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45)화 (45/136)

#45

“이, 이게 무슨 소리, 헉.”

당황한 얼굴로 문을 연 이준은 태범과 그 뒤로 복도를 꽉 채운 험악한 인상의 남자들의 모습에 서둘러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헙-”

하지만 그보다 빠른 손길로 문을 잡은 준석이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정중한 준석의 말과는 달리 태범은 활짝 열린 현관문을 지나쳐 새까만 구둣발로 집 안에 들어갔다.

“찾아.”

태범의 부하 한 명이 식탁에서 의자를 가져와 거실 한가운데 내려놓았다. 태범은 당연하다는 듯 그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아무 데도 안 계십니다!”

“이 집엔 안 계신 모양입니다, 형님.”

1분이 채 되지 않아 집 안 곳곳을 전부 수색한 남자들이 보고했다.

“형님, 어떡할까요.”

준석이 곤란하다는 얼굴로 태범에게 속삭였다. 하지만 태범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변화가 없는 표정으로 이준에게 말했다.

“어디로 빼돌렸어.”

고조 없는 높낮이로 입을 연 태범이 남자들이 무릎 꿇린 이준을 내려다보았다. 이준은 자존심이 상한 듯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몸에 힘을 주었지만, 그럴수록 이준을 제압한 남자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당신들 지금 뭐 하는 짓입니까!”

“차유원.”

“네?”

“차유원 어디로 빼돌렸냐고.”

지금껏 무표정으로 일관했던 태범의 눈에 살기가 일어난 순간, 이준은 제 몸을 옥죄이는 페로몬에 숨이 턱하고 막혔다.

“…윽.”

우성 알파의 정제되지 못한 페로몬이 집 안 가득 퍼져나갔다. 성난 우성 알파의 페로몬이 제게 향한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몇몇의 남자들이 이를 악물며 숨을 죽였다.

“다시 한번 말하지. 차유원 어디에 숨겼어.”

“…윽, 그러니까. 도망간, 겁니다. 애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준은 충혈된 눈을 부릅뜨며 저를 옥죄이는 페로몬을 비집고 자신의 페로몬을 드러냈다. 태범처럼 우성은 아니지만 제법 선명한 알파의 페로몬이었다. 두 개의 서로 다른 페로몬이 얽혔다.

이준은 저를 누르는 손길이 약해진 틈을 타 남자들을 밀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남자들이 다시 이준을 잡으려 했지만 태범이 고개를 까닥거리며 내버려 두라 지시했다.

“계속해 봐.”

태범의 거만한 태도에 이준은 이를 악물고 제 주머니 안에 들어있던 편지를 꺼내 태범에게 던졌다.

“유원이가 부탁한 겁니다. 당신한테 전하라고 하더군요.”

“차유원이?”

편지가 태범의 가슴에 부딪혔다 바닥으로 떨어졌다. 옆에선 준석이 편지를 주워들어 태범에게 건넸다. 편지를 펼친 태범은 유원의 글씨체가 확실한 글을 읽어 내려갔다.

[권태범 씨, 많이 놀랐죠? 근데 있잖아요,

태범 씨. 저 사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 한눈에 반했는데, 태범 씨한테 말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네요. 그래도 어쨌든 저는 그 사람과 평~생 함께하기로 했으니까 어쩌다 저를

발견해도 그냥 지나가 주세요. 그리고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잖아요. 어디서 제 욕은 하지 마시고요. 그럼

끼니 거르지 말고 잘 챙겨 드세요. 그동안 참 고마웠어요.]

태범을 둘러싼 서늘한 공기와는 달리 유원의 밝은 성격이 잘 묻어나는 편지였다. 그 순간에도 태범은 이 편지를 손수 한 자 한 자 적어나갔을 유원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점점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태범의 얼굴이 어두워지며 편지를 잡은 손이 떨렸다. 분노를 참는 듯 눈가에 핏줄이 솟은 태범의 얼굴에 준석이 힐끔 고개를 돌려 편지 내용을 읽었다.

“헛….”

누가 보더라도 알아차릴 수 있게끔 맨 앞글자만 여러 번 덧대서 쓴 흔적이 보였다. 권태범 시발새끼. 그것이 진짜 유원이 태범에게 남기고 간 말이었다.

“찾아. 무조건 찾아서 차유원 당장 내 눈앞에 데려와.”

지금까지는 모두 장난이었다는 듯 태범의 페로몬이 모두를 위협할 듯 공격적으로 바뀌었다. 준석은 유원이 남긴 ‘권태범 시발새끼.’라는 문장에 아찔해져 눈을 질끈 감았다. 어쩌려고 저런 말을….

그런 준석의 생각과는 달리 태범이 화가 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는 유원이 자신의 뒤통수를 치며 욕을 퍼붓고 떠나도 상관없었다. 그저 그 빌어먹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거슬렸을 뿐이었다. 태범이 번뜩이는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갑자기 집 안 한쪽에 서 있던 남자가 소리쳤다.

“아…! 혀, 형님! 형수님께서!”

‘형수님’이라는 말에 태범의 시선이 단번에 남자에게 향했다.

“핸드폰을 켜신 것 같습니다!”

“어디야.”

“어… 그게… 그러니까….”

