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하나씩 의문이 들자 차유원의 몸에 빙의한 이후로 단 한 번도 원래 내 이름을 떠올려 본 적 없다는 게 생각났다.
“…나는 어떻게 생겼었지?”
그리고 점차 원래의 내 얼굴이 잊혀갔다. 누군가 내 모습을 의도적으로 하나씩 지워가는 것처럼 원래의 ‘나’를 둘러싼 모든 형태가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그동안 경험해 보지 못한 상황에 모든 게 다 혼란스러웠다. 누가 머릿속에 검은색 물감을 풀어놓은 것처럼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검은색 바탕에 아무리 그림을 그려봤자 더 새까매지는 것처럼. 원래 세계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려 할수록 모든 것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멍한 얼굴로 과거를 더듬었지만 결국 아무것도 상기하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떤 회사에 다녔고, 회사 동료들은 어떻게 생겼는지 생생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얼어 붙어있는 검은색 화면 속 내 얼굴, 아니 차유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더더욱 진짜 ‘내’ 얼굴이 생각나지 않았다.
“자, 잠깐 어지러워서 그러는 거야… 괜찮아, 괜찮을 거야.”
달달 떨리는 손을 꽉 잡고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그러던 와중에도 놀란 마음이 아이에게 전해지는 건 아닐까 걱정스러워 아랫배를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조금 쉬다 보면 다시 생각날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말자.”
그동안 이런저런 일들이 한꺼번에 몰려와서 그런 거라고 불안한 마음을 애써 달랬다.
***
퇴근 시간이 겹쳐 꽉 막힌 도로 사이로 검은색 차가 아슬아슬하게 파고들었다.
끼익.
뒷바퀴가 아스팔트와 마찰하는 소리와 검은색 세단이 멈췄다. 검은색 양복과 검은색 구두를 신은 태범이 차에서 내렸다. 무표정한 얼굴로 앞장을 선 태범의 뒤로 남자들이 바짝 따라붙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오늘 진료 끝났습니다!”
이미 저녁 진료가 모두 끝난 시간, 간호사가 말했다.
“내일 다시 와주시겠- 헛.”
바쁘게 차트를 정리하던 간호사는 병원 내부를 가득 채운 사내들을 보곤 손에 쥔 차트를 떨어뜨렸다. 빼곡하게 선 남자들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태범과 시선이 마주한 간호사는 숨을 죽였다. 누가 봐도 우성 알파인 남자의 불편한 심기가 피부 위로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 같았다. 긴장된 얼굴의 간호사는 떨리는 손을 마주 잡았다.
“한정희 씨 안에 계시나요?”
태범의 뒤에 서 있던 준석은 너무 겁내지 말라는 듯 부드럽게 웃으며 반쯤 얼어 붙어있는 간호사에게 물었다.
“저희 원장 선생님은 왜….”
준석의 그러한 노력에도 간호사는 여전히 긴장한 얼굴로 덜덜 떨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원장이 걱정되는지 이유를 물었다.
“차유원 환자에 대해서 물어볼 게 있습니다.”
“환자 개인의 진료 기록은 함부로 말씀드릴 수-”
간호사가 마지막 남은 용기로 그럴 수 없다고 말했지만 태범은 시간 낭비했다는 듯 고개를 돌려 진료실로 향했다. 노크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간 태범은 예상했다는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한정희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차유원 환자 진료 기록 확인하러 왔습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뒤따라 들어온 준석이 이미 몇 번의 안면이 있는 한정희에게 동의를 구하듯 고개를 꾸벅였다.
“그건 어렵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본인이 동의하지 않는 이상.”
“그래서 그딴 걸 차유원한테 내밀었나?”
태범은 한정희의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피곤한 듯 어두워진 얼굴로 버릇처럼 라이터를 달칵거리는 태범의 눈빛이 싸늘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피식 입꼬리를 들어 올린 태범은 ‘한정희’라고 적혀있는 명패를 문질렀다.
“한정희 씨.”
“…….”
“내가 지금 그쪽이랑 말장난이나 하려고 온 게 아니거든.”
“…….”
“좋게 말로 할 때 대답하는 게 좋을 겁니다.”
탁, 하고 라이터를 책상 위에 내려놓은 태범이 흉흉한 눈으로 한정희를 쏘아보았다.
“차유원, 임신했습니까.”
태범의 말에 의사에 눈빛이 잠깐 움찔 떨렸다. 그 표정만으로도 알겠다는 듯 태범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얼마나 됐습니까.”
“환자 개인에 대한 정보는-”
“유원이가 사라졌습니다.”
“…네?”
흉흉한 얼굴로 의사를 겁박하기라도 할 듯 아슬아슬했던 태범을 둘러싼 공기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유원이 방에서 나온 겁니다.”
태범은 갈기갈기 찢어진 종잇조각을 붙인 너덜너덜한 안내서를 의사에게 건넸다. 종이는 글자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엉망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꼼꼼하게 찢은 종이에서 아이를 낳겠다는 유원의 의지가 엿보였다.
“내 아이일지도 모르는 아이가 차유원 배 속에 있단 말입니다. 몇 주 됐습니까.”
