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48)화 (48/136)

#48

‘와, 온통 새까맣네.’

해가 완전히 진 하늘과 똑같은 까만색 선글라스를 이 늦은 저녁에 쓴 모습이 재밌었다. 검은색 정장, 검은 머리, 검은색 선글라스까지. 완전 올블랙으로 깔맞춤한 모습에 속으로 키득거렸다.

그나저나 이분도 혼자 오신 건가?

오늘따라 친구나 가족들끼리 몰려다니는 모습을 보고 왠지 조금 외로웠던 참이었다. 왠지 혼자 놀러 온 거 같은 모습의 아저씨를 바라보며 은근슬쩍 몸을 기울였다.

“저기…. 아저씨.”

“흣, 네 형…, 아니 네!”

내가 갑자기 말을 걸어서 놀란 건지 아저씨가 혀까지 깨물고 당황했다.

“어…. 다른 게 아니라 혹시 아저씨도 혼자 오신 건가 해서요.”

“아…. 네, 그, 그렇습니다!”

왜 이렇게 땀을 흘리시지? 4월의 날씨는 선선하니 딱 좋은 것 같은데 아저씨는 많이 더운가 보다. 정장을 입어서 그런가…. 이마를 쓸어 넘기며 땀을 닦는 모습에 괜히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아저씨, 이거 드세요.”

막대 사탕과 함께 산 초콜릿 하나를 아저씨에게 건넸다. 그러자 아저씨는 굉장히 감동한 얼굴로 감사를 표했다.

많이 배고팠나 보다…. 어쨌든 초콜릿 하나로 아저씨와 친해진 나는 버스를 기다리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떻게, 우리 백호 한 번 더 자랑해볼까…?’라고 자신만만하게 생각했던 15분 전의 내 입을 틀어막고 싶어졌다.

“저희 전무님께서 아주, 정말 아주 아주 훌륭한 분이세요. 성격도 엄청 좋으시고, 부하, 아니. 직원들에게도 잘해주십니다. 하하….”

“아… 네에….”

“그리고 지, 집! 요즘 서울에 집값도 장난 아닌데 숙소도 제공해주시고, 밥은 물론 유니폼까지 제공해….”

무슨 말 만하면 직장 상사 얘기로 넘어가는 아저씨의 말에 금세 지쳐버렸다. 나도 한 수다 떠는데 이 아저씨는 어나더 레벨이다. 벌써 몇 번째 반복되는 아저씨의 직장 상사 얘기에 흥미를 잃고 영혼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버스 왜 이렇게 안 와…. 도망가고 싶다.’

차마 하얗게 질린 얼굴로 여전히 식은땀을 흘리는 아저씨를 외면하지 못하고 흐릿한 눈으로 버스 차선을 바라보았다.

“어, 왔다! 아저씨 버스 왔어요!”

멀리서 보이는 202번 초록색 버스에 흐릿했던 눈에 생기가 돌았다. 드디어 벗어날 수 있는 건가?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아저씨의 직장 상사에 대한 칭찬을 그만 듣고 싶었다.

버스가 정류장으로 다가와 자리에서 일어났다. 멈춰선 버스에 오르며 빈 1인 좌석을 향해 발을 뻗었다.

‘드디어 해방이다!’

하지만 어쩐지 뒤에서부터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안 돼, 절대 고개 도, 돌리지 마.’

결과가 어떨지 눈에 선했다. 필사적으로 외면하고 자리를 찾아가려 하자 ‘크흠.’ 하고 나를 애처롭게 부르는 아저씨의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기침에서도… 감정이 느껴지는구나. 금방이라도 통곡으로 바뀔 것 같은 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아저씨가 2인석 좌석을 가리키며 애처롭게 웃었다.

‘그, 그래. 3, 3 정거장만 가면 되니까….’

결국 아저씨를 외면하지 못한 나는 울적한 얼굴로 아저씨의 옆에 앉았다. 그래도 다행히 아저씨는 중앙시장으로 향하는 동안 입을 꾹 다물었다. 중간중간 식은땀을 흘리며 흠칫거렸지만 대체로 아무 일도 없었다. 아저씨의 수다에서 해방된 나는 버스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흥미없는 클래식이 나왔다. …아니지. 태교를 위해서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클래식이 더 나을지도.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아랫배 위로 손을 올리자 또다시 졸음이 밀려왔다.

“악…!”

결국 그러다 잠깐 졸아 창문에 이마가 부딪혔다. 아, 창피해….

“저 괘, 괜찮아요. 하하….”

욱신거리는 이마를 문지르며 옆에서 나보다 더 놀란 것 같은 아저씨를 진정시켜주었다.

“정말 괜찮으세요? 당장 병원이라도-”

“에이, 그 정도는 아니에요. 아구…. 근데 왜 이렇게 잠이 오는지.”

“그게 임, 크흠, 어…. 임…마가, 이마가! 엄청 빨개지셨네요.”

“그래요? 세게 부딪혔나 봐요.”

엄청나게 말을 더듬은 아저씨가 내 이마를 살폈다. 그렇게 놀랄 정도로 많이 빨갛나. 덕분에 잠기운은 확 달아나 버렸다.

[다음 정류장은 중앙시장입니다.]

