”

쓸데없는 생각에 고개를 붕붕 저었다.

그래. 정신 차리자, 정신!!!

부드러운 뺨을 찰싹찰싹 내리쳐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단 씻고 앞으로 어떻게 살 건지 계획을 세워야지. 굳은 결심으로 씩씩하게 욕실로 걸어갔다. 낡은 샤워기 레버를 따뜻한 쪽으로 돌려놓고 천천히 옷을 벗은 후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찬물에 발끝을 잔뜩 웅크리고 따뜻한 물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따뜻한 물은 나오지 않았고 체온은 점점 내려갔다.

“으… 추, 추워.”

거울을 보니 차유원의 입술이 파랗게 질려있었다. 이렇게 있다가는 아가한테 무슨 일이 생길 거 같아 벗어 놓은 옷을 급히 껴입었다. 손을 녹이고 배를 따뜻하게 감싼 뒤 카운터로 내려갔다.

똑똑-

“사, 사장님….”

내가 작게 난 창을 똑똑 두드리자 아저씨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환불은 안 돼.”

“아, 그게 아니라 방에 따뜻한 물이 안 나와서요…. 방도 조금 춥고….”

만 원이라는 가격에 양심상 침대 사정까지 말할 수는 없었다. 그나마 따뜻한 물이라도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요청하자 아저씨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옆에 보일러 스위치 누르면 돼요.”

“아, 감사합니다.”

“만 원인데 뭘 바라는 거야. 요즘 젊은 것들은 뻔뻔하다니까-”

혼잣말인 듯 아닌 듯 말끝을 늘이며 한숨을 내쉬는 사장님의 말에 눈치가 보여 고개를 푹 숙이고 걸음을 옮겼다. 누군가 모텔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지만, 고개를 돌릴 새 없이 후다닥 2층으로 올라왔다.

방으로 돌아와 사장님이 말한 보일러 스위치를 꾹 눌러봤지만 여전히 변한 건 없었다. 아예 고장이 난 듯 화면에 불이 들어오지 않아 우울해졌다.

“…그냥 대충 씻어야겠다.”

다시 내려가서 말해볼까 했지만, 사장님의 무서운 눈초리가 떠올라 고개를 저었다. 결국 오들오들 떨리는 입술을 꾹 깨물며 샤워를 시작했다.

“흐아….”

급한 대로 대충 몸을 씻고 샤워기를 껐다. 가만히 있는데도 몸이 부르르 떨리고 한기가 느껴졌다.

‘아가는 추우면 안 되는데….’

괜히 성급하게 도망쳐서 아가만 고생시키는 것 같았다. 바보 같아, 진짜….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며 세면대에 물을 받았다. 손에 물을 살짝 적셔 몸을 조금씩 닦았다. 몸을 깨끗하게 씻고 남은 물기를 꼼꼼히 닦아냈다. 점점 떨려오는 입술에 벗었던 옷을 급히 주워 입었다. 머리도 감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정말 감기에 걸릴 것 같았다.

조금 전 모르는 아주머니가 주셨던 재킷을 목 끝까지 채우며 힘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 뽀글이 재킷도 가져올걸. 괜히 후회가 됐다. 코를 훌쩍이며 침대에 눕자 서러운 감정이 몸을 덮쳤다.

“흐… 씨이, 나쁜 놈…. 개새끼….”

지금까지 그냥 찾지 않고 내버려 두는 걸 보면 윤설아와 그렇고 그런 사이인 게 맞나 보다. 하다못해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도 집 나가면 걱정한다는데 권태범은 나를 벌써 잊은 것 같았다. 그렇게 한동안 울적해하다 잠이라도 자자 싶은 마음에 불을 끄고 억지로 눈을 감았다.

고요한 적막 속에서 또다시 샤사샥, 하고 정체를 알고 싶지 않은 것의 소리가 거슬렸다. 결국 다시 불을 켜고 휴지를 조금 떼어내 작게 뭉쳤다. 그것을 귀에 꽂고 몸을 동그랗게 말아 누웠다. 내일은 숙식이 제공되는 일자리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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