“…말씀드릴 수-”
망설이는 얼굴로 아랫입술을 깨문 한정희의 눈에 핏줄이 불거질 정도로 힘을 준 태범의 주먹이 들어왔다. 처음에 강압적인 태도는 어디 가고, 유원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감정이 태범을 간절하게 만들었다. 태범의 간절한 두 눈동자를 마주한 한정희는 고민을 마친 듯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차유원 씨는……. 임신 8주 차가 넘으셨어요.”
결국 한정희의 입에서 대답이 나왔다. 태범은 이를 악물었다. 임신 8주 차. 그렇다는 건 유원의 배 속에 있는 아이는,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아이라는 의미였다. 그것을 깨달은 태범의 얼굴에 만감이 교차했다.
“형님.”
뒤에서 저를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 태범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정희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고맙습니다. 다음에 다시 뵙죠.”
병원에서 빠져나온 태범은 병원 근처 헬기 탑승장으로 이동했다.
“차유원은 어떻게 됐어.”
“지금 주무시고 계시답니다.”
“뭐? 어디서.”
“기차 안에서 와플 사과 맛 한 개, 딸기 맛 한 개. 그리고 찐 옥수수 하나를 추가로 드시고 지금 막 잠드셨어요.”
준석은 머쓱한 얼굴로 태범에게 사진 하나를 건넸다. 태범이 고개를 돌려 화면을 바라보자 먹다만 옥수수를 손에 들고 입을 살짝 벌린 채 자고 있는 유원이 보였다.
“사람 피 말리게 해놓고 잘도 자네.”
“그게… 아무래도 임신하면 잠이 많아지니까요. 게다가 아침부터 도망가시느라… 피곤하실 만도- 크흠.”
준석은 태범의 눈치를 보다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금세 밝아진 목소리로 태범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축하드립니다, 형님.”
심란한 얼굴로 유원의 사진을 바라보던 태범은 준석의 말에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형수님을 닮았으면 무척 귀여운 조카겠어요.”
준석은 자신이 더 기대되는지 기분 좋게 웃으며 첫 신발을 직접 준비하겠다고 부산이었다.
“애들한테 멀리서 지켜만 보라고 해.”
“가까이 가도 형수님은 모르실 거 같긴 합니다만 알겠습니다.”
태범은 준석의 말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눈치가 정말 없는 유원이었기에, 그러고도 남을 것 같긴 했다.
“어쨌든 도움 필요한 일이 생기면 최대한 자연스럽게 도와주라고 하고.”
“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애들도 워낙 형수님을 좋아해서-”
“누굴, 좋아해?”
유원이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는 걸 알고 밝아졌던 태범의 얼굴이 순간 싸늘하게 굳었다.
“예? 그게, 어 그게 아니고-”
“어떤 새끼야.”
“오해하지 마십시오! 패, 팬으로서 좋아한다는 말이었습니다. 저희한테는 형수님은 연예인 비슷한 느낌이지 않습니까!”
준석은 다급하게 변명을 내뱉었다. 안 그래도 유원이 처음 집으로 들어온 그날, 본채에 살던 저를 비롯한 몇몇은 별채로 쫓겨났다. 게다가 본채와 100미터 이상 접근 금지. 본채에 있는 식당과 수영장, 영화관도 출입 금지.
별채에도 똑같은 시설이 있긴 해서 그게 아쉽지는 않았지만, 유원을 볼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철저하게 차단되어서 다들 태범을 사로잡은 유원에 대해 궁금해하는 차였다.
“본채에도 못 들어가게 하시고. 기껏해야 형수님께서 외출할 때 멀리서 보는 게 다잖아요.”
“알파 새끼들을 어떻게 믿고 내 집 안에 들여놔. 그리고 애초에 차유원을 너희가 왜 봐.”
태범은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번뜩거렸다.
“…귀여우시니까. 맨날 무식한 근육 덩어리들만 보다가 형수님을 보면 얼마나…. 아무튼 형수님을 보는 게 저희의 유일한 낙입니다.”
감히 형수님에게 다른 마음을 품은 게 아니었다. 그냥 지켜만 봐도 좋으니 귀엽고 말랑말랑한 얼굴을 조금 더 지켜보고 싶을 뿐이었다. 부하 직원들을 대표해 준석이 어필했지만 태범은 단호했다.
“됐고. 좋아한다고 한마디라도 했던 놈들은 당분간 해외로 돌려.”
“네? 혀, 형님?”
준석은 다급히 재고를 요청했지만 태범은 깡그리 무시했다. 어딜, 감히.
***
“날씨 좋~다.”
머리가 멍했는데 밖으로 나오니 나를 반기는 상쾌한 공기에 기분이 좀 나아졌다. 이미 해가 져서 어두컴컴했지만 나에게만큼은 푸르른 하늘, 그 자체였다.
“역시 딸기우유 맛이 최고라니까.”
근처 편의점에서 산 막대 사탕을 혀에 문지르자 달콤한 딸기우유 맛이 혀에 녹아들었다. 달콤한 사탕에 기분이 한층 더 좋아졌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가까운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자 처음 보는 노선이 가득했다.
“음…. 일단 가까운 시장으로 갈까…?”
핸드폰도 없고 옷도 하나도 없어서 우선 시장에서 필요한 것들부터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릉역에서 3 정거장 정도 떨어진 중앙시장을 손가락으로 콕 찍어 더블 체크하고 의자에 앉았다.
15분 후라는 버스 도착 예정 시간을 확인하고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옆자리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