“아저씨도 중앙시장 가신다고 하셨죠?”

마침 흘러나오는 안내 방송을 듣고 묻자 아저씨는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진짜 신기하네요, 가는 곳도 똑같고 저희 둘 다 짐이 없는 것도 똑같고. 아, 아저씨도 놀러 오셨어요?”

“아, 아니요, 저는 출장을….”

“그렇구나. 그럼 언제 돌아가세요?”

갑작스러운 내 질문에 당황한 듯 아저씨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괜한 질문을 했나 후회가 밀려들쯤 아저씨가 대답했다.

“그게 무기한 출장이라….”

“무기한 출장이요? 상사분 엄청 좋으시다면서….”

“아니요! 너무, 너무 좋으신 분입니다! 정말 최고의 직장 상사세요!”

안타까운 얼굴로 아저씨의 직장 상사라는 사람에 대한 욕을 하려는데 아저씨가 아니라고 펄쩍 뛰었다. 숫제 울먹일 기세였다.

혹시… 직장 상사를 좋아하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아주 적극적이었다.

“최고의 신랑감이시죠, 하하…. 그 육아도 괴, 굉장히 잘하실걸요?”

“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내가 너무 눈치가 없었구나. 좋아하는 사람 욕을 하는 게 싫었겠지. 혼자서 납득하며 눈치 없는 내 입술을 톡 하고 작게 때렸다. 곧이어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에 ‘두 분 잘되셨으면 좋겠어요.’라고 조용히 속으로 기도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형님….”

“왜.”

“그… 형수님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

준석은 강릉에 도착하자마자 태범이 유원을 데리고 서울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원의 뒤를 쫓으면서도 곁에 사람만 붙여둘 뿐 내버려두는 태범의 의도가 무엇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일단 내버려 둬. 저렇게 좋아하잖아.”

태범의 말에 준석은 유원을 바라보았다. 뭐가 그렇게 행복한지 창밖을 바라보며 방긋방긋 웃는 얼굴이 밝아 보였다.

“그리고 무슨 생각으로 도망친 건지 알아야겠어.”

“알겠습니다.”

임신까지 한 몸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도망친 유원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아야겠다. 하지만 이대로 유원을 데리고 집으로 간다면 그는 또다시 도망칠 게 뻔했다. 그러니 우선은 그 이유부터 알아야 했다. 그리고 유원의 마음까지도.

준석은 유원과 부하 직원이 함께 탄 버스의 바로 옆 차선으로 차를 조심히 몰았다. 창문을 짙게 선팅해서 유원이 이쪽을 바라보더라도 걸릴 일은 없었다. 준석은 조금만 손을 뻗어도 닿을 법한 거리에 있는 유원을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기분이 좋아 보여서 다행입니다.”

준석은 백미러를 통해 자신과 마찬가지로 느슨한 미소를 짓고 있는 태범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게.”

잘 웃네.

태범은 마지막 말을 입 안으로 삼켰다. 준석의 말대로 유원은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태범은 그런 유원의 모습을 바라보며 씁쓸한 입 안을 훑었다.

***

“와….”

북적북적한 시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게다가 늘어선 노점상엔 갖가지 맛있어 보이는 길거리 음식이 나를 반겼다.

꼬르륵.

‘아가야, 밥 먹으러 가자.’

입덧이 끝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가를 키우자고 다짐한 순간부터 입맛이 돌았다. 역시 우리 아가는 벌써 똑똑한 데다가 효자인 게 틀림없었다.

“저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 깜짝이야. 갑자기 멈춰 선 아저씨 때문에 깜짝 놀랐다. 게다가 검은색 양복과 특유의 깍듯한 말투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그나저나 잘 도망친 거겠지? 이 시간까지 조용한 걸 보면 권태범을 잘 따돌린 것 같았다.

“네, 그럼 다음에 봬요!”

“조심히 가십시오, 유원 님.”

인연이라면 언젠간 다시 만날 수 있겠지. 아저씨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그와 반대 방향으로 발을 옮겼다. 아까부터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두 가게가 목표였다.

‘어, 근데 방금 유원 님이라고 하지 않았나?’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 멀어져가는 아저씨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이름을 알려준 적도 없는데, 설마.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너무 배고파서 헛소리가 들리나 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다시 가게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사장님! 만두 2인분만 주세요! 고기랑 김치랑 섞어서요!”

“드시고 가세요?”

사장님의 말에 조금 고민을 하다 더 먹을지도 모르니 가게에서 먹고 가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네! 먹고 갈게요!”

모락모락 김이 나는 만두에 침이 절로 나왔다. 서둘러 하얀 연기를 헤치고 가게로 들어갔다.

***

“내일부터 아르바이트라도 해야겠다….”

접시를 싹싹 비우고 나자 한숨이 나왔다. 김치만두와 고기만두 각각 1인분을 먹고도 모자라 결국 가게에서 가장 비싼 새우만두까지 먹고 말았다. 그 순간에 왜 갑자기 권태범이 사줬던 크림새우가 생각나서…! 남은 돈을 생각하면 앞으로 돈을 조금 아끼든지, 일을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가게를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다 마주한 핫도그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돈을 아끼자고 생각했으면서도 노릇하게 구워진 핫도그를 보자 그런 다짐이 무색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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