남자는 유원의 위치를 확인하더니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남자는 연신 당황한 얼굴로 노트북 화면과 태범을 번갈아 보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답답한 마음에 준석이 남자가 가지고 있던 노트북을 빼앗아 확인했다. 마침내 유원의 현재 위치를 확인한 준석은 남자와 비슷한 얼이 되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김포공항입니다.”

준석의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태범이 조급한 발걸음으로 차에 올라탔다. 따라 나온 준석이 바로 김포공항으로 차를 몰았다.

“항공사에 협조 요청해서 모든 탑승 명단에 차유원이라는 사람이 있나 확인하고 플랫폼마다 애들 풀어서 무조건 찾아.”

태범은 먼저 공항으로 향하고 있는 남자들에게 전화로 지시했다.

“수단과 방법 가리지 말고 무조건 내 앞에 데려와.”

-네, 형님.

뚝. 전화를 끊고 답답함에 넥타이를 푼 태범이 창문을 조금 내렸다. 오늘따라 꽉 막힌 도로가 신경에 거슬렸다. 그러던 태범은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곰곰이 생각하다 고개를 돌려 준석에게 말했다.

“차유원한테 신분증이 있었나.”

“어… 아, 아니요.”

그러고 보니 홍콩 출장 건으로 유원의 가방에서 그의 신분증과 여권을 모두 가져간 태범이었다. 그러곤 금고에 넣어뒀다. 자신의 지문이 있어야만 열리는 금고에서 유원이 물건을 가져갈 확률은 희박했다. 피식. 한쪽 입꼬리를 올린 태범이 말했다.

“공항은 페이크야. 공항과 연결된 지하철을 중심으로 찾으라고 해.”

“아, 네!”

유원이 꽤나 머리를 굴린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그래. 얼마든지 도망쳐봐, 어디든 쫓아갈 테니.’

서늘한 눈으로 공항을 가리키는 표지판을 바라보는 태범의 턱이 단단하게 굳어있었다.

***

정체된 도로를 빠져나와 김포공항까지 달린 태범은 결국 유원을 찾지 못했다. 김포공항과 연결된 지하철 노선만 2개에 그 외에도 버스나 택시 이용객들을 전부 추적할 수 없어 결국 집으로 돌아왔다. 기나긴 기다림 끝에 발견한 건 핸드폰과 흰색 비닐봉지뿐. 태범은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고 준석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차유원은.”

“열차 내 CCTV를 확인한 결과 유원 님은 서울역행 열차를 타신 거 같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핸드폰을 켜놨군. 위치추적이 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어.”

태범은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은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그가 계획한 대로 보기 좋게 말려든 바람에 유원을 찾지 못하고 시간만 낭비했다. 벌써 하늘이 어두워졌다. 더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핸드폰이 발견된 열차 칸을 기점으로 주변 CCTV 전부 뒤져서 차유원 행적 쫓아. 차유원이 갈만한 곳에 인력 전부 배치하고.”

유원에게 뒤통수를 세게 맞은 태범은 모든 인력을 유원을 찾는데 쏟아부었다. 태범의 시선이 유원이 갈만한 곳을 모아놓은 리스트로 옮겨졌다. 영화관, 카페, 식당 등 유원 또래의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곳을 쭉 훑던 태범이 고개를 들었다.

아.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차유원이 제게서 도망간다면 가장 먼저 그 곳으로 갔을 텐데.

태범은 유원의 편지를 읽은 뒤 뇌가 굳어버렸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작게 조소했다.

“제천 쪽에 보낸 애들한테 연락하고, 할머님 통화 내역 중에 별다른 점 없는지 확인해.”

태범의 지시에 어디론가 연락을 한 준석의 표정이 밝아졌다.

“10분 전쯤 서울역에서 수신 내역 확인됐습니다.”

“출발하지.”

점점 좁아지는 포위망에 만족스러운 얼굴을 한 태범은 곧이어 만나게 될 유원을 떠올렸다. 사랑하는 사람이라…. 그게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차유원이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고, 죽이며, 죽이다 보면 언젠간 자신에게도 기회가 오겠지. 태범은 유원 앞에서 드러내지 못할 자신의 욕망을 머릿속으로 곱씹으며 눈을 감았다.

***

“저, 혹시 와플 지금 되나요…?”

향긋한 냄새의 근원지인 가게 앞에 도착하니 먹음직스러운 군밤색의 와플이 영롱한 빛을 내고 있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자꾸만 와플을 힐끔힐끔 쳐다보자 아주머니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나 줄까, 학생?”

“네네! 근데 사과 맛이랑 딸기 맛 하나씩 총, 두 개 주세요!”

아주머니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였다. 웃음이 절로 비어져 나왔다.

“아이고, 많이 배고픈가 보네. 조금만 기다려요.”

“네! 근데 이 어묵 지금 먹어도 돼요?”

평소 같았으면 냄새만 맡아도 속이 울렁거렸을 텐데 지금은 어쩐지 식욕이 왕성했다. 내가 쪼글쪼글한 어묵을 가리키자 아주머니는 손수 어묵 국물까지 떠주셨다.

“그럼, 되지. 그 대신 뜨거우니까 천천히 먹어요.”

“네!”

아주머니의 말에 서둘러 연기가 폴폴 나는 어묵을 집어 들었다. 쭈글쭈글 모양 잡힌 어묵 끝을 간장에 살짝 찍은 뒤 입을 크게 벌려 한입 베어 물자 혀끝에 뜨거운 열기가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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